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두 개의 태양 제5부 낙진(落塵)
27화제37장 나아지는 것처럼
칠월 초 인민반 회의에서 리정순이 그것을 말했다.
"유월에 우리 반에서 앓은 세대가 아홉이고, 그중 여덟 세대가 회복했습니다. 사망한 사람이 셋인데 두 사람은 고령이었습니다."

방 안에서 누가 헛기침을 했다.
"미제가 세균을 뿌렸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정순이가 종이에서 눈을 들었다. 그것은 상급에서 내려온 문장이 아니었다. 그 자리에서 나온 말이었다. "우리는 물을 끓여 먹었고 뒷간을 치웠고 그릇을 따로 썼습니다. 인민의 위생 사업이 미제의 세균을 이긴 겁니다."
"기래, 그거이 맞디." 이만술이 담뱃대로 무릎을 쳤다. "물을 끓여 먹고부터 낫디 않았네."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은 앞뒤가 맞았다. 물을 끓이기 시작한 것이 유월 팔일이고 사람들이 낫기 시작한 것이 유월 중순이니까, 순서가 맞았다. 마을은 그 순서를 오래 이야기했고, 이야기할수록 그것이 확실해졌다.
재옥은 뒷줄에 앉아 있었다. 아홉 세대라는 말이 나왔을 때 속으로 다시 세었다. 재옥이 센 것은 열한 세대였다. 정순이가 센 것은 아마 인민반 장부에 든 세대만이었을 것이다. 아랫말 끝집은 노인이 죽고 나서 세대주가 없어졌고, 방앗간집은 두 세대가 한 집에 살았다. 장부는 그런 것을 반씩 세지 않는다.
재옥은 손을 들지 않았다.
회의가 끝나고 나오는데 정순이가 먼저 마당에 나와 있었다. 등잔 심지를 끄고 나오는 사람들이 다 갈 때까지 서 있다가, 재옥이 나오자 같이 걸었다.
"너희 오마니 일어나셨다며."
"응."
"잘됐다야."
정순이는 손에 든 장부를 겨드랑이에 끼고 두 손을 앞치마에 문질렀다. 밤인데도 이마에 땀이 배어 있었다.
"내레 요새 저녁만 되면 다리가 무겁다." 정순이가 말했다. "책상에 앉아만 있어서 그런가."
"너도 물 끓여 먹으라우."
"기래야디."
정순이는 웃고 나서 갈림길에서 올라갔다. 걷는 것이 평소보다 느렸다.
유월 하순과 칠월 초의 정주는 아름다웠다.
보리를 다 거둬 마당마다 낟가리가 섰다. 모를 낸 논이 하루가 다르게 파래졌다. 뒷산에 산딸기가 익었고 아이들이 입을 벌겋게 물들이고 내려왔다. 밤에는 개구리와 소쩍새가 번갈아 울었고, 등화관제를 해도 달빛 때문에 마당이 훤했다.
윗말 처녀 하나가 시집을 갔다. 잔치는 못 하고 저녁에 국수만 말아서 몇 집이 나눠 먹었다. 재옥도 한 그릇 얻어먹었다. 신부는 재옥보다 한 살 위였고, 신랑 될 사람은 벌써 이태 전에 나가서 소식이 없는데도 혼례를 치렀다. 그런 혼례가 그해에 몇 있었다.
그 며칠 동안 재옥은 잠을 잘 자지 못했다.
이유가 없었다. 낮에 힘들게 일했고 저녁에 밥을 먹었고 오마니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새벽 두 시쯤이면 눈이 떠졌다. 떠지면 누운 채로 오마니 숨소리를 들었다. 숨소리는 고르게 났다. 고르게 나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도 한참 더 들었다.
한 번은 일어나서 오마니 베개를 들춰보았다. 아무것도 없었다. 재옥은 베개를 도로 놓고 누웠다.
그다음 날에는 아랫말 쪽으로 가는 길에 걸음이 느려졌다. 방앗간집 마당에 낟가리가 서 있었고 도리깨 소리가 났다. 재옥은 그 소리를 들으면서 지나갔다. 유월에 머릿속으로 그렸던 그림을 다시 꺼내보려다가 그만두었다. 이제 점을 찍을 일이 없었다. 점이 없어지는 것을 그리는 방법은 재옥이 알지 못했다.
칠월 이일 저녁에 오마니가 머리를 감았다.
물을 데워주고 재옥이 뒤에서 부어주었다. 머리를 감기고 나서 마루에 앉혀놓고 수건으로 눌러 말렸다. 오마니가 참빗을 달라고 해서 갖다 주었다.
오마니는 등을 돌리고 앉아서 빗었다. 재옥은 마당에서 함지를 헹궜다.
한참 뒤에 오마니가 방으로 들어가고, 재옥이 마루를 훔치러 올라갔다가 빗을 보았다.
살 사이에 머리카락이 물려 있었다. 한 줌은 아니었다. 그러나 빗 하나에서 나올 만한 양보다는 많았다. 재옥은 그것을 손가락으로 훑어 뽑아냈다. 뽑아내고 나서 다시 훑으니까 또 나왔다.
오마니는 마흔아홉이다. 마흔아홉이면 머리가 빠질 나이인가. 재옥은 그것을 알지 못했다. 열아홉이 알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재옥은 뽑아낸 것을 아궁이에 넣고 불을 붙였다. 타는 냄새가 잠깐 났다. 그다음에 빗을 들고 우물가로 나가서 씻었다. 살 사이를 손톱으로 긁어내고, 물에 헹구고, 앞치마로 물기를 훔치고, 부뚜막 위에 놓아 마르게 했다. 자기 전에 마른 것을 확인하고 안방 문갑 위 제자리에 놓았다.
