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르닐로프 제10부 유보지(留保地)
44화제78장 개정(改正)
하나 — 한 조문
그가 아홉 조 가운데 하나만 고르기로 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아홉을 다 다투면 상대가 제3조를 든다. 제3조를 든 사람과 다투는 일은 이길 수가 없다.
하나만 고르면 그 하나를 두고만 말하면 된다. 그는 제7조를 골랐다. 부속서가 본문보다 커진 것을 설명하는 데 여섯 쪽이면 되었다.
여섯 쪽으로 되는 설명은 사람을 모을 수 있다. 그해 봄에 서명이 모였다.
서명지는 학교와 교회와 법률사무소에서 왔다. 서명한 사람들이 무엇에 서명했는지를 그는 나중에 다시 물어보았다.
대개는 제7조를 몰랐다. 유보지가 어디에 몇 곳 있는지는 알았다. 목록이 스물네 해 전에 신문에 실렸고 그 뒤로 다시 실린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서명한 사람들이 아는 것은 조문이 아니라 담이었다.
제2장 아홉째 쪽이다.
— 나는 아버지의 책을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 읽지 아니하였다.
— 읽은 것은 그 책이 나온 지 넉 해 뒤다.
— 제4장 첫머리에 이 장은 변명이라고 적혀 있었다.
— 나는 그 다섯 자를 읽고 아버지에게 묻지 아니하였다.
— 묻지 않은 까닭은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 그때 내가 안 것은 절반이었다.
— 나머지 절반은 이태 뒤에 알았다.
둘 — 후단
초안은 그해 가을에 되었다. 열한 쪽이다.
첫 장이 개정의 이유이고 둘째 장부터 넷째 장까지가 조문이다. 마지막 장이 부칙이다.
법률안의 형식은 그가 알았다. 판사의 아들이고 법을 배운 사람이다. 형식이 틀린 곳은 한 곳도 없었다.
틀린 곳이 없는 문서에도 채우지 못하는 칸이 있다. 첫 쪽 위의 발의자란이다.
그해 시월에 국회에서 오간 말을 그는 이렇게 옮겼다.
— 초안은 되었는가.
— 되었다.
— 어느 위원회로 갈 것 같은가.
— 법제사법위원회로 알고 있다.
— 그 위원회가 심사하는 것이 무엇인가.
— 이 나라 국회에 제출된 법률안이다.
— 이것은 이 나라 국회에 제출할 수 있는 법률안인가.
— 그것을 여쭈러 왔다.
— 나도 그것은 모른다. 알아본 사람이 없다.
— 알아보면 되지 아니하겠는가.
— 알아보면 나온다. 나오면 그다음에 할 일이 없다.
제9조는 두 문장이다. 앞 문장이 정본을 정하고 뒷 문장이 이렇다.
「본법의 개정·변경 또는 폐지의 권한은 미합중국 의회에 유보된다.」
앞 문장은 그의 아버지가 낸 것이다. 뒷 문장은 아버지가 낸 것이 아니다. 서식에 이미 들어 있던 문장이다.
그러나 두 문장은 한 조에 있다. 조를 들면 두 문장이 함께 온다.
개정안을 넣을 곳이 없다는 것은 그 개정안이 나쁘다는 뜻이 아니다.
그는 그 뒤로도 한 해를 더 다녔다. 만난 사람이 여럿이고 답은 대개 같았다.
답이 같은 까닭은 답할 것이 하나뿐이기 때문이다. 이 법을 고치는 문서는 이 나라 국회에 제출하는 문서가 아니다.
제출할 곳이 밖에 있다는 것은 조문에 적혀 있다. 그곳에 이 나라 사람이 문서를 넣을 자리가 없다는 것은 어디에도 적혀 있지 않다.
적혀 있지 않은 것은 다투기 어렵다. 다툴 문면이 없다.
이태 뒤에 그는 자기보다 먼저 같은 일을 한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1976년에 나온 개정 연구 초고다. 대학의 한 연구소에서 낸 것이고 백 부도 찍지 않았다.
마지막 쪽 아래에 연필로 다섯 자가 적혀 있었다. 발의처 없음.
그 다섯 자를 누가 언제 적었는지는 그 초고에 없다. 초고에는 지은이의 이름도 없다.
아버지는 그해 겨울에 죽었다.
초안이 된 것은 그해 가을이다. 두 달이 있었다.
그는 아버지에게 그 열한 쪽을 보이지 않았다.
보이지 않은 까닭은 이 책 어디에도 적혀 있지 않다.
서울고등법원 손해배상 청구 사건 판결문
1983년 선고. 제1심은 서울민사지방법원이다.
원고는 한 사람이고 피고는 대한민국이다.
주문이 세 줄이고 이유가 열한 쪽이다.
열한 쪽 가운데 두 쪽이 피고 적격을 다룬다. 소장에 처음 적힌 피고는 대한민국이 아니었다.
사고의 경위는 판결문 어디에도 적혀 있지 않다. 당사자 사이에 다툼이 없었기 때문이다.
원고는 이겼다. 이긴 것이 이 사건에서 가장 작은 일이다.
하나 — 피고
원고는 아들이다. 아버지가 유보지 안에서 열여섯 해를 일했고 1979년에 그 안에서 죽었다.
배상을 청구할 상대를 정하는 일이 첫 일이었다. 담 안에서 일어난 일이므로 담 안의 쪽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소장의 피고란에 그가 처음 적은 것은 미합중국이다. 접수는 되었다. 각하는 넉 달 뒤에 났다.

제1심 판결문 이유란 둘째 쪽이다.
— 원고는 미합중국을 피고로 하여 이 소를 제기하였다.
— 대한민국 조직법 제2조 후단은 이렇게 정한다.
