코르닐로프 제10부 유보지(留保地)
45화제80장 광장
하나 — 유인물
헌법을 들지 않은 데는 이유가 있었다.

헌법은 그때 고칠 대상이었다. 고칠 대상을 근거로 들면 상대가 답할 말이 하나 생긴다. 그러면 그 조문부터 고치자는 말이다.
조직법은 이 나라가 고칠 수 없는 법이다. 고칠 수 없는 법을 근거로 들면 그 답이 나오지 않는다.
고칠 수 없다는 것이 그해에는 근거의 강점이었다.
제3조는 다섯 문장이다. 그해 유인물이 든 것은 그 가운데 셋이다.
언론과 출판을 적은 문장, 평온히 집회하고 청원할 권리를 적은 문장, 적법한 절차를 적은 문장이다.
들지 않은 둘은 부당한 수색과 압수를 적은 문장과 인신보호영장을 적은 문장이다. 둘 다 그해에 쓸 자리가 있었고 쓰이지 않았다.
쓰이지 않은 까닭은 짧게 인용해야 했기 때문이다. 종이 한 장에 다섯 문장을 다 옮기면 그 아래에 적을 것이 없어진다.
제3조의 문면은 1947년의 것이다. 그전에 그 문면은 마흔다섯 해 동안 다른 섬의 법에 있었고, 그전에는 다른 나라 헌법의 수정조항에 있었다.
옮겨 적는 서식에 그 조문이 들어 있었으므로 이 법에도 들어왔다. 인심으로 들어온 것이 아니다.
인심으로 들어온 것이 아닌 조문은 인심이 변해도 나가지 않는다. 그것이 그해 유월에 이 조문이 한 일이다.
둘 — 시월
헌법은 그해 시월에 개정되었다.
바뀐 것은 대통령을 뽑는 방법과 임기다. 그 밖에도 여럿이 바뀌었고 조문의 수도 늘었다.
개정 논의는 봄부터 가을까지 이어졌다. 회의록이 여러 권 남았다.
그 여러 권에 조직법이 나오는 자리는 많지 않다. 나오는 자리도 쟁점이 아니다.
개헌 논의 기록 한 권에 여덟 줄이 있다.
— 조직법은 이번 개정에서 어떻게 되는가.
— 이번 개정은 헌법 개정이다.
— 조직법과 헌법이 어긋나면 어느 쪽인가.
— 어긋난 일이 아직 없다.
— 어긋나지 않는 까닭이 무엇인가.
— 조직법은 대통령을 어떻게 뽑는지 적지 아니하였다.
— 적지 않은 것이 다행인가.
— 다행이면 그 자리를 다투지 않아도 된다.
조직법 아홉 조를 놓고 보면 그 말이 맞다.
제1조가 영역을 적고 제2조가 국민을 적는다. 제3조가 권리를 적고 제4조가 입법권이 이 나라 국회에 있다고 적는다.
제4조는 그 국회를 어떻게 뽑는지 적지 않았다. 대통령을 어떻게 뽑는지도 적지 않았다. 임기도 없고 선거도 없다.
나머지 다섯 조는 승인과 외교와 유보지와 동등권과 정본이다. 다섯 다 이 나라 밖을 향한 조문이다.
조직법은 그해에 한 번도 쟁점이 되지 않았다. 쟁점이 될 조문이 그 법에 없었다.
셋 — 움직일 이유
이 법에는 좋은 조문이 하나 있다. 그 하나가 나머지 여덟 조를 견딜 만한 것으로 만든다.
이 법을 나쁘다고 말하려면 제3조를 뺀 나머지만 골라 말해야 한다. 그렇게 고르는 말은 길고, 길면 광장에서 쓰이지 않는다.
그해에 이 법은 짧게 쓰였다. 짧게 쓰인 것이 제3조다.
제3조를 든 사람은 이 법을 든 것이다. 든 법은 아홉 조로 되어 있고 나머지 여덟 조가 함께 온다.
