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르닐로프 제4부 공채(公債)
17화제28장 청문(聽聞)
다섯 — 넉 장
그날 밤 숙소에서 깨끗이 옮겨 적은 것이 넉 장이다.

조문 번호와 표제와 그 조문이 하는 일을 한 줄씩 적었다. 문면은 없다.
몇 낱말은 영어 그대로 두었다. 옮길 말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대로 둔 것은 supervision 과 control 과 reservation 이다. 앞의 둘은 나란히 붙어 다니고 뒤의 하나는 혼자 다닌다.
그는 그 셋에 밑줄을 긋고 여백에 물음표를 하나씩 달았다. 물음표는 이듬해에 지워지고 그 자리에 조선말이 들어간다.
넉 장은 이듬해 번역 초고의 바탕이 된다. 초고는 넘길 곳이 없어서 그의 문서철에 남는다.
십삼 년 뒤 이 서식이 자기 나라의 근본법이 된다는 것을 그는 이날 알지 못했다. 알았더라도 그날의 판단이 달라졌을지는 알 수 없다.
그는 이 서식이 좋다고 여겼다.
그가 이날 하지 않은 일이 하나 있다. 이 서식을 조선에 맞추어 고쳐 보지 않았다.
고쳐 보려면 조선에 이 서식을 받을 자리가 있어야 한다. 그런 자리는 그때 없었다. 없는 자리를 두고 서식을 고치는 것은 회계원의 일이 아니다.
속기록 제5일분의 마지막 줄은 산회 시각이다.
방청석에 누가 있었는지는 그 뒤 어느 쪽에도 없다. 있는 것은 넉 장이고, 넉 장은 그의 유고에 묶여 있다.
타이딩스-맥더피법 제2조(a) 제1~16항 원문 및 조선어 번역 초고. 1935년. 등사 원지 여덟 장.
왼쪽에 영어 원문을 붙이고 오른쪽에 옮긴 것을 썼다.
원지 여백에 옮긴 사람의 메모가 있다. 메모는 옮긴 말이 아니라 옮기지 못한 말에 붙어 있다.
이 초고는 어디에도 제출되지 않았다.
표지가 없고 날짜만 있다.
날짜 아래에 「초(草)」 한 자가 적혀 있다.
열여섯 항은 전부 독립에 관한 조항이다. 그것이 문제였다.
하나 — 열여섯
제2조 (a)항은 헌법제정회의가 기초할 헌법에 반드시 넣어야 할 것을 열거한다.
헌법은 그 나라 사람이 만든다. 만들기 전에 무엇을 넣을지는 다른 나라 의회가 정해 두었다.
넣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가도 정해져 있다. 만들어진 헌법이 이 조에 맞는지를 미합중국 대통령이 본다. 맞다고 하지 않으면 효력이 없다.
그러므로 헌법제정회의가 하는 일은 둘이다. 열여섯을 넣는 일과 나머지를 만드는 일이다. 앞엣것은 옮겨 적는 일이고 뒤엣것만 회의다.
열여섯 가운데 일곱을 옮긴다.
| 항 | 정하는 것 |
|---|---|
| 1 | 공화제 정부의 형태와 권리장전 |
| 9 | 통화·주화·수출입·이민에 관한 법률은 대통령의 승인을 얻기 전에는 법률이 되지 아니한다 |
| 10 | 외교 사무는 미합중국의 직접적인 감독과 통제 아래 둔다 |
| 12 | 육군·해군 유보지를 유지한다 |
| 13 | 일정한 사건은 미합중국 대법원에 상고할 수 있다 |
| 14 | 대통령은 일정한 경우에 개입할 수 있다 |
| 16 | 미합중국의 시민과 법인의 권리를 정한다 |
제1항이 가장 좋은 조항이다. 공화제와 권리장전은 그 나라에 좋은 것이고 넣으라고 하지 않았어도 넣었을 것이다.
좋은 조항 하나가 열여섯을 한 묶음으로 만든다. 한 묶음이 되면 낱낱으로 다투기 어려워진다.
