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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화제47장 다시 다리 위에서

· 44화 중 34화 · 3,325자 · 약 5분 · 무료

글자3 / 5

사월 이십사일 오후였다.

세 시가 넘어서 해가 다리 서쪽으로 기울면 강물이 눈에 들어와서 서류를 보기가 어려웠다. 그 시간에 노인 하나가 앞에 섰다.

열두 개의 태양 34화 제47장 다시 다리 위에서 — 헤더컷

일흔쯤. 무명 두루마기에 짚신 위에 헝겊을 감았고, 등에 진 것이 작았다. 천막에서 이미 잰 뒤였다. 어깨에 분필로 그은 표시가 있었으므로 수치는 문제가 없었다.

"성함하고 본적을 말씀해 주십시오."

"박태선이오. 정주군 임포면."

정주. 나는 펜을 종이에 댄 채로 잠깐 있었다.

"남쪽에 연고자가 있으십니까."

"아들이 있소."

"성함은요."

"박기수. 스물아홉이오. 마흔여덟 년에 내려갔소. 부산에 있다고 편지가 두 번 왔소."

"편지 갖고 계십니까."

"태웠소."

명부는 세 권이었다. 남쪽 도별로 등록된 이북 출신 성인 남자의 이름이 자모순으로 있었다. 부산 것이 제일 두꺼웠다. 나는 박씨 항목을 폈다.

박기수가 넷 있었다. 나이가 다 달랐고 본적이 다 달랐다. 정주는 없었다.

미 헌병 중위가 내 어깨 너머로 봤다.

"Not in the book."

"There are four. None match."

"Then he's not on it." 그는 다음 사람 쪽으로 손을 들었다. "Tell him he's not in the records."

노인은 내 얼굴을 보고 있었다. 나를 보는 것이 아니라 내 입을 보고 있었다.

나는 세 문장을 동시에 생각했다.

기록에 없습니다.
기록에 없으니 돌아가십시오.
그리고 세 번째.

"기록을 찾는 중입니다."

내 목소리였다. 평소보다 조금 낮게 나왔다.

"오늘은 마감이 됐고, 내일 아침에 다른 명부를 한 권 더 봅니다. 저기 천막에서 하룻밤 기다리십시오."

노인이 고개를 두 번 끄덕였다. 그러고는 등에 진 것을 추스르고 대기 천막 쪽으로 걸어갔다. 걸음이 느렸고 다리 상판의 이음매마다 발을 한 번씩 멈췄다.

미 헌병 중위가 물었다.

"What'd you tell him?"

"That we're still checking."

"Are we?"

"There's another list."

그는 어깨를 으쓱하고 다음 사람을 불렀다. 그 짧은 문답에 걸린 시간은 삼 분이 되지 않았다.

다른 명부는 없었다.


밤에 나는 천막 안에서 침낭 위에 앉아 있었다.

수첩이 둘이다. 하나는 공용이고 날짜와 인원과 안건이 적혀 있다. 나는 그것을 먼저 펴서 사월 이십사일 자에 통과 백사, 반려 예순셋, 재측정 열일곱이라고 적었다.

그다음에 둘째 수첩을 폈다.

둘째 수첩에는 지금까지 아무도 본 적이 없는 것들이 적혀 있다. 옮기면서 잘라낸 것, 옮길 말이 없어서 알파벳 그대로 적어 둔 것, 회의에서 아무도 받아 적지 않은 문장. 나는 그 수첩에 내가 한 일을 적은 적은 없었다.

연필을 두 번 깎았다.

그리고 한 줄을 적었다.

사월 이십사일. 박태선. 정주군 임포면. 없다를 찾는 중이다로 옮겼다.

적고 나서 나는 그 줄을 오래 보았다.

무엇을 더 적어야 할지 몰랐다. 왜 그랬는지를 적으면 변명이 되고, 잘못했다고 적으면 그것도 사실이 아니었다. 노인이 내일 아침에 어떻게 될지는 나도 알고 있었다.