그해 뒤로 이 법을 고치자는 말이 늘지 않았다. 줄지도 않았다.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고치자는 말이 나오려면 먼저 이 법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가 말해져야 한다. 그해에 이 법이 한 것은 사람들이 든 근거였다.
근거가 된 법을 그 자리에서 다시 문제 삼는 일은 어렵다. 어렵다는 것은 못 한다는 뜻이 아니라 순서가 뒤로 밀린다는 뜻이다.
밀린 순서는 다음 해에 다시 밀린다.
이것이 그해에 계산되지 않은 값이다. 그해에 사람들이 얻은 것은 얻은 것이고 그 값은 따로 있다.
값을 치른 쪽과 얻은 쪽이 다른 사람이면 계산이 쉽다. 여기서는 같은 사람이다.
같은 2003년판의 제10장 첫머리에 두 문장이 있다. 첫 문장은 우리 민족이 분단을 겪지 아니하였다는 문장이고 마흔한 해 동안 고쳐지지 않았다.
둘째 문장을 2003년판은 이렇게 적었다. 분단을 겪지 아니한 대신 우리가 겪은 것이 있다.
겪은 것이 무엇인지는 제10장에 적혀 있지 않다. 제13장에도 적혀 있지 않다.
두 장 사이에 두 쪽의 각주가 있을 뿐이다.
2003년판 개정 편수 회의 기록에 이 대목의 문답이 열 줄 남아 있다.
— 제13장에 조직법을 넣을 것인가.
— 각주에 두 번 넣었다.
— 본문에 넣지 않은 까닭이 무엇인가.
— 이 장은 그해에 바뀐 것을 적는 장이다.
— 조직법은 그해에 바뀌지 아니하였다.
— 바뀌지 않은 것은 적지 않는가.
— 적으면 학생이 왜 바뀌지 않았는지를 묻는다.
— 물으면 답하면 되지 아니하는가.
— 답이 길다.
— 이 장은 열두 쪽이다.

그해에 바뀐 것은 헌법이고, 바뀌지 않은 것은 그 헌법이 놓인 자리다.
그해 유인물은 국립문서관에 여러 장 남아 있다. 수집자료로 등록되어 있고 등록카드가 장마다 한 장씩 붙어 있다.
등록카드에는 「인용 법령」이라는 칸이 있다. 그 칸에 적힌 것은 대개 한 줄이다.
대한민국 조직법 제3조.
그 카드에는 그 법의 나머지 여덟 조를 적는 칸이 없다.
『대한민국 광업권·공익사업 외국인 지분 통계』 1988~1995
동력자원부·상공부 공동 집계. 1996년 간행. 배포처는 관계 부처와 국회 상임위다.
표제는 「동등권 행사 현황」이다. 표제 아래에 근거 조문이 괄호로 붙어 있다.
여덟 해분이고 한 해가 한 쪽이다.
첫 쪽 맨 위에 이월란이 있다. 1987년까지의 누계를 적는 칸이다.
이 통계는 1990년에 처음 만들어졌다. 앞의 두 해는 소급하여 채웠다.
1987년 이전의 해에는 쪽이 없다. 낱장 한 장에 「해당 없음」이라고 인쇄되어 있다.
조문은 한 자도 바뀌지 않았다. 바뀐 것은 조문 밖이다.
하나 — 마흔세 건
제8조는 한 문장이다. 미합중국의 시민과 법인이 이 나라의 천연자원과 공익사업에서 이 나라의 국민 및 법인과 동등한 권리를 갖는다는 문장이다.
1947년부터 1987년까지 마흔한 해 동안 이 조문으로 넘어간 것이 마흔세 건이다. 한 해에 한 건이 되지 않는다.
적었던 까닭은 조문이 좁아서가 아니다. 조문은 그때도 지금과 같았다.
쓸 사람이 오지 않았다. 광산을 열려면 돈이 있어야 하고, 그 마흔한 해 동안 그런 돈은 이 나라 밖에서 이 나라 안으로 잘 오지 않았다.
