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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화제38장 검역선

· 44화 중 28화 · 3,364자 · 약 5분 · 무료

글자3 / 5

셋째 날 아침에 다시 그 길로 갔다.

트럭 옆에 아이 하나가 앉아 있었다. 여자아이였고 머리를 갓 깎여서 두피가 파랬다. 어른 셔츠를 입고 있었고 소매를 두 번 접었는데도 손이 나오지 않았다. 옆에는 아무도 없었다.

열두 개의 태양 28화 제38장 검역선 — 헤더컷

오정민은 옆에 앉았다.

"어디서 왔니."

"개천이요."

"혼자 왔니?"

"할머니하고 왔는데요. 저기 저쪽에 계셔요." 아이가 천막 쪽을 가리켰다. 천막 쪽에는 사람이 여럿 서 있었고 누가 그 할머니인지 알 수 없었다.

"머리 깎을 때 아팠니."

"안 아팠어요. 근데 추워요."

오정민은 수첩을 폈다. 연필 끝을 종이에 대고, 물었다.

"이름이 뭐니."

아이는 잠깐 생각했다. 아이들은 이름을 물으면 성부터 댈지 이름부터 댈지를 잠깐 정한다.

"허금선이요."

"몇 살이니."

"열 살이요."

"금선아, 여기 앉아 있으면 할머니가 오실 거다."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고 무릎을 끌어안았다. 오정민은 일어나서 트럭 쪽으로 갔다가, 다시 돌아와 아이의 셔츠 소매를 한 번 더 접어주었다.

수첩에는 그날 여섯 개의 이름이 적혔다. 그중 하나가 허금선, 열 살, 평안남도 개천이었다.


1951년 7월 9일 ~ 말 · 부산 제3육군병원

복도 끝 창틀에 라디오가 얹혀 있었다.

미군 의무 연락반이 쓰는 것이었다. 오후 두 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고, 나는 서류 봉투를 옆구리에 끼고 병동 명부를 확인하려고 서 있었다. 라디오에서는 음악이 나오다가 끊겼고, 사람 목소리가 나왔다.

도쿄에서 온 소식이었다.

대통령이 극동군총사령관을 해임했다는 것이었다. 후임으로 리지웨이 중장이 유엔군사령관을 승계한다고 했다. 뒤에 몇 문장이 더 있었는데 창밖에서 트럭이 지나가는 바람에 들리지 않았다.

복도에 있던 미군 하사관 셋이 서로를 보았다. 한 명이 짧게 뭐라고 했고 한 명이 웃었고 한 명은 웃지 않았다.

"이제 와서?"

"삼월에 했어야 할 일이지. 그 정전 성명 냈을 때."

"그것 때문이 아니야. 그 영감이 스물두 개를 더 달라고 했다더군. 그리고 코발트인가 뭔가."

"그건 어디서 들었어."

"들었어."

셋은 그러고 나서 담배를 나눠 피우고 흩어졌다. 삼십 초쯤 되는 일이었다. 라디오에서는 다시 음악이 나왔다.

나는 명부를 확인하고 계단을 올라갔다.


박노석은 삼층 끝 병실에 있었다.

여섯 침상 중 다섯이 차 있었다. 그는 창 쪽에서 두 번째였고, 내가 들어가자 몸을 일으키려 했다.

"누워 있어."

"충성."

스물두 살이었다. 함흥에서 내려온 아이였고, 사월에 내 차를 몰기 시작했다. 운전을 험하게 하지 않았고 시동을 걸어놓고 기다리는 버릇이 있었다. 유월에 그는 나를 태우고 북쪽으로 두 번 올라갔다. 두 번 다 문서 수령이었고, 두 번 다 비를 만났다. 두 번째 날은 차 덮개가 새서 앞자리가 다 젖었다.

같은 차에 나도 타고 있었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

"밥은 먹나."

"먹습니다. 그런데 자꾸 게웁니다."

머리맡 수건에 머리카락이 붙어 있었다. 이마 위쪽이 훤했다. 그는 내가 그것을 보는 것을 알고 손으로 수건을 밀어 치웠다.

"머리가 좀 빠집니다. 열이 나서 그런답니다."

