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적 없는 나라 제9부 잔고(殘高)
38화제68장 조건(條件)
하나 — 조정기
교과서 제14장의 둘째 쪽은 이렇게 되어 있다.

— 사회주의 시장이 없어진 것은 우리의 잘못이 아니다.
— 그러나 그것을 미리 헤아리지 못한 것은 우리의 부족이다.
— 당과 내각은 조정기를 선포하였다.
— 조정기에는 자체의 힘으로 먹는다.
— 자체의 힘이란 우리 땅과 우리 손이다.
— 조정기는 길지 아니할 것이다.
교과서가 이 시기에 붙인 이름은 재난이 아니라 기간이다.
둘 — 조문 밖
호놀룰루에는 세 갈래로 보고가 왔다. 그해 유월 회의록에 그 문답이 있다.
— 본토에서 배급이 끊겼다는 보고가 있다.
— 어디서 온 보고인가.
— 셋이다. 도쿄 상사, 홍콩 지사, 국제 구호기구 회보.
— 셋이 같은 말을 하는가.
— 방향은 같고 수가 다르다.
— 수를 우리가 낼 수 있는가.
— 낼 수 없다. 우리는 본토에 사람을 두지 못한다.
— 그러면 무엇을 적는가.
— 적을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세지 못했다는 것뿐이다.
이 정부는 본토에서 일어나는 일을 마흔다섯 해 동안 남의 보고로만 알았다.
그 회의에서 구호를 보내자는 안이 한 번 올라왔다. 보내려면 받는 쪽과 문서를 주고받아야 한다.
문서를 주고받으면 상대를 정부로 다룬 기록이 남는다. 그렇게 하지 않기로 한 판단을 문서로 남긴 사람은 그 전해에 죽었다.
그가 죽은 뒤에도 판단은 문서철에 남아 있다. 사람은 죽고 문서철은 죽지 않는다.
안은 표결에 부쳐지지 않았다. 부의하려면 제안자가 있어야 하는데, 그 자리에서 이름을 걸겠다는 사람이 없었다.
같은 회의에서 송금이 나왔다.
— 본토로 돈을 보내겠다는 국민이 있다.
— 보낼 수 있는가.
— 우리 국민증으로는 못 보낸다. 받는 쪽 은행이 우리를 모른다.
— 다른 나라 여권을 가진 사람은 어떠한가.
— 보낸다.
— 그러면 우리 국민증을 가진 사람만 못 보내는 것인가.
— 그렇다.
— 그것을 회의록에 적는가.
— 적는다. 적어도 고칠 조문이 없다.
형에게 돈을 보내는 데에 이 나라의 국민증이 가장 쓸모없는 서류였다.
그해에 국민증을 반납하겠다는 신청이 늘었다. 반납은 여전히 접수되지 않는다. 해당 절차 없음이라고 인쇄된 회신 서식이 열다섯 해째 나간다.
같은 날 제8조가 나왔다.
— 통치가 흔들리면 제8조의 조건이 가까워지는가.
— 조문은 회복이라고 적었다. 흔들리는 것은 회복이 아니다.
— 그러면 우리가 기다리는 것은 저쪽이 무너지는 것인가.
— 조문에 그렇게 적혀 있지 아니하다.
— 조문 밖에서는 어떠한가.
— 조문 밖에서 무엇을 기다리는지는 회의록에 적지 않는다.
— 적지 않으면 없는 것인가.
— 이 정부에서는 그렇다.
적지 않은 것을 없는 것으로 다루는 법을 이 나라는 마흔세 해 동안 배웠다.
제14장은 열한 쪽이다. 여덟 쪽이 대외 무역 조건이고 두 쪽이 자체의 힘이다.
나머지 한 쪽은 지도다. 항구 넷에 점이 찍혀 있고 그 밖에는 아무 표시도 없다.
인민이라는 낱말은 스물세 번 나오고, 먹는다는 낱말은 한 번 나온다.
