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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제6장 셈이 맞지 않는다

· 44화 중 5화 · 3,680자 · 약 5분 · 무료

글자3 / 5

건물 뒤로 돌아갔다.

거기 가마니가 있었다. 몇 장인지는 세지 않아도 보였다. 가마니 밖으로 나온 것은 발이었고 그중 하나에는 짚이 감겨 있었다.

열두 개의 태양 5화 제6장 셈이 맞지 않는다 — 헤더컷

담 밑에 사람이 하나 앉아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국군 준위 계급장. 마흔은 넘어 보였고 얼굴이 검었다. 담배를 왼손으로 잡고 오른손 손가락으로 허공에 무엇을 짚고 있었다.

"윤성갑입니다." 그가 일어나지 않고 말했다. "육본 정보처에서 나왔습네다. 중위님이 지난달에 중국말 하는 사람 붙여달라고 종이 한 장 올리셨디요."

"어떻게 아십니까."

"그 종이가 내 책상을 지나갔으니까." 그가 담배를 물었다. "내레 옌지서 났습네다. 중국말 하고 아라사말도 좀 합네다. 만주국 때 순사보 밑에서 말 옮기던 사람이고요. 그런 이력을 요새는 잘 안 물어봅디다."

그는 웃지 않고 그 말을 했다.

"여기는 왜 오셨습니까."

"세러 왔디요."

그가 턱으로 가마니 쪽을 가리켰다.

"중위님, 아까 마당에서 사백삼십구가 비었디요." 그가 말했다. "그 사백삼십구 중에 몇은 여기 있고 몇은 오다가 길에서 없어졌고, 그런데 몇은 애초에 없던 사람입네다."

"없던 사람이라니요."

"장부에 이름부터 먼저 적은 겁네다. 없는 사람 이름으로 쌀이 나오고 피복이 나오니까. 그 쌀이 어디로 가는지는 중위님도 아시겠지."

나는 장부의 글씨를 생각했다. 획이 흐트러진 데가 없던 글씨.

"그러니까 장부가 틀린 게 아니라 장부가 맞습네다." 윤성갑이 담뱃재를 털었다. "사람이 없어진 게 아니라 처음부터 안 왔으니까. 그런데 여기 이건 또 온 사람들이거든. 셈이 두 개가 섞여서 하나가 됐습네다. 이제 아무도 못 풉네다."

"그럼 전체로는 몇입니까."

"전체." 그가 나를 한 번 보았다. "중위님, 어제 청도 쪽 교육대에서는 여기 오는 길에 죽은 사람이 오십 명이라고 합디다. 그 옆 교육대에서는 삼백이라고 하고. 대구 어느 국장은 나라 전체로 수천이라고 하고, 시장통 사람들은 만이라고 하고, 만이면 적다는 사람도 있습네다."

"어느 것이 맞습니까."

"다 맞습네다. 다 어디선가 나온 숫자니까." 그가 담배를 눌러 껐다. "세는 사람이 없으면 숫자가 소문이 됩네다. 소문은 안 줄어요. 늘기만 하디."

그는 일어서서 바지의 흙을 털었다. "중위님, 이 나라 사람 중에 이걸 마지막까지 세려고 앉아 있는 사람이 하나라도 있으면, 내레 그 사람 밑에서 일하고 싶습네다. 아직 못 봤습네다마는."


지프는 세 시가 넘어서 출발했다.

감찰 소령이 무릎에 수첩을 펴고 문장을 만들었다. 만들면서 소리 내어 읽고 나에게 확인을 시켰다.

"'교육대 행정에 중대한 미비가 있음.' 미비. 한국말로 뭐라고 하오."

"미비, 라고 씁니다."

"그 말에 사람이 죽었다는 뜻이 들어가오?"

"안 들어갑니다."

그가 잠시 연필을 멈췄다가 그대로 썼다. 나는 그가 다른 낱말을 고를 것이라고 잠깐 생각했다. 그는 고르지 않았다. 그것이 그가 쓸 수 있는 서식의 낱말이었다.

지프 뒷자리에 윤성갑이 타고 있었다. 그는 대구까지 같이 간다고 했다.

한참 가다가 내가 물었다. "아까 몇까지 세셨습니까."

"백열둘."

"그다음은요."

윤성갑은 차창 밖으로 얼굴을 돌렸다. 길가에 흙을 덮어놓은 자리가 몇 군데 지나갔다.

"안 셌습네다."


