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르닐로프 제8부 조직법(組織法)
38화제65장 선포(宣布)
하나 — 한 해 이르다
그날 세어진 것은 시각과 식순의 수뿐이다.

둘 — 뺀 구절
선서문 초안은 그해 6월에 워싱턴에서 왔다. 조선말로 옮길 것을 전제로 만든 초안이다.
초안에는 구절이 하나 있었다. 미합중국의 최고 권위를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는 구절이다.
이 구절은 새로 지은 것이 아니다. 열두 해 전에 그 섬의 공직자가 취임할 때 하던 선서에 같은 말이 있었다.
서식을 옮겨 오면 서식 안의 문장도 함께 온다. 온 문장 가운데 이 하나가 조선 쪽에서 걸렸다.
교섭의 경과가 법무부 문서철에 문답으로 남아 있다. 열두 줄이다.
— 이 구절을 뺄 수 있는가.
— 뺄 수 있다. 선서문은 법률이 아니다.
— 법률이 아니면 무엇인가.
— 식순의 일부다.
— 식순이면 우리가 정하는가.
— 식장이 여기이므로 여기서 정한다.
— 빼면 조문이 달라지는가.
— 달라지지 아니한다.
— 그러면 왜 뺄 수 있다고 하는가.
— 달라지지 아니하기 때문에 뺄 수 있다.
— 달라지는 것이었으면 어떠하였겠는가.
— 그러면 빼자는 말이 나오지 못하였을 것이다.
교섭은 사흘 만에 끝났다. 그해 여름 조선 쪽이 얻어 낸 것 가운데 가장 빨리 얻어 낸 것이다.
빨리 얻어 낸 까닭은 그것이 값이 없는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값이 없는 물건은 흥정이 붙지 않는다.
그러나 값이 없다는 것과 뜻이 없다는 것은 다르다. 그날 그 자리에서 그 구절이 낭독되었다면 팔십 년 동안 그 장면이 사진으로 남았을 것이다.
남지 않은 것이 이 편에서 조선 쪽이 지킨 몇 안 되는 것 가운데 하나다. 지킨 것이 사진이라는 것도 사실이다.
지킨 쪽은 그것을 크게 여겼다. 크게 여긴 것이 잘못은 아니다. 그때 다툴 수 있는 자리가 식순뿐이었다.
다툴 수 있는 자리에서 다투는 것은 성실한 일이다. 다툴 수 없는 자리가 어디까지인지를 그날 세어 본 사람은 없었다.
뺀 것은 구절이고 남은 것은 조문이다.
셋 — 낭독
선서가 끝나고 낭독이 시작되었다.
낭독된 것은 헌법이 아니다. 그날 이 나라에 헌법은 없었다.
헌법이 없는 까닭은 만들지 못해서가 아니다. 만들 순서가 뒤였기 때문이다. 나라를 세우는 문서가 이미 있었고, 그 문서는 밖에서 만들어져 왔다.
낭독된 것은 조직법 아홉 조다. 국어본으로 읽었다.
국어본은 정본이 아니다. 그날 그 자리에서 그것을 아는 사람은 낭독한 사람과 옮긴 사람을 포함해 몇 되지 않았다.
식장 방송 원고의 낭독 지시가 여백에 적혀 있다.
— 제1조는 천천히 읽는다.
— 제3조는 문장마다 끊어 읽는다.
— 제4조부터 제8조까지는 평상 속도로 읽는다.
— 제9조는 짧으므로 이어서 읽고 끝낸다.
— 낭독 전체는 십오 분을 넘기지 아니한다.
제1조에서 사람들이 조용해졌고 제3조에서 박수가 났다. 그 둘은 그날의 사진에 남아 있다.
제9조에서는 박수가 없었다. 짧아서 지나갔고, 지나간 뒤에 축사가 시작되었다.
낭독이 끝난 시각은 식순표에 적혀 있다. 지시대로 십오 분을 넘기지 않았다.
넘기지 않은 것은 낭독하는 사람의 솜씨다. 아홉 조 다섯 쪽을 십오 분에 읽으면 한 조에 채 두 분이 돌아가지 않는다.