「자체의 힘으로 먹는다」는 구절이다. 그 구절은 스무 해 뒤에 다른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그 이름은 개방이다.
「등록 국민 세대별 구성」
대한민국 망명정부 내무부 등록과 편(編). 단기 4329년(1996) 12월 31일 현재.
『등록 통계 연보』 제41집 스물세째 쪽. 호놀룰루 간행. 배포는 각 부와 국회 사무처에 한한다.
— 세대는 등록 서식 제3란과 아버지의 국민증 번호로 갈랐다.
— 아버지의 국민증 번호가 등록부에 연결되지 아니한 자는 미상으로 한다.
이 표는 등록한 국민만을 센다. 등록하지 아니한 자는 이 표의 대상이 아니다.
이 표에 오르지 못한 사람이 이 표에 오른 사람보다 많다.
하나 — 네 칸
이 표를 만들라고 한 것은 등록과가 아니다. 그해 가을 국회 사무처가 요구했다. 요구서에 적힌 사유는 의석 정수의 재산정이다.
의석은 등록 국민의 수로 정한다. 등록 국민의 수에는 죽은 사람이 있다. 죽은 사람이 어느 칸에 몰려 있는지를 보려면 세대로 갈라야 한다는 것이 요구서의 논리다.
등록과는 그 논리대로 갈랐다. 갈라 놓고 보니 죽은 사람이 몰린 칸보다 태어나지 않은 칸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표는 넉 줄이다.
| 세대 | 1996년 12월 31일 |
|---|---|
| 일세 | 118,000 |
| 이세 | 233,000 |
| 삼세 | 48,000 |
| 미상 | 171,000 |
넷을 더하면 오십칠만이다. 그해 등록부에 있던 수와 같다.

일세는 1935년 이전에 한반도에서 태어난 사람이다. 1950년 여름에 배를 탔거나 그 전부터 밖에 있던 사람이다. 그해 살아 있었다면 예순한 살이 넘는다.
십일만 팔천은 예순한 살 넘은 사람의 수가 아니다. 이 표는 살아 있는 사람의 표가 아니라 등록부의 표다.
등록부에서 이름이 빠지는 사유는 둘뿐이다. 오 년 부담금 미납과 사망 신고다. 미납은 창구가 스스로 세고, 사망은 누가 와서 말해야 센다.
말하러 오는 사람이 없으면 그 이름은 그대로 있다.
미상 칸은 아버지 쪽 번호가 등록부에 이어지지 않는 사람이다. 대개 1953년 제1차 등록 때 본인 신청으로 오른 사람과 그 계통이다. 그때 창구는 아버지의 번호를 묻지 않았다. 물어도 댈 수 있는 사람이 적었다.
이 표에서 삼세 칸만 아버지의 칸이다.
삼세로 세려면 아버지가 등록 국민이어야 한다. 어머니 쪽은 세지 않는다. 마흔네 해 전에 쓰인 열여섯 글자가 그렇게 되어 있다.
이세 이십삼만 삼천 가운데 절반쯤이 남자다. 그 절반이 낳은 아이만 삼세 칸에 온다. 나머지 절반이 낳은 아이는 아버지 쪽을 따라간다.
아버지가 일본인이면 그 아이는 1985년부터 일본 국적을 얻는다. 그해부터 일본이 어머니 쪽도 보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어느 명부에도 없는 사람이면 그 아이는 어느 쪽으로도 가지 않는다.
이세 가운데 이 사회 밖에서 배우자를 얻는 사람의 비율은 1960년대에 열에 셋이었고 1990년대에 열에 여덟이다. 그 비율은 등록과가 잰 것이 아니라 일본 쪽 인구동태 통계에서 옮겨 온 것이다. 옮겨 온 수라는 것을 표 아래 잔글씨로 적어 두었다.
열에 여덟이 밖에서 배우자를 얻고, 그 여덟 가운데 절반이 여자다. 여자 쪽에서 난 아이는 이 표에 오지 않는다.
