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LLUSIONTOON

41화제57장 전역

· 44화 중 41화 · 3,755자 · 약 5분 · 무료

글자3 / 5

하숙방으로 돌아와 책상 서랍을 열었다.

수첩이 두 권 있다. 위의 것은 공용이다. 아래 것은 사 년 동안 아무에게도 보인 적이 없다.

열두 개의 태양 41화 제57장 전역 — 헤더컷

첫 장에 알파벳 여섯 자가 적혀 있었다. 1951년 4월의 글씨다. 그때 나는 그 단어를 옮기지 않았고, 옮기지 않은 것을 그대로 두면 잊을까 봐 소리 나는 대로 베껴 적었다. 지금 보니 e를 쓸 자리에 i를 썼다가 그 위에 덧썼다.

중간은 대개 지명과 날짜다. 몇 장은 숫자만 있다. 무슨 숫자인지 지금은 나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 두 군데 있었다. 그때는 적어두면 잊지 않을 줄 알았다.

1951년 여름의 몇 장은 글씨가 다른 데보다 작다. 그해에는 종이가 귀했다.

마지막 장은 1954년 10월이다. 한국어 단어 하나와, 초로 적힌 숫자 하나. 그 두 줄 사이에 아무 설명도 없다. 설명을 적어두지 않은 것은 그때 그것이 설명이 필요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첫 장으로 한 번 더 돌아갔다가 수첩을 덮었다. 고무줄을 두 번 감아 서랍에 넣고 서랍을 닫았다. 그리고 발전기 설명서의 나머지를 옮겼다.


사흘 뒤에 육본에 다시 갔다. 사무실이 미군 계약을 하려면 신원진술서에 군 경력 확인 도장이 필요했다.

창구 서기가 서류를 뒤지는 동안 나는 생각난 김에 물었다.

"인사 기록 하나 좀 봐주시겠읍니까. 김진하 대위입니다. 정보처에 있었읍니다."

"어느 김진하요."

"1923년생, 서울."

서기가 다른 철을 꺼내 손가락으로 훑었다. 손가락이 한 번 멈췄다가 다시 갔다. 그리고 돌아왔다.

"여기 있읍니다. 소령으로 추서됐고요."

"언제입니까."

"오십이년 십일월."

"며칠입니까."

서기가 나를 한 번 봤다. 날짜까지 묻는 사람이 흔치 않은 모양이었다.

"구일입니다. 순직으로 되어 있읍니다. 근무지는… 안주 북쪽 검문소로 나와 있읍니다."

나는 수첩을 꺼내 십일월 구일이라고 적었다. 날짜를 물은 것은 그것 말고 확인할 방법을 내가 모르기 때문이다. 사람이 죽었다는 말은 여러 사람이 여러 번 옮기는 동안 조금씩 달라지지만 날짜는 달라지지 않는다.

삼 년 사 개월이 지나 있었다. 그동안 나는 평양에서 심사 통역을 했고, 정주에서 확성기를 들었고, 경무대에서 한 번 통역을 했다. 그 사이 어느 날에도 김 대위를 생각한 적이 없다.

도장을 받아 나오는데 복도 끝에서 담배를 피우던 준위 하나가 나를 불렀다. 얼굴은 알겠는데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다.

"김 대위 물어보셨소?"

"예."

그는 담배를 두 모금 더 피웠다. 재를 손바닥에 털었다.

"본인 총으로 했답디다. 겨울 들기 전에."

그러고는 손바닥을 바지에 문지르고 반대쪽으로 갔다. 나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물을 것이 없어서가 아니라, 물으면 그가 아는 것 이상을 말하게 될 것 같아서였다.


그날 밤 최정근에게 답장을 썼다.

그는 미국에서 두 달에 한 번쯤 편지를 보낸다. 이번 것에는 겨울이 길다는 이야기와 도서관이 밤 열한 시까지 문을 연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돌아올 계획은 이번에도 없었다.

나는 전역했다고 썼다. 종로에 사무실을 얻어 다닌다고 썼다. 계약서와 설명서를 옮기는데 나쁘지 않다고 썼다. 서울은 아직 춥고 삼월인데 밤에 물이 언다고 썼다. 자네가 보내준 사전은 잘 쓰고 있다고도 썼다.

넉 장을 쓰는 데 두 시간이 걸렸다. 다 쓰고 처음부터 읽어보니 사실 아닌 문장이 한 줄도 없었다.

김진하 대위의 이름은 쓰지 않았다. 그가 김 대위를 알았는지도 나는 모른다.

봉투를 붙이고 나서도 한참 손바닥으로 눌렀다. 이미 붙어 있었는데도 그랬다.