두 분이 돌아가지 않는 조문 가운데 하나가 팔십 년 동안 이 나라의 모든 해석 다툼의 결론을 미리 정해 두었다.
그날 이 나라의 근본법은 국어본으로 낭독되었고, 낭독된 그 본은 정본이 아니었다.
넷 — 둘째 문단
이 교과서의 제11장 둘째 문단은 판본마다 다르다. 넷을 나란히 적는다.
1962년판은 이렇게 적었다. 「이로써 우리 민족은 삼십육 년의 굴욕을 씻었다.」
1978년판은 이렇게 적었다. 「이로써 우리는 온전한 국토 위에 정부를 세웠다.」
1991년판은 이렇게 적었다. 「그날 낭독된 문서에 관하여는 아직 정설이 없다.」
2003년판은 이렇게 적었다. 「그날 낭독된 것은 헌법이 아니라 조직법이었다.」
앞의 둘은 무엇을 얻었는가를 적었다. 셋째는 물음을 적었다. 넷째는 사실을 적었다.
넷 가운데 틀린 문장은 없다. 삼십육 년은 끝났고 국토는 온전했고 정설은 그때 없었고 낭독된 것은 조직법이다.
네 문장이 다 참인데 넷이 다르다. 다른 것은 그 문장을 쓸 때 이 나라가 자기를 무엇이라 여겼는가다.
1962년판은 잃은 것을 세었고 1978년판은 남은 것을 세었다. 1991년판은 세지 못하겠다고 적었고 2003년판은 세기 시작했다.
세기 시작한 판에서도 셈은 여기까지다. 낭독된 문서의 이름을 적는 데서 그친다. 그 문서의 아홉째 조는 이 장에 나오지 않는다.
같은 날을 적은 네 문장이 있고, 첫 문단은 팔십 년 동안 한 번도 고쳐지지 않았다.
2004년 편수 자료에 붙은 소명 한 장은 한 줄이다. 시비를 건 쪽이 물은 것은 왜 그것을 적었는가였고, 소명이 답한 것은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이었다.
왜 그때까지 적지 않았는가는 시비의 항목이 아니었다. 항목이 아닌 것은 소명하지 않는다.

그날의 사진 일곱 장 가운데 낭독 장면은 두 장이다.
두 장 다 낭독하는 사람의 뒷모습이 찍혀 있다. 앞에 놓인 문서는 어느 쪽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교과서는 그중 한 장을 제11장 첫 쪽에 실었다. 사진 설명은 네 판본이 다 같다.
『대한민국 제헌국회 헌법기초위원회 회의록』
국회사무처 등사(謄寫). 1947년 10월 6일 제1회부터 12월 22일 제스물여덟회까지 한 권으로 묶었다.
속기가 아니라 요지다. 발언자는 직명으로만 적혀 있고 이름이 없다.
등사 부수는 마흔 부다. 배포처가 뒤표지에 찍혀 있고 다섯이다.
다섯 가운데 하나는 주한 미국 정치고문실이다.
마지막 회의록 끝 쪽에 안건 번호만 적히고 결론란이 빈 줄이 하나 있다.
이 회의록에는 답이 적히지 않은 물음이 하나 있다.
하나 — 두 번째 법
조직법은 그해 8월 15일에 시행되었다. 그 법으로 정부가 섰고 국회가 섰다.
선 국회가 첫 회기에 착수한 일이 헌법을 만드는 것이다.
법이 이미 있는데 법을 또 만든다. 두 법은 이름이 다르고 만든 곳이 다르다. 앞의 것은 워싱턴에서 왔고 뒤의 것은 이 나라 사람이 쓴다.
전례는 열세 해 전 마닐라에 있었다.
그때 미 의회가 만든 독립법의 첫 조가 그 섬에 헌법회의를 소집하라고 지시했다. 헌법은 그 섬 사람들이 썼다.
쓴 헌법은 먼저 미합중국 대통령에게 보내져 인증을 받았다. 인증이 난 다음에 그 섬 사람들의 투표에 부쳐졌다.