말할 때 앞니 사이가 붉었다. 잇몸에서 나는 것이었다. 그는 자꾸 침을 삼켰다.

"고향 소식은 있나."

"없습니다. 흥남서 배 못 탄 사람이 많다고 하니까니." 그는 잠깐 쉬었다가 말했다. "중위님은요."

"나도 없다."

"정주는 여기서 몇 리나 됩니까."

나는 대답을 하려다가 그만두었다. 리로 셀 수 있는 거리이기는 했다.


군의관실은 이층에 있었다.

박노석의 차트를 보여달라고 했더니 소위 하나가 철끈으로 묶은 것을 내주었다. 서류가 두 겹이었다. 앞장은 국군 서식이었고 그 뒤에 미군 의무반이 붙인 종이가 한 장 끼워져 있었다.

미군 종이의 진단란에는 타자로 두 단어가 찍혀 있었다.

radiation sickness

그 밑에 손글씨로 몇 줄이 적혀 있었다. 노출 경위 미상, 선량 추정 불가, 필름 배지 착용 기록 없음. 마지막 줄은 참고용, 확진 아님이었다.

국군 서식의 병명란은 세로쓰기였고 한자와 한글이 섞여 있었다.

原因 未詳 熱病

열두 개의 태양 28화 제38장 검역선 — 전환컷

나는 그 두 장을 나란히 놓고 오래 보았다. 왼쪽 것은 이 사람이 무엇에 맞았는지를 말하고 있었고 오른쪽 것은 이 사람이 무엇을 앓고 있는지를 말하고 있었다. 둘 다 그 병을 부르는 이름은 아니었다. 하나는 원인을 적었고 하나는 원인을 모른다고 적었다.

나는 앞장의 여섯 글자를 소리 내지 않고 읽었다. 그것을 영어로 옮기면 fever of unknown origin이 된다. 뒷장의 두 단어를 한국어로 옮기면 — 옮기면 무엇이 되는가.

방사선. 그 말은 있다. 학교에서 배웠다. 병(病). 그 말도 있다. 그 둘을 붙여놓으면 그것은 말이 아니라 붙여놓은 것이다. 아무도 그렇게 부르지 않는 것을 내가 처음으로 그렇게 부르면, 나는 옮긴 것이 아니라 지어낸 것이 된다.

수첩에 알파벳으로 적었다. 오월에 적어둔 다른 단어 밑에 적었다. 그 밑에 한국어 후보를 이번에는 적지 않았다.


미군 의무 연락장교는 일층 사무실에 있었다. 중위였고 스물예닐곱쯤 되어 보였다. 책상 위에 서식이 세 무더기 쌓여 있었다.

"그 종이는 누가 붙입니까." 내가 물었다.

"제가 붙입니다. 저희 반이 본 환자는 저희 소견을 한 장 넣습니다."

"국군 병명란에는 왜 그 말이 안 들어갑니까."

그는 무더기 하나를 손바닥으로 눌러 가지런히 했다.

"저희 소견은 참고 사항입니다. 병명은 그쪽 군의관이 씁니다."

"그쪽 군의관이 그 말을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한국어 표기가 정해져야지요." 그는 아주 사무적으로 말했다. "제가 위에 한 번 물어봤습니다. 확정된 역어가 없으니 잠정 표기를 쓰지 말라는 답을 받았습니다. 잘못 정해놓으면 나중에 고치기가 더 어렵다고요."

"그러면 그때까지는 뭐라고 씁니까."

"그때까지는 원인 미상으로 씁니다."

그는 서류를 한 장 뽑아 결재란에 이름을 적었다. 글씨가 반듯했다.

"중위님이 통역 쪽이시면, 혹시 아시는 표현 있습니까? 있으면 제가 올려보겠습니다."

"없습니다."

"그렇습니까." 그는 서류를 무더기에 얹었다. "저도 없습니다."


칠월 하순에 부산에 다시 내려갔다.

병실 문 앞에 세숫대야가 나와 있었고 그 옆에 마스크가 한 통 놓여 있었다. 들어가는 사람은 쓰라고 했다. 병실 안에는 침상이 여덟으로 늘어 있었다. 창 쪽 두 자리는 새 얼굴이었다.