1958년 11월 ~ 12월 · 서울, 을지로의 출판사와 명동의 다방

편집자가 원고를 신문지에 싸서 왔다. 끈으로 열십자로 묶여 있었고, 매듭이 두 번 지어져 있었다.

"교정쇄까지 나온 겁니다. 초판은 이천 부 찍읍니다. 그거야 뭐 어렵지 않고요."

그는 사무실 책상 위에 그것을 올려놓고 손으로 두 번 눌렀다.

"미국 쪽에서 한번 보자는 사람이 있어서요. 우선 앞부분 백 장만 영역해주시면 됩니다. 값은 장수대로 쳐드리고, 이건 딴 데 못 맡깁니다. 한 선생이 그쪽 사정을 아시니까."

"어느 쪽 사정 말입니까."

"북쪽 말입니다. 지명이니 그런 거."

제목은 『셈』이었다. 지은이 자리에 오정민이라고 적혀 있었다. 국한문 혼용, 세로쓰기, 이백사십 쪽.


사흘 밤 읽었다.

1954년 겨울 박천과 운산에서 그녀가 본 것이 적혀 있었다. 배급이 오는 달과 오지 않는 달. 빈 부엌의 개수. 죽은 아이의 나이. 그녀는 아이가 왜 죽었는지를 방사선으로 쓰지 않았다. 굶어서 죽었다고 썼다. 봉쇄가 사람을 죽이는 방식은 폭발과 다르고, 다르다는 것을 아는 사람만 그렇게 쓸 수 있다.

첫 밤에 걸린 것은 인칭이었다. 그녀는 본문에서 나는, 이라고 쓴다. 나는 그 집에 들어갔다. 나는 그 여자가 하는 말을 두 번 되물었다. 나는 그것을 믿지 않았고 그다음 날 믿었다. 그 시절 신문 기사는 그렇게 쓰지 않는다. 기자는 본문에 없고, 없는 사람이 봤다고 하는 것이 규칙이다.

그녀는 규칙을 지키지 않았고, 그래서 이 책에는 쓴 사람이 들어 있다.

둘째 밤에 이름이 나왔다. 그녀는 만난 사람의 이름을 전부 적어두었다. 이름과 나이와 어디서 왔는지. 성만 아는 사람은 성만 적고, 괄호를 열어 성만 알았다고 적었다. 이름을 대지 않으려 한 사람은 대지 않으려 했다고 적었다.

나는 1951년 1월에 포로 둘의 이름을 묻지 않았다. 물어야 할 이유를 그때 찾지 못했다. 그 둘은 서로 말이 통하지 않았고 나에게는 중국어가 없었고 그날 안에 처리해야 할 것이 많았다. 이유는 지금도 그럴듯하다.

그녀는 물었고, 적었고, 칠 년 뒤 그것이 책이 되었다.

백육십칠 쪽에 괄호가 하나 있었다. 본문 중간에 괄호를 열고 그녀 자신의 문장이 세 줄 들어 있었다. 나는 이것을 이 이상 옮길 수 없고, 옮기면 다른 말이 된다는 뜻의 세 줄이었다.

열두 개의 태양 41화 제57장 전역 — 전환컷

그 괄호가 인쇄되어 있었다. 활자로, 본문과 같은 크기로, 지워지지 않은 채.

셋째 밤에 나는 첫 장으로 돌아가 영역을 시작했다. 두 문단을 옮기고 멈췄다. 다시 시작해서 이번에는 네 문단을 옮겼다. 그리고 옮긴 것을 소리 내어 읽어봤다.

틀린 데는 없었다. 문법도 맞고 시제도 맞고 지명 표기도 맞았다. 다만 짧았다.

원문에서 그녀가 열두 자로 쓴 것이 영어로는 여덟 낱말이 되었고, 여덟 낱말은 열두 자보다 매끄러웠다. 매끄러운 쪽이 늘 조금 적다.


편집자가 열흘 뒤에 왔다.

"안 됩니다."

그는 내 얼굴을 봤다가 원고를 봤다가 다시 내 얼굴을 봤다.

"어디가 어려우십니까. 손을 좀 봐드릴까요, 아니면 값을."

"값은 아닙니다."

"그럼."

나는 그 앞에서 오래 걸리지 않았다. 사흘 밤 동안 준비된 문장이었다.

"이건 옮기면 줄어듭니다."

편집자는 잠깐 앉아 있다가 원고를 다시 신문지에 쌌다. 끈을 묶을 때 매듭을 한 번밖에 짓지 않았다.

"사장님한테는 뭐라고 말씀드릴까요."

"제가 못 한다고 하십시오."

"못 하는 게 아니라 안 하시는 거 아닙니까."

"그렇게 전하셔도 됩니다."