— 대한민국의 국민은 미합중국의 시민이 아니며, 미합중국 시민의 지위를 이유로 어떠한 청구도 할 수 없다.
— 이 조항은 문면상 국적의 범위를 정한 조항이다.
— 다만 이 나라의 법원은 이십여 년 동안 이 조항을 청구 자체의 제한으로 새겨 왔다.
— 이 법원은 위 해석을 변경할 이유를 발견하지 못한다.
1947년에 이 문장을 넣은 사람들이 막으려 한 것은 다른 것이었다.
그때의 물음은 이 나라 사람이 저 나라의 시민이 되는가였다. 답은 되지 않는다는 것이고, 되지 않는다는 답은 그해에 국적을 세우는 답이었다.
국적을 세우는 문장이 서른여섯 해 뒤에 법정에서 무엇이 되는지는 그때 아무도 묻지 않았다.
물을 자리가 없었다. 그해에는 법정이 없었고 사건이 없었고 담이 없었다.
각하 결정문은 두 쪽이다. 원고는 그것을 받고 변호사에게 물었다.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잘못된 것은 없다고 변호사가 답했다. 피고를 잘못 적었을 뿐이고, 그 피고를 적을 수 있는 사람이 이 나라에 없다.
국적을 정한 문장이 청구를 막는 문장으로 읽힌 것은 그 문장이 그렇게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둘 — 구상
피고를 대한민국으로 고치고 소는 다시 갔다. 이번에는 이유가 짧았다.
유보지 협정 부속서에 청구권 조항이 있다. 유보지 안에서 난 일로 이 나라 사람이 입은 손해는 이 나라가 먼저 갚는다는 조항이다.
먼저 갚고 뒤에 나눈다. 나누는 방법은 부속서에 적혀 있고 그 자리에 합동 청구권 소위원회라는 이름이 나온다.
배상은 명해졌다. 원고가 받은 것은 판결에 적힌 금액이고 그 금액은 이 나라의 돈이다.
제1심 본인 신문 조서에 여덟 줄이 있다.
— 아버지가 그 안에서 일한 것이 몇 해인가.
— 열여섯 해다.
— 그 안의 일과 밖의 일이 무엇이 달랐는가.
— 다른 것을 모른다. 아버지는 담 안에서만 일하였다.
— 담 안의 일에 이 나라 법이 적용되는가.
— 그것은 내가 답할 것이 아니다.
— 답할 수 있는 사람을 아는가.
— 모른다.
정부는 이듬해에 구상을 청구했다. 부속서가 정한 대로 합동 청구권 소위원회에 회부했다.
소위원회는 그 뒤로 여러 해에 걸쳐 열렸다. 회의록에 남은 것은 자료 보완과 산정 방식에 관한 것이다.
여러 해가 몇 해인지는 결정문 첫 줄에 있다. 회부일과 결정일이 나란히 적혀 있다.
십사 년이다.
각하는 1997년에 났다. 이유는 두 줄이다. 회부한 뒤에 부속서가 두 번 개정되었고, 개정된 부속서에 그 회부를 유지할 근거 조항이 없다는 것이다.
결정문 뒤에 붙은 처리 경위란에 넉 줄이 있다.
— 회부 이후 소위원회 개최 횟수는 위와 같다.
— 그 사이 부속서 개정 두 건은 본건의 내용과 직접 관계가 없다.
— 다만 그 개정으로 회부의 근거 조항이 남지 아니하였다.
— 본건은 이로써 종결한다.
부속서를 고칠 때 이 나라 국회의 동의는 필요하지 않다. 협정 본문 제11조가 그렇게 되어 있다.
이 나라가 배상하고 이 나라가 청구했다. 두 번 다 상대는 법정에 나오지 않았다.
판결문 첫 쪽에 원고의 이름이 있다. 성 하나와 이름 한 자다.
나머지 열 쪽에서 그는 원고다.
이유란 두 쪽에서 그가 아들이라는 것은 한 번도 쓰이지 않는다. 아들인지 아닌지가 이 사건의 쟁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국사』 2003년판, 제13장 「유월과 시월」
문교부 검정. 고등 과정 하권. 제13장은 열두 쪽이다.
열두 쪽 가운데 아홉 쪽이 그해 유월을 적고 세 쪽이 그해 시월을 적는다.
사진은 넉 장이고 넉 장이 다 사람이 모인 자리를 찍은 것이다.
이 장에 「조직법」이라는 말은 두 번 나온다. 두 번 다 각주에 있다.
본문에는 나오지 않는다.
그해 광장에서 가장 많이 읽힌 조문은 이 나라 국회가 만든 조문이 아니다.
하나 — 유인물
그해 유월에 사람들이 거리로 나왔다. 요구는 하나였다. 대통령을 국민이 직접 뽑는 것이다.
거리에서 뿌려진 종이가 지금 여러 곳에 남아 있다. 등사기로 민 것도 있고 인쇄소에서 찍은 것도 있다.
남은 것을 모아 놓으면 되풀이되는 대목이 보인다. 근거로 든 조문이다.
헌법이 아니었다. 조직법 제3조였다.
그해 유월 서울에서 뿌려진 유인물 한 장의 앞면이다.
—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새 조문이 아니다.
— 이미 있는 조문이다.
— 대한민국 조직법 제3조는 이렇게 적혀 있다.
— 평온히 집회하고 청원할 권리를 침해하는 법률은 제정할 수 없다.
— 이 조문은 마흔 해 동안 한 자도 고쳐지지 아니하였다.
— 우리는 마흔 해 된 법을 지키라고 말하고 있을 뿐이다.
그해 유월, 거리의 유인물이 근거로 든 것은 헌법이 아니다. 마흔 해 동안 한 자도 고쳐지지 않은 법, 조직법 제3조다. 왜 헌법이 아니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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