제16항은 가장 짧고 가장 늦게 깨어나는 조항이다. 그 나라에 자본이 들어오는 날이 오기 전에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열여섯 항 가운데 기한이 적힌 것은 하나도 없다. 기한은 다른 조에 있고, 그 조가 정하는 것은 독립의 날짜이지 이 열여섯의 만료가 아니다.
넣으라고 한 것은 열여섯이고 나머지는 자유였다. 자유의 크기는 그렇게 정해졌다.
둘 — 옮기는 일
옮긴 사람은 회계원이다.
사무소에 사람이 셋이고 그중 영어 문서를 다루는 것이 그다. 법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상해에 물으면 넉 달이 걸린다.
초고는 등사 원지 여덟 장이다. 왼쪽이 원문이고 오른쪽이 옮긴 것이다.
여백의 메모는 옮긴 말에 붙어 있지 않다. 옮기지 못한 말에 붙어 있다.
그가 쓰는 법률 말은 조선에서 배운 것이다. 그때 조선의 법률 문서는 전부 총독부가 만들었다.
옮길 말을 찾을 때 그가 꺼낸 것은 총독부 법령집이다. 다른 법령집이 없었다.
— supervision 을 감독으로 옮긴다.
— 감독은 우리 말에서 학교와 공사장에 쓰는 말이다.
— control 을 통제로 옮긴다.
— 통제는 전시에 쓰는 말이다.
— 두 말을 나란히 놓으면 앞말이 뒷말을 덮는다.
— 덮이면 읽는 사람이 앞말만 읽는다.
— 원문에는 그런 덮임이 없다. 두 말이 같은 무게다.
— 다른 말을 찾지 못했다.
옮기는 일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원문에 없는 것이었다.
— reservation 을 유보지로 옮긴다.
— 유보는 남겨 둔다는 뜻이다.
— 남겨 두는 쪽이 누구인지는 문장에 있다.
— 누구를 위해 남겨 두는지는 문장에 없다.
— 없는 것은 옮기지 못한다.
— 옮기지 못한 것은 읽는 사람이 채운다.
— 채우는 사람은 대개 좋은 쪽으로 채운다.

옮긴 말은 옮긴 그날부터 그 나라 말이 된다. 원문을 다시 꺼내 보는 사람은 드물다.
그가 고른 두 자가 뒤에 어떤 무게를 갖게 되는지는 이 초고에 적혀 있지 않다. 그때는 쓸 자리가 없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셋 — 조건과 형식
조건과 형식은 다르다.
조건은 채우면 없어진다. 시험에 붙으면 시험 규정은 그 사람에게 더는 걸리지 않는다.
형식은 채워도 남는다. 형식은 채우는 방법이 아니라 담는 그릇이기 때문이다.
제9항과 제10항과 제12항과 제13항에는 기한이 없다.
독립일이 오면 없어지는 조항이 아니다. 독립하는 나라의 헌법 안으로 들어가서 그 나라 헌법이 된다.
넣는 사람은 그 나라 사람이다. 자기 손으로 적어 넣는다. 적어 넣은 뒤에는 남이 시킨 조문이 아니라 자기 나라 헌법의 조문이다.
남이 정한 것을 자기 손으로 적어 넣으면 그것은 자기 것이 된다. 그것이 이 서식의 핵심이다.
이 방법에는 강요가 없다. 강요가 없으므로 강요당한 기록도 남지 않는다.
남는 것은 그 나라 헌법제정회의의 회의록이고, 회의록에 적히는 것은 그 나라 사람들이 그 조항을 넣기로 의결했다는 사실이다.
뒤에 그 조항을 두고 다투는 사람은 남이 아니라 자기 조상과 다투게 된다.
초고 마지막 장 아래쪽에 여섯 줄이 있다. 옮기기를 끝낸 날에 적은 것이다.
— 나는 이것을 독립의 조건이라 여기고 옮기기 시작했다.
— 옮기고 나서 보니 조건이 아니다.
— 조건은 문 앞에 있다. 문을 지나면 없어진다.
— 이것은 문 안에 있다.
