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르닐로프 제7부 단독(單獨)
30화제54장 신탁(信託)
하나 — 넉 줄
제10장의 절은 여섯이고 쪽수는 이렇게 나뉜다.

| 절 | 표제 | 쪽 |
|---|---|---|
| 제1절 | 광복 | 6 |
| 제2절 | 미군의 진주와 군정의 실시 | 9 |
| 제3절 | 신탁 통치 문제 | 1 |
| 제4절 | 군정 재판과 정치 사건 | 7 |
| 제5절 | 대표 기구의 설치 | 5 |
| 제6절 | 대한민국 조직법의 제정 | 13 |
한 쪽짜리 절이 하나 있고 그것이 제3절이다. 한 쪽 가운데 본문이 넉 줄이고 나머지는 여백이다.
넉 줄 가운데 셋이 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검토하였다는 한 줄만 무엇을 했다는 말이고, 그것도 한 것은 연합국이다.
교과서가 짧게 적는 데에는 두 가지가 있다. 중요하지 않아서 짧게 적는 것과 적을 것이 없어서 짧게 적는 것이다.
이 절은 뒤엣것이다. 적을 것이 없으면 표제만 남는다.
넉 줄 아래에 각주가 하나 붙어 있다. 각주가 본문보다 길다.
— 연합국의 검토안은 여러 나라가 함께 맡는 형태였다.
— 이 형태는 함께 맡을 나라가 갖추어지지 아니하여 성립하지 못하였다.
— 그 뒤 우리 나라의 지위는 한 나라의 결정으로 정하여졌다.
— 상세는 본장 제6절에 있다.
각주의 마지막 줄이 앞의 세 줄을 옮겨 놓는다. 제3절에서 일어나지 않은 일의 결과는 제6절에 적혀 있고, 제6절은 이 장에서 가장 긴 절이다.
둘 — 말의 뜻
신탁은 여럿이 쓰는 말이다.
맡기는 쪽이 있고 맡는 쪽이 있다. 맡는 쪽이 여럿이면 서로 본다. 서로 보는 동안 맡긴 쪽에게 남는 것이 있다. 어느 쪽에 말을 걸 것인가를 고르는 자리다.
고를 자리가 있으면 그 자리에서 값을 매길 수 있다. 값을 매기는 일은 힘이 있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쪽이 여럿이어서 하는 것이다.
맡는 쪽이 하나면 볼 사람이 없다. 그때 그것은 신탁이라 부르지 않는다.
이 세계에서 함께 맡을 나라가 갖추어지지 않은 데에는 긴 내력이 있다. 그 내력은 이 나라에서 시작하지 않았고 이 나라 사람이 만든 것도 아니다.
만들지 않은 것의 결과를 받는 일에는 이름이 없다. 이름이 없으면 따질 데도 없다.
같은 교과서의 교사용 지도서가 이 절을 어떻게 가르치라고 적었는지가 남아 있다.
— 이 절은 짧다. 짧은 것은 사건이 없었기 때문이다.
— 학생이 왜 없었는가를 물으면 다음과 같이 답한다.
— 신탁은 여러 나라가 함께 맡는 것이다.
— 우리 나라를 맡은 나라는 하나였다.
— 하나가 맡는 것은 신탁이라 하지 아니한다.
— 그 이상은 묻지 않도록 한다.
— 본 절의 배당 시간은 십 분이다.
하나가 맡으면 그것은 신탁이 아니라 통치다.
셋 — 청원
그러므로 이 나라에는 반탁이 없고 찬탁도 없다.
반대하려면 반대할 문서가 있어야 한다. 문서가 없으면 반대는 형태를 갖지 못하고, 형태를 갖지 못한 반대는 기록에 남지 않는다.
이것을 두고 그해 겨울이 조용했다고 적으면 틀린다. 조용하지 않았다.
좌와 우는 그해 겨울에도 있었다. 사람도 있었고 단체도 있었고 신문도 있었다. 없어진 것은 다툼이 아니라 다툼의 상대다.
그해 정월 군정청 접수철에 진정서 두 장이 이레 사이로 들어왔다. 하나는 좌익 단체의 것이고 하나는 우익 단체의 것이다.