바깥에서 강물 소리가 났다. 사월의 청천강은 물이 불어 있었다.

나는 그 줄 아래를 비워 두고 수첩을 덮었다.


1952년 7월 · 평안북도 정주, 마을과 옛집, 뒷산

측정반은 사백 미터마다 섰다.

지프에서 병사 하나가 내려 계수기를 들고 길 오른쪽으로 스무 걸음, 왼쪽으로 스무 걸음 걸었다. 상사가 지도판에 숫자를 적었다. 그동안 나머지는 차에 앉아 있었다.

숫자는 종잡을 수 없었다. 아침에 박천 지나서 잰 논에서는 계수기가 거의 조용했다. 거기서 백 미터쯤 떨어진 다음 논에서는 소리가 잦아져서 병사가 뒤로 물러났다. 그다음 논에서는 다시 조용했다.

"얼룩이오." 윤성갑 준위가 말했다. "빨래하다 튄 것처럼."

그는 조수석에서 지도판을 넘겨받아 보고 있었다. 이 자리를 만든 것이 그였다. 측정반에는 원래 한국인 통역이 배정되지 않는데, 어디에 뭘 어떻게 써넣었는지 사흘 만에 서류 한 장을 만들어 왔다.

"한 대위, 이거 규정대로 한 거 아니오. 내려가면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시라요."

"압니다."

"그리고 다섯 시까지 다리를 다시 넘어야 하오. 넘어야 오늘 안에 안주에서 잠을 자오."

미군 상사가 가슴에서 필름 배지를 하나 떼어 나에게 건넸다. 손톱만 한 검은 딱지였다. 왼쪽 주머니 위에 달라고 손짓했다. 나는 달았다. 윤성갑은 받아서 주머니에 넣었다.

길 양쪽으로 논이 이어졌다. 작년 것이 그대로 서 있는 논이 있었다. 벼가 팬 채로 겨울을 나고 여름을 맞아서 대가 삭아 있었고, 이삭이 검게 말라 고개를 꺾은 채로 줄줄이 서 있었다. 아무도 베지 않은 논은 멀리서 보면 색이 달라서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올해 갈아 놓은 논도 있었다. 다섯 뙈기, 여섯 뙈기씩 뭉쳐서. 사람이 있는 자리였다.

열두 개의 태양 34화 제47장 다시 다리 위에서 — 전환컷

개가 없었다. 마을을 셋 지나는 동안 개 짖는 소리를 한 번도 듣지 못했다. 굴뚝 연기는 오전 내내 두 번 봤다.

정주읍을 지나갈 때 길가에 서 있는 건물이 세 채였다. 나머지는 무너진 것이 아니라 뜯긴 것이었다. 서까래가 없고 문틀이 없었다. 누가 가져갔는지는 물어보지 않아도 알 만했다.

남서면 쪽으로 꺾는 갈림길에서 나는 상사에게 삼십 분을 청했다. 그는 손목시계를 보고 사십 분을 줬다.

윤성갑이 지프에서 내리지 않았다.

"같이 안 가십니까."

"내레 여기 있갔소." 그는 지도판을 무릎에 놓고 담배를 물었다. "사십 분이면 사십 분이오. 늦으면 저 상사가 경적을 울릴 텐데, 그 소리 두 번 듣기 전에 오시라요."


우리 집은 서 있었다.

지붕의 이엉이 반쯤 내려앉아 서까래가 드러났는데 기둥은 곧았다. 마당의 감나무도 있었다. 잎이 나 있었다.

문은 열려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문짝이 없었다. 문설주만 있었고 그 사이로 마루가 보였다.

나는 문지방을 넘었다.

이 문지방을 마지막으로 넘은 것이 마흔다섯 해 십일월이다. 그때 나는 저녁을 먹고 나왔고, 신발을 신으면서 뒤를 돌아보지 않았고, 그것이 마지막이 될 것을 몰랐다.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마루에 널판이 세 장 빠져 있었다. 방문의 창호지는 없고 살만 남았다. 벽에 못 자국이 넷 있었는데 그중 두 개가 아직 못이었다. 부엌으로 들어가 보니 아궁이가 있고 솥이 없었다. 솥 자리에 흙이 동그랗게 굳어 있었다. 그 옆에 물동이를 놓던 자리는 바닥이 조금 꺼져 있었다.