같은 해에 한쪽은 보는 눈을 하나 늘렸고 다른 쪽은 그대로 두었다.
둘 — 나눗셈
연보를 짜는 자리에 두 사람이 앉는다. 등록과 서기 하나와 통계 담당 하나다.
교정을 보던 날의 문답이 그 뒤에 남았다. 남은 자리는 회의록이 아니라 교정쇄 여백이다.
— 이 칸 옆에 저 수를 같이 실으면 어떤가.
— 어느 수인가.
— 감사원의 이십사만 육천이다.
— 그 수는 1987년까지의 추정이다. 이 칸은 1996년의 실수다.
— 나란히 놓기만 하는 것이다.
— 나란히 놓으면 나눈다.
— 나누면 무엇이 되는가.
— 오점일이 된다.
— 그 수가 틀렸는가.
— 틀렸다. 이십사만 육천에는 이세도 들어 있다.
— 그러면 무엇으로 고치는가.
— 고칠 수 없다. 세대로 나눈 추정이 없다.
— 그러면 나란히 놓지 않는다.
— 놓지 않는다.
인쇄된 쪽에는 넉 줄짜리 표만 있다. 감사원의 수는 실리지 않았다.
다만 등록과에 남은 교정쇄 한 부의 여백에 연필 자국이 있다. 두 수와 그 사이의 나눗셈이다.
그 교정쇄를 이듬해 봄에 국회 사무처가 자료로 받아 갔다. 인쇄본이 아니라 교정쇄를 받아 간 사유는 적혀 있지 않다.
— 이 수는 어디서 나온 것인가.
— 여백에 적혀 있다.
— 누가 적었는가.
— 모른다.
— 인쇄된 쪽에는 없는가.
— 없다.
— 없는데 왜 옮겨 적었는가.
— 물어보러 온 사람이 그 수를 먼저 말했다.
연필로 적은 수가 인쇄된 수보다 멀리 갔다.
셋 — 물어보러 온 사람
1997년 3월에 국회에서 그 수가 한 번 읽혔다. 읽은 사람은 등록 국민 수로 뽑힌 의원이고, 답한 사람은 내무부 등록과장이다.
속기는 두 쪽이다.
— 국민 하나에 국민이 되지 못한 아이가 다섯이라는 수가 있다.
— 그 수는 인쇄본에 없다.
— 인쇄본에 없으면 없는 수인가.
— 그 수는 두 해의 수를 나눈 것이다. 나누어서는 안 되는 두 수다.
— 그러면 인쇄본에 있는 수로 묻겠다. 삼세 칸이 얼마인가.
— 사만 팔천이다.
— 이 칸은 다음 집에서 어떻게 되는가.
— 같은 방법으로 세면 줄어든다.
— 세는 방법을 바꿀 수 있는가.
— 그것은 이 부의 일이 아니다.
— 어느 부의 일인가.
— 부가 아니다. 국회다.
— 국회에 넘기려면 무엇이 있어야 하는가.
— 개정안이 있어야 하고 표가 있어야 한다.
— 표는 몇인가.
— 재적의 삼분의 이다.
그날 그 자리에서 아무도 그 말을 받지 않았다.
연보 제41집은 백일곱 쪽이다. 스물네째 쪽이 비어 있다.
비워 둔 것이 아니라 표 하나가 인쇄에 대지 못해 다음 집으로 넘어갔다. 그 표의 이름은 「등록 국민 사망 신고 현황」이다.
그 표는 다음 집에도 실리지 않았다. 신고 건수를 세는 서식이 그때까지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빈 쪽에는 쪽 번호만 찍혀 있다. 스물넷이라는 두 글자다.
「국민 하나에 국민이 되지 못한 아이가 다섯.」 연필로 적은 수가 인쇄된 수보다 멀리 갔고, 그날 국회에서 아무도 그 말을 받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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