첫 문장을 나란히 놓으면 이렇다.
— 본 단체는 군정 당국의 공정한 처분을 앙망한다.
— 본 단체는 군정 당국의 현명한 판단을 앙망한다.
마지막 문장을 나란히 놓으면 이렇다.
— 상대 단체의 행위를 조사하여 주기 바란다.
— 상대 단체의 행위를 조사하여 주기 바란다.
두 장의 마지막 문장이 같다.
가운데 문장은 다르다. 한 장은 상대가 무엇을 했는지를 적었고 다른 장은 상대가 무엇을 하려 하는지를 적었다.
가운데가 다르고 끝이 같은 문서는 한 종류다. 청원서다.
서로를 조사해 달라고 같은 곳에 청한다. 청하는 두 쪽은 서로 미워하지만 같은 자리에 선다.
같은 편이 되는 것이 아니라 같은 자리에 서는 것이다. 그 자리의 이름은 청원이다.
청원은 협상이 아니다. 협상에는 두 쪽이 있고 청원에는 한 쪽과 한 곳이 있다. 협상에서는 서로 줄 것을 세고 청원에서는 줄 것을 세지 않는다.
무엇을 줄 수 있는지 세지 않게 되면, 무엇을 받을 수 있는지도 세지 않게 된다.
이것이 갈라지지 않아서 치른 것 가운데 첫 항목이다. 나라가 하나로 있는 동안 그 하나가 상대할 곳도 하나가 되었다.
다투는 두 쪽이 서로 다른 곳을 뒤에 두면 각자가 그 곳과 값을 흥정하게 된다. 흥정은 보기 좋은 일이 아니다. 다만 흥정하는 자리에서는 값이 매겨진다.
다투는 두 쪽이 같은 데에 물으면 그 데가 답이 된다.
교과서 제3절의 넉 줄 다음에는 절 표제가 하나 더 있다. 제4절이고 표제는 「군정 재판과 정치 사건」이다. 일곱 쪽이다.
넉 줄짜리 절 다음이 일곱 쪽인 것을 두고 편찬자들은 아무 말도 적지 않았다.
두 절 사이에는 줄이 하나 그어져 있다. 다른 절 사이에는 그 줄이 없다.

재조선 미육군사령부 군정청 군정재판 기록철, 1946년 2월~6월
편철 다섯 권. 한 권이 한 달치다.
표지에 인쇄된 것이 「Military Occupation Court」이고 그 아래에 찍힌 것이 「군정재판」이다.
사건마다 석 장이다. 공소장 한 장, 공판 요지 한 장, 판결 한 장.
공판 요지의 진술란은 영문이다. 조선말로 한 진술이 영문으로 적힌다.
판결란 아래에 통역인의 이름 칸이 있다. 판사 이름 옆이 아니라 아래다.
한 사건에 종이가 석 장이다.
하나 — 죄명
이 편철에 들어오는 사건의 죄명은 대개 하나다. 포고 제2호다.
조문은 한 문장이다.
— 점령군에 대한 반항 행위, 공중치안과 질서를 교란하는 행위, 점령군의 인명과 재산에 해를 가하는 행위를 하는 자는
— 점령군 군율회의에서 유죄로 결정한 뒤 그 회의가 정하는 형에 처한다.
세 가지가 나열되어 있고 뒤엣것만 좁다. 앞의 둘은 넓다.
반항은 무엇이든 될 수 있다. 교란은 그보다 넓다. 질서라는 말은 무엇이 질서인가를 정하는 쪽이 뜻을 정한다.
넓게 적은 것을 게으르다고 하면 틀린다. 넓게 적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점령이 시작되는 자리에서는 무엇이 일어날지 모른다. 모르면 넓게 적어 두고 좁게 쓰겠다고 마음먹는다.
좁게 쓰겠다는 마음은 조문에 적히지 않는다. 적히지 않은 것은 바뀌어도 표가 나지 않는다.
넓게 적은 조문을 좁게 쓰는 일은 쓰는 사람에게 달렸다.