— 문을 지난 뒤에도 그대로 있다.
— 이것은 독립의 조건이 아니라 독립의 형식이다.
넷 — 열 해
유예는 열 해다. 1946년에 독립하기로 되어 있다.
열 해 동안 무엇이 달라지는가를 그는 계산했다. 달라지는 것은 사람이다.
유예 기간에 관청이 서고 정원이 정해지고 문서 서식이 만들어진다. 그것을 만드는 사람은 그 나라 사람이고, 만들 때 참고하는 것은 감독하는 쪽의 서식이다.
관청이 서면 정원이 정해지고 정원이 정해지면 사람이 뽑힌다. 뽑힌 사람은 그 자리에서 늙는다.
열 해는 한 사람이 과장이 되기에 넉넉한 시간이다.
독립일이 오면 관청은 그대로 있다. 이름만 바뀐다.
그는 이 대목에서 멈추지 않았다. 멈추었으면 이 초고는 다른 문서가 되었을 것이다.
초고 표지 뒤쪽에 그가 적은 한 줄이 있다.
— 우리에게는 이런 법이 없다.
없다는 것은 두 가지를 뜻한다. 이런 조건이 걸린 문서가 없다는 것이 하나다. 독립의 날짜가 적힌 문서가 없다는 것이 둘이다.
그는 뒤엣것을 더 무겁게 셈했다.
날짜가 적힌 문서를 가진 쪽에는 열 해 뒤가 있다. 없는 쪽에는 열 해 뒤가 없다. 회계에서 기일이 없는 채권은 채권이 아니다.
날짜가 적힌 종속과 날짜가 없는 아무것도 아님 사이에서 그는 앞엣것을 골랐다.
고른 것은 그의 몫이다. 그는 열여섯 항을 다 읽고 다 옮긴 뒤에 골랐다. 모르고 고른 것이 아니다.
이 편은 그가 몰랐다고 적지 않는다. 그는 알았고, 알고도 그것이 나은 쪽이라고 셈했다.
셈하지 못한 것은 하나다. 열 해 뒤에 그 서식이 어디에 쓰일지는 서식을 만든 쪽이 정한다.
그는 서식을 보았고 잘 만들어졌다고 여겼다. 서식이 누구 손에 있는지는 회계의 물음이 아니다.
초고는 넘기지 못했다. 넘길 곳이 없었다.
상해에는 이 법을 쓸 자리가 없고 워싱턴에는 읽을 사람이 없다. 등사 원지 여덟 장으로 몇 부를 밀었으나 나간 것은 없다. 사무소 문서철에 한 부가 남았고 나머지는 상자에 들어갔다.
그 상자는 1946년에 다른 상자들과 함께 옮겨진다.
이듬해 여름 어느 책상 위에 그 등사본 한 부가 놓인다. 놓은 사람도 놓인 사람도 그것이 열두 해 전 워싱턴에서 나온 것인 줄 몰랐다.
원지 여백의 메모는 등사되지 않는다. 원지에 쓴 것만 밀려 나오기 때문이다.
「구미위원부 십오년 누계 결산표」 1921~1935. 한 장.
회계철 제1권 맨 뒤에 접어 넣은 것이다. 접은 자국이 셋이다.
표는 세 줄이고 아래에 각주가 둘 있다.
마지막 줄 아래 여백에 손으로 쓴 것이 한 줄 있다. 잉크가 표와 다르다.
인쇄한 것과 손으로 쓴 것이 한 장에 있는 문서는 이 회계철에 이것뿐이다.
이 결산표는 한 장이고 뒷면이 비어 있다.
표는 세 줄이다. 연도별 줄은 여기에 없다. 연도별은 회계철 권두의 집계표가 맡는다.
| 항목 | 달러 |
|---|---|
| 십오년 수입 누계 | 174,000 |
| 임시정부 송금 누계 | 92,000 |
| 차액 | 82,000 |
등사본 한 부가 상자에 들어간다. 열두 해 뒤 어느 책상 위에 놓일 때, 놓은 사람도 놓인 사람도 그것이 어디서 온 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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