1951년 3월 15일 ~ 18일 · 서울, 중앙청 앞과 종로

전차는 종로 한복판에 서 있었고 유리가 하나도 없어서 안이 다 보였다.

손잡이 가죽은 타서 없어지고 쇠고리만 천장에 매달려 있었다. 바퀴 밑에는 눈이 아직 녹지 않은 자리가 있었다. 전차가 거기 선 것이 언제인지 나는 모른다. 작년 유월일 수도 있고 지난 정월일 수도 있다.

길에 사람이 없는 것이 아니라, 있는데 움직이지 않았다. 담 밑에 앉아 있거나 무너진 처마 아래 서 있었다. 대개 노인이었다. 사령부에서는 남아 있는 사람이 이만 명쯤이라고 했는데, 이만이라는 숫자는 백만 명이 살던 도시에서는 없는 것과 비슷하다.

여기가 아홉 달 동안 주인이 세 번 바뀐 자리다. 유월에 한 번, 구월에 한 번, 정월에 한 번. 그리고 이번이 네 번째인데, 사람들은 그것을 세 번째라고 부르기도 하고 네 번째라고 부르기도 한다. 세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한강은 이번에도 부교로 건넜다. 얼음은 이미 삭아서 가장자리가 물러 있었고, 하류 쪽은 보지 않았다.

이번에는 아무도 싸우지 않고 들어왔다. 적은 밤사이에 빠져나갔고 우리 쪽은 조심하면서 들어왔다. 총소리 대신 들린 것은 공병의 지뢰 탐지기가 내는 소리였다. 그것은 벌 소리와 비슷하다.

전선은 이미 시가지 북쪽으로 올라가 있었다. 사령부에서는 삼월 내내 선 하나를 정해놓고 거기까지만 올라가는 작전을 하고 있었다. 지도 위에 미국 주(州) 이름을 붙인 선이었다. 하루에 몇 킬로미터를 갈지가 미리 정해져 있는 전쟁이었다.

정부는 부산에 있었다. 중앙청은 비어 있었고 창문은 하나도 성한 것이 없었다. 돌계단에 총탄 자국이 촘촘했는데, 그 자국들이 서로 다른 방향에서 온 것이라는 게 눈에 보였다.

종로 삼가 쪽 골목에서 여자 둘이 벽돌 무더기를 헤치고 있었다. 무엇을 찾느냐고 물었더니 하나가 대답 없이 손을 흔들었다. 다른 하나가 말했다. "장독이요. 밑에 있을 거요."


미군 사진반은 중앙청 앞으로 갔다.

세 사람이었다. 사진병 둘과 하사 하나. 하사가 따블백에서 태극기를 꺼냈다. 접힌 자국이 반듯한 새것이었다.

"이걸 저 기둥에 매달 겁니다." 하사가 나에게 말했다. "그런데 시민이 있어야 그림이 됩니다. 사람 좀 데려와 주시겠습니까."

나는 계단 아래에 앉아 있는 노인 셋 중 하나에게 갔다.

"어르신, 저기 잠깐 앉아 계시면 되겠습니까. 사진을 찍는답니다."

노인이 나를 올려다보았다. 솜저고리 어깨가 터져 솜이 나와 있었다.

"찍어서 어디다 쓰오."

열두 개의 태양 5화 제6장 셈이 맞지 않는다 — 전환컷

"신문에 나갈 겁니다."

"어느 신문."

"미국 신문일 겁니다."

노인은 그 대답을 한참 씹더니 일어섰다. 일어서는 데 시간이 걸렸다.

사진병이 위치를 잡았다. 계단 세 번째 단, 깃발이 화면 왼쪽에 오도록. 노인을 앉히고 각도를 두 번 고쳤다.

깃발을 매다는 데 십오 분이 걸렸다. 기둥에 걸 고리가 없어서 하사가 전화선을 잘라 묶었다. 바람이 없어서 기가 늘어졌고, 사진병이 늘어진 것은 안 된다고 해서 병사 하나가 화면 밖에서 줄 끝을 잡고 흔들었다.

"고개를 조금 들라고 해주세요."

"고개 조금 드시랍니다."

"웃으시면 더 좋고요."

"웃으시랍니다."

노인이 나를 봤다. 그 눈은 화가 난 눈이 아니었다.

"웃을 일이 아닌데."

사진병이 렌즈에서 눈을 떼고 나를 봤다. "뭐랍니까?"

"알았답니다."

셔터가 네 번 눌렸다. 하사가 필름통을 갈면서 잘 나왔다고 했다.