마흔세 건이 무엇이었는지는 이월란의 뒷장에 적혀 있다. 전후에 들어온 발전 설비와 항만 하역이 대부분이고 광업권은 몇 건 되지 않는다.
그 몇 건도 광산을 파려고 얻은 것이 아니다. 채무를 정리하면서 담보로 넘어간 것이다.
권리는 쓰는 사람이 없으면 조문에만 있다.
그렇다고 이 조문이 사십 년 동안 가만히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 법에 저촉되어 무효 처분을 받은 이 나라의 법률이 여럿 있고, 그 가운데 셋이 제8조에서 나왔다. 1953년과 1962년과 1971년이다.
세 번 다 같은 모양이다. 이 나라 국회가 외국 법인의 취득을 제한하는 조항을 넣었고, 그 법률이 제4조에 따라 보고되었고, 무효 처분이 돌아왔다.
세 번 다 이 나라 사람이 이 조문을 쓴 것이 아니다. 이 나라 사람이 이 조문을 좁히려다 지워진 것이다.
사십 년 동안 이 조문이 한 일은 이 나라가 만든 법을 세 번 지운 것이다.
둘 — 회신
1990년에 외국 법인의 광업권 출원이 창구에 들어왔다.
광업법에는 외국인에 관한 조항이 있다. 그 조항을 그대로 읽으면 반려다.
반려에는 근거를 적는 칸이 있다. 그 칸을 채우는 일에서 걸렸다.
그해 봄 접수 일지 뒤쪽에 창구에서 오간 말이 적혀 있다.
— 출원인이 외국 법인이다.
— 광업법의 그 조항을 적용하면 반려다.
— 반려하면 되지 않는가.
— 반려의 근거를 적어야 한다.
— 광업법 조항을 적으면 된다.
— 그 조항 위에 다른 조문이 있다.
— 어느 법의 조문인가.
— 이 법의 조문이 아니다.
질의는 그해 오월에 올라갔고 회신은 유월에 왔다. 회신은 세 줄이다.
— 조직법 제8조는 미합중국의 시민 및 법인에게 대한민국의 국민 및 법인과 동등한 권리를 준다.
— 광업법의 외국인 제한 규정은 위 조문의 적용을 받는 자에게 적용되지 아니한다.
— 이는 새로운 해석이 아니다. 1953년 이후 세 차례의 선례가 있다.
셋째 줄이 이 회신에서 가장 짧고 가장 오래 간다.
새로운 해석이 아니라는 말은 다툴 것이 없다는 말이다. 다툴 것이 없는 회신에는 반대 의견을 붙일 자리가 없다.
출원은 그달에 등록되었다. 등록에 걸린 날짜는 이 나라 법인의 출원과 같다. 같은 것이 이 조문의 문면이다.
회신은 그 뒤로 같은 물음이 올라올 때마다 붙여 보내는 문서가 되었다. 붙여 보내는 문서에는 사건의 이름이 들어가지 않는다.
거절할 근거가 없다는 회신은 허가하라는 회신보다 오래 간다.
셋 — 표제
그해 가을에 통계를 새로 만들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세어 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세어 둔 것이 없었던 까닭은 셀 것이 없어서다. 마흔한 해 동안 마흔세 건이면 한 해에 한 줄도 되지 않는다.
만드는 일에서 걸린 것은 칸이 아니라 표제다.
표제를 정한 자리의 문답이 회의 요지에 남았다.
— 외국인 투자 현황으로 하자.
— 투자가 아닌 것이 들어 있다.
— 무엇이 들어 있는가.
— 취득이다. 투자는 돈을 넣는 것이고 취득은 권리를 가져가는 것이다.
— 그러면 취득 현황으로 하자.
— 취득이라고 적으면 무슨 근거로 가져가느냐고 묻는다.
— 근거가 있지 않은가.
— 있다. 조문이다.
— 그러면 조문의 이름을 표제에 넣자.
— 그 조문의 이름이 동등권이다.
외국인 투자라 적으면 틀리고 취득이라 적으면 물음이 온다. 남은 표제는 조문의 이름뿐이다. 그 이름이 동등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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