나는 방을 하나씩 다 봤다. 세 개였다. 세 번째 방의 구석에 마른 짚이 한 줌 있었다. 누가 잠깐 자고 간 자리였고, 언제인지는 알 수 없었다.

밖으로 나와 마당에 섰다. 감나무 밑에 서서 집을 봤다.

무너지지 않았다는 것이 이상했다. 사람이 없는데 집이 서 있으면 집이 아니라 그냥 나무와 흙이다. 그런데도 나는 그것을 계속 우리 집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남은 사람은 셋이었다.

노인 둘과 마흔쯤 된 여자. 마을 아래쪽 우물가에 셋이 다 있었다. 우물은 쓰고 있었다. 두레박줄이 새것이었다.

노인 하나가 나를 오래 봤다. 눈이 흐려서 가까이 왔다가 다시 뒤로 물러났다.

"어디서 봤는데."

"한경모의 아들입니다."

"아—" 노인이 입을 벌렸다. 이가 없어서 소리가 새어 나왔다. "오산학교 서무 보던 한 서무. 그 집 큰아들이구먼. 왜정 때 영어 배우던."

"예."

"살아 있었구먼."

"예."

노인은 두레박줄을 손에 감았다 풀었다.

"어머니는 작년 여름에 갔소. 뒷산에 있소."

물이 두레박에 차는 소리가 났다.

"누이는 그 뒤에 남쪽으로 갔소."

나는 그 두 문장을 다 들었다. 두 번째 문장을 듣고 나서 첫 번째 문장을 다시 들었다. 순서가 그렇게 되었다.

"언제 갔습니까."

"팔월이오."

"팔월 언제요."

노인이 여자를 봤다. 여자가 대답했다.

"보름 지나서요. 스무날께."

나는 물어볼 것이 더 있었다. 어떻게 갔는지, 혼자 갔는지, 무엇을 가져갔는지, 몸은 어땠는지.

"고맙습니다."

그 말만 했다.

두레박이 올라왔다. 여자가 물을 동이에 부었다.

"어르신들은 왜 안 가셨습니까."

노인이 우물 난간에 손을 얹었다.

"갈 데가 있어야 가지."

옆의 노인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작았다.

"작년 가을에 한번 나갔다가 돌아왔소. 안주 다리에서 못 넘게 합디다. 사흘 자다가 걸어서 왔소."

"지금은 남쪽에 연고자가 있으면 넘습니다."

"연고자."

노인이 그 말을 한 번 되뇌었다. 그러고는 물동이를 인 여자가 앞서 걸어가는 쪽을 봤다.

"우리 연고자는 저 산에 다 있소."


뒷산은 낮았다.

집 뒤로 밭 두 뙈기를 지나면 소나무가 서 있고, 소나무 위쪽으로 비탈이 완만하게 올라간다. 어릴 때 하루에도 몇 번씩 오르내리던 자리다.

돌무더기는 소나무에서 서른 걸음쯤 위에 있었다. 하나가 아니었다. 여섯이었다. 크기가 제각각이고, 어떤 것은 돌을 제대로 쌓았고 어떤 것은 그냥 얹어 놓았다.

세 번째 것 앞에 나뭇조각이 하나 꽂혀 있었다. 손바닥만 한 널판을 깎아 세운 것이었고, 거기 먹으로 쓴 글씨가 있었다. 비를 여러 번 맞아서 흐렸는데 획이 남아 있었다.

崔福順

나는 그 앞에 앉았다.

내려온 것은 사십 분에서 십오 분이 지난 뒤였다.

내려온 것은 사십 분에서 십오 분이 지난 뒤였다.

남은 10화 · 약 37,447자 · 약 5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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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 개의 태양전 44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