계단 옆에 여자가 하나 서 있었다. 외투 위에 완장을 찼는데 새 완장이었다.

그녀가 나에게 다가왔다.

"통역 장교님."

"예."

"지금 옮기신 게 그 사람 말입니까, 저 사람 말입니까."

나는 그 문장의 뜻을 이해하는 데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해하는 데는 걸리지 않았고 대답하는 데 걸렸다.

"...노인 말씀은 사진과 상관이 없었읍니다."

"그러니까요."

"저쪽은 그 말을 알아들을 이유가 없읍니다. 통역은 필요한 것만 옮깁니다."

"필요한 걸 누가 정합니까."

나는 왼손으로 오른손 손목을 쥐었다. 그 버릇을 그녀가 봤는지는 모르겠다.

"사진반이 정합니다."

"그럼 오늘 저 어른은 사진반의 말을 한 겁니다." 그녀가 말했다. "저 어른 입에서 나온 소리는 있는데, 저 어른 말은 없읍니다."

"저는 붙여주는 사람입니다." 나는 말했다. "양쪽 사이에 서서 붙여주는 겁니다. 제가 무엇을 정하면 그때부터 통역이 아닙니다."

"저도 그렇게 배웠읍니다." 그녀가 처음으로 나를 똑바로 보았다. "칠 개월 했읍니다. 그런데 지난달에 제가 옮길 수 없는 낱말을 하나 만났읍니다. 옮길 수 없다고 종이에 적었더니 그 줄을 지워버립디다. 지워지는 걸 보고 나서 알았어요. 저는 붙여주는 사람이 아니라 한쪽 편에 앉아 있는 사람이었읍니다."

"어느 쪽 편입니까."

"종이를 주는 쪽이지요."

그녀가 완장 끈을 한 번 당겨 고쳤다.

"오정민입니다. 공보원에 있읍니다." 그녀가 완장을 조금 들어 보였다. "이건 아직 소속이 없읍니다. 등록만 해놨읍니다."

"어느 신문에 쓰십니까."

"실어주는 데가 있으면요."

그녀는 노인 쪽을 보고 있었다. 노인은 이미 계단에서 내려와 원래 앉아 있던 담 밑으로 돌아가 있었다.

"저는 오늘 저 어른 이야기를 쓸 겁니다." 그녀가 말했다. "웃을 일이 아닌데, 라고 하셨지요. 저는 그걸 씁니다."

"그건 기사가 안 될 겁니다."

"안 되겠지요." 그녀가 수첩을 닫았다. "그래도 옮겨진 것보다는 남은 게 많읍니다."

그러고는 갔다. 나를 나무라는 말투가 아니었다는 것이 더 오래 남았다.


십칠 일 저녁에 나는 혼자 혜화동 쪽으로 걸어 올라갔다.

마흔여섯 해 유월부터 마흔일곱 해 봄까지 그 골목 안 집에서 하숙을 했다. 주인 노파가 아침마다 된장국을 끓였고 나는 그 집 마루에서 영어 문법책을 폈다. 신의주에서 내려온 지 반년밖에 안 됐을 때였다.

골목은 있었다. 집은 없었다.

담이 무릎 높이로 남아 있고 그 안쪽은 평평했다. 기와가 깨져 흙에 섞여 있었다. 어디가 마당이고 어디가 방이었는지 구별이 안 됐다.

대문 있던 자리에 문지방 돌이 하나 그대로 있었다. 그것만 제자리에 있었다. 나는 그 돌 위에 올라서봤다. 발바닥에 돌의 폭이 느껴졌고, 그 폭은 그때와 같았다.

그 마루에서 나는 편지를 두 통 썼다. 마흔여섯 해 가을에 한 통, 겨울에 한 통. 정주로 부쳤고 답은 오지 않았다. 그다음 해 봄에 삼팔선이 굳었고, 그 뒤로는 부칠 데가 없어서 쓰지 않았다.

주인 노파가 그때 물었다. 학생은 집에 안 가나. 나는 곧 간다고 했다. 곧, 이라는 낱말을 쓸 때 나는 그것이 몇 달을 뜻한다고 생각했다.

해가 넘어가면서 시가지 위로 연기가 낮게 깔렸다. 어디선가 나무 타는 냄새가 났다. 사람이 있다는 뜻이다.

그 사람 말입니다, 하고 나는 소리 내어 말해봤다.

그다음이 나오지 않았다.

그다음이 나오지 않았다.

남은 39화 · 약 140,103자 · 약 3시간 2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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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 개의 태양전 44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