이 편철이 다섯 권으로 끝나는 것은 사건이 적어서가 아니다. 한 달에 한 권씩 묶었기 때문이다.
묶는 곳이 한 군데인 것이 이 편철의 성격을 정한다. 이 나라에서 정치 사건을 다루는 법정은 이 계통 하나다.
북에서 온 사건과 남에서 온 사건이 같은 서식에 적히고 같은 편철에 들어간다. 서식이 같으면 사건도 같아 보인다.
같아 보이는 것과 같은 것은 다르다. 다만 편철을 뒤에 여는 사람은 편철된 대로 읽는다.
둘 — 닮은 문답
그해 이월부터 유월까지 이 편철에 쌓인 것은 대개 정치 사건이다.
집회를 열었고 유인물을 돌렸고 벽에 붙였다. 그 일을 한 단체는 좌쪽에도 있고 우쪽에도 있다.
죄명은 같다. 법정도 같고 판사도 같고 검찰관도 같은 사람인 때가 있다.
이월의 한 사건에서 검찰관이 물었다.
— 그날 그 자리에 몇 사람을 모았는가.
— 세지 않았다.
— 허가를 받았는가.
— 받을 데를 몰랐다.
— 포고 제2호를 아는가.
— 안다.
— 무엇이라 적혀 있는가.
— 반항하지 말라고 적혀 있다.
— 그날 반항하였는가.
— 우리끼리 이야기하였다.
사월의 다른 사건에서 같은 검찰관이 같은 것을 물었다. 피고의 소속은 앞의 사건과 반대쪽이다.
— 그날 그 자리에 몇 사람을 모았는가.
— 세지 않았다.
— 허가를 받았는가.
— 받을 데를 몰랐다.
두 사람의 답이 같다.
이 두 사람은 서로를 미워한다. 미워하는 정도는 이 편철 안의 어떤 문장으로도 알 수 없다. 공판 요지에는 그 항목이 없기 때문이다.
공판 요지가 적는 것은 셋이다. 무엇을 하였는가. 허가를 받았는가. 포고를 알았는가.
무엇을 주장하였는가는 서식에 없다. 서식에 없는 것은 물어도 적히지 않고, 적히지 않으면 물을 이유가 사라진다.
그래서 이 다섯 권에는 그해 조선 사람들이 무엇을 두고 갈라졌는지가 남지 않았다.
남은 것은 그들이 무엇으로 처벌받았는가다. 그것은 전부 같다.
이월의 그 사건에서 판사가 마지막에 한 가지를 더 물었다. 공판 요지의 여백에 손글씨로 적혀 있다.
— 그대는 무엇을 하려고 그 자리에 모였는가.
— 나라를 어떻게 세울 것인가를 의논하였다.
— 그것은 이 법정에서 다룰 일이 아니다.
— 그러면 어디에서 다루는가.
— 답이 적히지 않았다.
적히지 않은 것이 판사가 답하지 않아서인지 통역인이 옮기지 않아서인지 서기가 받아 적지 않아서인지는 이 종이로 알 수 없다.
세 가운데 어느 쪽이어도 결과는 하나다. 물음은 남았고 답할 자리는 그해에 없었다.
셋 — 두 번
법정의 자리는 셋이다.
판사석에 미국인이 앉는다. 통역석에 조선 사람이 앉는다. 피고석에 조선 사람이 앉는다.
판결은 영문으로 낭독된다. 낭독이 끝나면 통역인이 옮긴다.
피고는 판결을 두 번 듣는다. 처음에 형이 정해지고 두 번째에 뜻이 온다.
정해진 뒤에 오는 뜻은 뜻이 아니다. 통보다.
판결문 국문 낭독은 「본관은」으로 시작한다. 그 두 글자는 그해 구월에 붙은 포고에서 왔고 포고의 그 두 글자는 그 앞의 법령집에서 왔다.
법정에서 그 말을 소리 내는 사람은 통역인이다. 「본관」은 통역인이 아니다.
「나라를 어떻게 세울 것인가를 의논하였다.」 「그것은 이 법정에서 다룰 일이 아니다.」 「그러면 어디에서 다루는가.」 답이 적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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