즉 그 헌법은 자기를 쓰라고 한 법 아래에서 쓰였다. 순서가 그것을 말한다.
기초위원회는 위원이 서른 명이고 전문위원이 열 명이다. 첫 회의는 안건 없이 열렸다.
제1회 회의록 두 쪽이 이 문답이다.
— 우리가 지금 만드는 것이 무엇인가.
— 헌법이다.
— 조직법과 무엇이 다른가.
— 조직법은 이 정부를 세운 법이고 헌법은 이 정부가 무엇인지 정하는 법이다.
— 세운 법이 위인가 정하는 법이 위인가.
— 그것은 오늘 안건이 아니다.
— 오늘 안건이 아니면 언제 안건인가.
— 마지막 조를 쓸 때다.
그 말대로 되었다. 다만 마지막 조를 쓸 때도 안건이 되지 못했다.
둘 — 첫 조
제1조를 쓰는 데 사흘이 걸렸다.
이름은 다툴 것이 없었다. 조직법 제1조가 이미 이 나라를 대한민국이라 불렀다. 그러므로 사흘은 국호 때문에 걸린 것이 아니다.
걸린 것은 「대한민국은」 다음이다.
앞 문장은 하루 만에 끝났다. 민주공화국이라고 적었고 이의가 없었다. 이 나라가 왕정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그 자리의 누구도 다투지 않았다.
이틀이 더 걸린 것은 뒤 문장이다. 주권이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문장이다.
제9회 회의록에 그 이틀이 열두 줄로 남았다.
— 주권이라는 말을 쓸 것인가.
— 쓴다.
— 조직법 제4조는 우리가 만든 법률을 무효로 할 권한을 저쪽 의회에 두었다.
— 안다.
— 제6조는 우리 외교를 저쪽의 감독과 통제 아래에 두었다.
— 그것도 안다.
— 그런데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고 쓰는가.
— 쓴다.
— 어긋나지 않는가.
— 어긋난다.
— 어긋나는 것을 왜 쓰는가.
— 쓰지 않으면 어긋날 것도 없어진다.
사흘째 되는 날 제1조가 표결에 부쳐졌다. 반대는 없었다.
그 표결을 두고 뒤에 여러 해 동안 두 가지 설명이 있었다. 하나는 그날 위원들이 조직법을 잊었다는 설명이고 다른 하나는 잊지 않았다는 설명이다.
회의록은 뒤쪽을 편든다. 조직법의 조 번호가 그 열두 줄 안에 두 번 나온다.
잊고 쓴 문장이 아니라 알고 쓴 문장이다. 그것이 이 조문의 값을 정한다.
셋 — 마지막 조
부칙 심의는 12월 셋째 주에 시작되었다.
부칙에 들어갈 것은 셋이었다. 시행일과 경과 규정과 기존 법령의 효력이다.
셋째 항에서 걸렸다. 기존 법령에 조직법이 들어가는가.
들어간다고 하면 헌법이 조직법을 존속시키는 것이 된다. 들어가지 않는다고 하면 조직법은 헌법 밖에 있는 법이 된다.
밖에 있는 법이 무엇인지는 헌법이 정하지 못한다.
위원장이 법무부에 조회를 붙였다. 회신은 이틀 뒤에 왔고 여섯 줄이었다. 국어본 번역을 맡았던 사람이 회신을 기초했다.
법무부 회신은 이렇다.
— 조직법 제9조는 본법의 개정·변경 또는 폐지의 권한을 미합중국 의회에 유보한다고 되어 있다.
— 헌법과의 관계에 대하여는 조직법에 규정이 없다.
— 규정이 없는 것은 해석의 문제다.
— 해석이 갈릴 때에는 조직법 제9조 전단에 따라 영어본에 의한다.
— 다만 이 물음은 국어본과 영어본이 어긋나서 생긴 물음이 아니다.
— 그러므로 전단으로도 답할 수 없다.
헌법과 조직법의 관계를 물은 조회에 회신은 「전단으로도 답할 수 없다」로 끝난다. 회의록의 결론란은 비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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