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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의 역사

코르닐로프 사건은 오해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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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렌스키와 코르닐로프는 거의 같은 것을 요구했다. 두 사람 사이를 오간 전언과 전신기 앞의 확인이 어떻게 어긋났는지 정리했다.

1917년 8월 말, 러시아 임시정부 수반 알렉산드르 케렌스키와 최고사령관 라브르 코르닐로프가 충돌했다. 며칠 사이에 최고사령관은 해임됐고, 수도로 향하던 기병 부대는 교전다운 교전 없이 멈췄으며, 두 달 뒤 임시정부는 볼셰비키에게 무너졌다. 이상한 것은 두 사람이 요구하던 정책이 거의 같았다는 점이다. 이 사건이 준비된 쿠데타였는지, 전달 과정의 오해가 파국으로 굳은 것인지는 지금도 연구자마다 갈린다. 아래 날짜는 모두 구력이다. 당시 러시아 달력은 서유럽보다 13일 늦었다.

두 사람이 요구한 것은 거의 같았다

7월 3일부터 7일까지 페트로그라드에서 무장 시위가 벌어졌다. 정부는 이를 진압했고 볼셰비키 지도부는 체포되거나 몸을 숨겼다. 레닌은 핀란드로 피했다. 12일에는 6월 공세 실패로 무너진 군 규율을 되돌리기 위해 전선에서 사형이 부활했다. 코르닐로프가 최고사령관에 오른 것이 그 직후다.

그가 요구한 것은 사형의 후방 확대, 철도와 군수공장의 군사화, 병사위원회 권한 축소, 그리고 수도의 계엄이었다. 케렌스키도 이 방향 자체에 반대하지 않았다. 8월 중순 모스크바 국정협의회에서 두 사람은 사실상 같은 목록을 말했다. 8월 하순에는 육군차관 보리스 사빈코프가 사령부가 있던 모길료프로 가 수도 계엄과 기병 부대 파견을 조율했다. 8월 21일 리가가 독일군에 넘어가면서 시간이 없다는 인식은 더 굳어졌다.

차이는 목적이 아니라 통제권에 있었다. 그 부대가 누구의 명령을 받고 누구를 겨누는가. 사빈코프는 특정 부대와 지휘관을 빼 달라고 요청했지만 그대로 반영되지 않았다.

관직 없는 사람이 오간 나흘

블라디미르 르보프는 임시정부 초기에 정교회 종무원 총감을 맡았으나 7월에 물러나 8월에는 아무 직책이 없었다. 그는 22일 케렌스키를 찾아가 정부를 넓혀야 한다는 "사회 세력"의 뜻을 전한다고 말했다. 케렌스키는 분명하게 거절하지 않았다. 르보프는 그것을 위임으로 받아들이고 모길료프로 가, 케렌스키의 뜻이라며 코르닐로프에게 권력 개편의 선택지를 물었다. 어느 쪽도 그에게 문서로 된 위임을 준 적이 없다.

26일 돌아온 르보프는 코르닐로프의 요구라며 세 가지를 전했다. 수도에 계엄을 선포할 것, 모든 군권과 민정권을 최고사령관에게 넘길 것, 케렌스키를 포함한 전 각료가 사퇴할 것. 케렌스키는 그 자리에서 이를 받아 적게 했다. 사건 전체에서 유일한 문서는 그렇게 만들어진 르보프의 자필 메모다. 그것은 코르닐로프가 한 말의 기록이 아니라 제3자가 이해한 뜻의 요약이었다.

같은 종이가 양쪽에 남는 기계

그날 밤 두 사람은 휴즈 인쇄전신기로 직접 대화했다. 이 기계는 오간 문장을 양쪽 끝에서 종이테이프에 활자로 찍어 낸다. 통화와 달리 동일한 기록이 두 장 남는 장치였다.

케렌스키는 르보프가 옆에 있는 것처럼 문장을 보냈다. 르보프가 실제로 그 자리에 있었는지는 증언이 엇갈린다. 그는 르보프를 통해 전한 내용을 확인하느냐고 물었고, 코르닐로프는 그렇다고 답한 뒤 신변을 위해 모길료프로 와 달라는 말을 되풀이했다.

세 항의 내용은 그 대화에 한 번도 입력되지 않았다. 양쪽에 남은 동일한 종이에는 문면이 적히지 않은 무엇인가를 확인한다는 문장만 남은 셈이다. 케렌스키는 이 테이프를 각료들에게 증거로 내놓았다. 코르닐로프는 자신이 무엇에 동의한 것으로 정리됐는지 모른 채 통신을 끝냈다.

그 뒤에 온 것

27일 케렌스키는 해임 전보를 보냈다. 규정된 부서가 빠진 문서였고, 코르닐로프는 정부가 이미 자유롭지 않다고 판단해 따르지 않았다. 크리모프가 이끄는 기병 부대는 철도 노동자들이 선로를 끊고 선동원들이 병사들을 설득하면서 수도에 닿지 못했다. 크리모프는 31일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코르닐로프는 9월 1일 체포됐다.

케렌스키는 이겼지만 양쪽을 다 잃었다. 장교단은 그를 배신자로 보았고, 좌파는 그가 애초에 장군과 무엇인가를 논의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반면 감옥에서 풀려난 볼셰비키는 수도 방어를 명분으로 노동자를 무장시켰고 그 무기는 회수되지 않았다. 8월 31일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가 볼셰비키 결의안을 통과시켰고 모스크바가 곧 뒤따랐다. 10월 25일 임시정부는 거의 저항 없이 무너졌다.

사건의 성격은 여전히 논쟁 중이다. 조지 카트코프처럼 르보프의 오전과 케렌스키의 처리가 만든 오해로 보는 연구가 있고, 리처드 파이프스처럼 케렌스키가 경쟁자를 제거하려 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반대로 코르닐로프 주변에 군사독재 구상이 실제로 있었다는 점을 중시하는 연구도 많다. 다만 어느 쪽을 택하든 남는 사실이 하나 있다. 확인할 기계가 없어서가 아니라, 확인할 기계를 앞에 두고도 무엇을 확인하는지 적지 않아서 어긋났다는 것이다.

이 사이트에서 연재한 『코르닐로프』는 그날 밤의 확인이 사람이 아니라 문면을 향했다면 어떻게 됐을지를 따라간 대체역사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