박노석은 같은 침상에 있었다. 이번에는 일어나려고 하지 않았다. 팔뚝 안쪽에 멍이 여러 개 있었는데 부딪친 자리가 아니라 그냥 생긴 것이라고 했다. 밤에 열이 오르고 새벽에 내린다고 했다. 물을 많이 마신다고 했다.

"중위님, 차는 누가 몹니까."

"박 상병이 몬다."

"기래도 시동은 미리 걸어놓으라고 하시라요."

나는 그러겠다고 했다. 그는 그 대답을 듣고 눈을 감았다.

병실을 나와서 복도에서 군의관을 만났다. 삼십 대 중반의 대위였다. 안경알에 지문이 묻어 있었다.

"박 하사 말입니다."

"아, 예."

"미군 쪽 소견을 보셨습니까."

"봤습니다."

"어떻게 보십니까."

그는 벽에 기대섰다. 복도 저쪽에서 들것이 지나갔다.

"우리 병동에 지금 그런 환자가 열넷입니다." 그가 말했다. "전부 유월에 북쪽에 올라갔던 사람들이고, 전부 열이 나고, 전부 잇몸에서 피가 나고, 머리가 빠집니다. 발진티푸스도 아니고 재귀열도 아니고 이질도 아닙니다. 나는 그걸 압니다. 아닌 것만 압니다."

"미군 쪽 종이에는 이름이 적혀 있습니다."

"영어로 적혀 있지요."

"예."

"그러니까요." 그는 안경을 벗어 가운 자락으로 닦았다. "중위님은 통역장교라고 하셨지요."

"예."

"그러면 그거 우리 말로 뭐라고 합니까."

복도가 조용했다. 나는 그 물음에 대답할 말을 찾았다. 병명란에 쓸 여섯 자 안쪽의 말이어야 했고, 이 사람이 다음 환자에게 쓸 수 있는 말이어야 했고, 그 환자의 어머니가 들었을 때 뜻이 통하는 말이어야 했다.

"모르겠습니다."

"모르시는군요."

"예."

"그건 무슨 병입니까."

나는 서류 봉투를 고쳐 들었다. 군의관은 나를 잠깐 더 보다가 안경을 도로 쓰고 병동 쪽으로 걸어갔다.


1951년 7월 20일 ~ 8월 하순 · 정주, 집과 뒷산, 그리고 남쪽으로 난 길

이만술의 무덤에 떼를 입힌 것은 죽은 지 여드레 만이었다.

칠월 열이틀에 죽었다. 유월에 열흘 앓다가 일어나서 못줄 앞줄에서 모를 심던 사람이 칠월 초에 다시 누웠고, 이번에는 사흘 만에 말을 못 하게 되었고, 엿새 만에 갔다. 그가 그달의 두 번째였다.

떼를 뜨러 간 사람은 넷이었다. 원래 여섯이 가는 일인데 넷밖에 나오지 못했다. 재옥이 삽을 들었다. 뒷산 자락에 무덤이 늘어서 있었다. 유월에 쓴 셋과 칠월에 쓴 둘. 땅이 얕아서 다섯 개 다 위에 돌을 얹어놓았고, 돌 얹은 자리는 비가 오면 흙이 씻겨 내려 해마다 다시 쌓아야 한다고 했다.

돌아오는 길에 강복순이 재옥의 삽을 받아 들었다.

"너희 오마니는 어떠네."

"누워 계셔요."

"먹기는 하고?"

"미음은 넘기셔요."

강복순은 아무 말도 덧붙이지 않았다. 마흔셋이었고 아들 둘을 재작년과 작년에 잃었고, 그래서 마을에서 남의 집 병자 이야기를 제일 안 하는 사람이었다.

강복순은 아무 말도 덧붙이지 않았다. 마흔셋이었고 아들 둘을 재작년과 작년에 잃었고, 그래서 마을에서 남의 집 병자 이야기를 제일 안 하는 사람이었다.

남은 16화 · 약 59,483자 · 약 8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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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 개의 태양전 44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