그는 원고 뭉치를 겨드랑이에 끼고 계단을 내려갔다. 아래층에서 도장 파는 소리가 계속 났다.

내가 무언가를 거절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나는 열두 개의 지명을 옮겼고, 우물을 막는 고시문을 옮겼고, 노인의 이십 분을 예순 낱말로 옮겼다. 그중 어느 것도 하고 싶어서 한 것이 아니었고, 한 번도 못 하겠다고 하지 않았다.

그날 저녁 사장이 값을 계산해 보이며 아깝지 않으냐고 물었다. 아깝다고 대답했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이튿날 서점에 들러 『셈』을 두 권 샀다.

한 권은 책장에 꽂았다. 다른 한 권은 신문지로 싸서 노끈으로 묶고, 미국으로 보내는 소포 서식에 내용물을 서적 일 책이라고 적었다. 값을 매기는 칸이 있어서 정가를 적었다.

최정근은 요새 편지마다 한국 책을 보내달라고 했다. 여기서는 뭐가 나오는지 통 모르겠다고, 아무거나 좋으니 요새 것으로 보내달라고.

우체국 저울 위에 소포를 올렸을 때 바늘이 한참 흔들리다가 멈췄다. 직원이 무게를 부르고 나는 그것을 받아 적었다. 받아 적을 이유는 없었다.

책장에 꽂아둔 것은 그 뒤로 펴보지 않았다. 백육십칠 쪽이 어디쯤인지는 손가락이 기억했다.


십이월 중순에 명동에서 만났다.

다방은 이층이었고 난로가 가운데 있었다. 전축에서 서양 음악이 낮게 나왔다. 그녀는 목도리를 벗지 않고 앉았다.

"들었읍니다. 거절하셨다고."

"예."

"이유도 들었읍니다. 짧게 말씀하셨다고 하더군요."

"길게 할 말이 아니어서요."

레지가 커피를 놓고 갔다. 그녀는 설탕을 두 숟갈 넣었고 나는 넣지 않았다. 그것을 그녀가 봤다.

"책은 좀 나갑니까."

"종로에서 두 군데는 안 깔아줬읍니다. 한 군데는 깔았는데 뒤쪽 서가에 세워놨더군요. 표지가 안 보이게."

"이유는요."

"세 군데가 다 다른 이유를 댔읍니다. 그건 제가 잘 압니다. 오십사년에도 그랬으니까요."

그녀는 그 말을 하면서 웃지 않았고 화도 내지 않았다. 잔을 저었다.

"칠 년 전에 제가 뭘 여쭤봤는지 기억하십니까."

"기억합니다."

"뭐라고 여쭤봤습니까."

중앙청 앞이었다. 사진반이 노인을 앉혀놓고 태극기 앞에 세울 자리를 잡던 삼월이었다. 나는 노인에게 여기 앉으시라고 옮겼고, 그녀가 옆에서 그것을 보고 있었다.

"지금 옮긴 게 그 사람 말이냐, 저 사람 말이냐고 하셨읍니다."

"그런 말버릇이 있었읍니다. 그때는 스물넷이었으니까요."

"오십이년 이월에도 한 번 더 하셨읍니다. 그날은 두 사람 말을 다 했다고요."

"그건 물어본 게 아니고 그냥 본 대로 말한 겁니다."

그녀가 잔을 두 손으로 감쌌다. 난로에서 탁 하고 무엇이 튀는 소리가 났다. 이층 창밖으로 전차가 지나가는 것이 보였고 유리에 김이 서려 있어서 형체만 보였다.

"그래서요. 대답은 있읍니까."

나는 잔을 내려놓았다. 오른쪽 손목을 왼손으로 쥐고 있는 것을 알아채고 손을 풀었다. 통역석에 앉을 때 하던 버릇인데 통역석에서 내려온 지 삼 년이 다 되어가는데도 손이 먼저 갔다.

"칠 년 걸렸읍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를 봤다. 목도리 끝을 한 번 당겨 여몄다. 그러고는 웃었다.

웃음소리는 크지 않았다. 옆자리 사람들이 돌아보지 않을 만큼이었고, 그런데도 꽤 오래 갔다. 다 웃고 나서 그녀는 잔을 들어 남은 것을 마셨다. 커피는 진작 식어 있었다.

웃음소리는 크지 않았다. 옆자리 사람들이 돌아보지 않을 만큼이었고, 그런데도 꽤 오래 갔다. 다 웃고 나서 그녀는 잔을 들어 남은 것을 마셨다. 커피는 진작 …

남은 3화 · 약 12,807자 · 약 18분

내 서재

좋아요와 책갈피는 이 기기에 저장됩니다

열두 개의 태양전 44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