이튿날 아침, 재옥이 그 앞을 지나가다 보니 빗이 젖어 있었다.
1951년 7월 · 개성 방면 도로, 유엔군 검역선
길 위에 석회로 선을 그어놓았다.
폭 오 미터쯤 되는 흙길을 가로질러 두 줄. 두 줄 사이가 사람 하나 서기에 알맞았다. 왼쪽 갓길에는 천막이 셋 있고 오른쪽에는 물통을 실은 트럭이 두 대 서 있었다. 트럭에서 호스가 내려와 있었다.
대열은 아침부터 있었다. 오정민이 도착한 여덟 시에 이미 언덕 너머까지 이어져 있었고, 정오가 되어도 언덕 너머까지 이어져 있었다. 사람들은 등에 진 것을 내려놓지 않았다. 내려놓으면 다시 지기가 힘들어서였다.
선 앞에서 미군 위생병 하나가 막대기 끝에 달린 것을 사람들 몸에 대고 훑었다. 어깨에서 옆구리로, 옆구리에서 다리로, 다리에서 신발로. 그가 든 상자에서는 계속 소리가 났다. 딱, 딱, 딱. 뜸하게 나면 지나간다. 소리가 촘촘해져서 한 덩어리로 이어지면 위생병이 왼손을 들었고, 그러면 그 사람은 오른쪽 트럭 쪽으로 갔다.
오정민은 오전에 그 소리를 세었다. 한 시간에 백열아홉 명이 지나갔고 그중 스물둘이 오른쪽으로 갔다.
같은 마을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한 줄에 서 있어도 결과가 갈렸다. 앞의 노인은 그냥 지나가고 뒤에 선 며느리는 오른쪽으로 갔다. 며느리가 노인을 불렀고 노인은 못 들은 척 걸어갔다. 나중에 그 노인이 길가에 앉아 기다리는 것을 오정민이 보았다.
줄에 선 사람들은 그 소리의 뜻을 저마다 다르게 알고 있었다. 병을 잡아내는 기계라는 사람이 있었고, 간첩을 잡아내는 기계라는 사람이 있었다. 한 남자는 옆 사람에게, 저건 쇠붙이를 잡는 거니까 놋그릇을 짐에서 빼놓으라고 일러주고 있었다. 그 말을 듣고 짐을 푸는 사람이 셋 있었다.

오른쪽에서 하는 일은 간단했다.
천막 뒤에서 옷을 벗긴다. 벗긴 옷은 따로 쌓는다. 호스로 물을 뿌리고 비누를 준다. 머리는 감기고, 아이들은 깎는다. 마르면 다른 옷을 준다. 다른 옷은 구호품이라 치수가 맞지 않아서, 열 살짜리가 어른 셔츠를 무릎까지 늘어뜨리고 나오기도 했다.
가위질은 UNCACK에서 나온 한국인 요원이 했다. 마흔쯤 된 남자였고 손이 빨랐다.
"머리를 왜 깎습니까." 오정민이 물었다.
"머리카락에 잘 붙는답니다."
"뭐가 붙습니까."
"먼지가요." 그는 가위를 놀리면서 말했다. "먼지라고 하라고 했습니다."
깎인 머리카락은 드럼통에 모아 태웠다. 낮에 태우면 연기가 보인다고 저녁에 태웠다. 그 냄새가 저녁마다 길 위에 앉았다.
미국 통신사에서 나온 기자가 하나 와 있었다. 카메라를 두 대 목에 걸었고, 오전 내내 천막 뒤에서 나오는 아이들을 찍었다. 깎은 머리를 정면에서 한 장, 옆에서 한 장 찍고 나서 수첩에 뭔가 적었다.
"이름은 안 물어보십니까." 오정민이 물었다.
"캡션에 이름은 안 씁니다." 그는 필름을 감으면서 대답했다. "'북한 난민 아동'이면 됩니다. 사진은 얼굴이 말을 하니까요."
"얼굴이 무슨 말을 합니까."
그는 웃었다. 나쁜 웃음은 아니었다.
"그건 데스크가 정합니다."
의무장교는 브레넌이라는 이름의 대위였다.
오정민이 수첩을 펴 들고 다가가자 그는 담배를 껐다. 통역은 필요하지 않았다.
"이 선을 넘은 사람은 안전합니까."
"안전이라는 말은 제가 쓰는 말이 아닙니다."
"계수기가 울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옷과 몸 표면에 붙은 것이 기준치 아래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통과시킵니다."
"붙은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오정민은 수첩에서 눈을 들었다. "몸 안으로 들어간 것은요."
브레넌 대위는 트럭 쪽을 한 번 보았다. 물소리가 났다.
"이 기계는 그걸 재는 물건이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으로 잽니까."
"여기서는 재지 않습니다."
"먹은 물이나 먹은 곡식으로 들어간 것은."
"기자님." 그가 말했다. "제 임무는 이 선을 넘어가는 사람이 남쪽 사람들에게 무엇을 묻히지 않게 하는 겁니다. 제 임무는 그것뿐입니다."
그는 그 뒤로 두 마디를 더 했다. 씻기는 것이 안 씻기는 것보다 낫다는 말과, 자기 부대에 계수기가 넷밖에 없다는 말이었다. 그가 하지 않은 말은 오정민이 이미 받아 적은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기사는 그날 밤에 썼다.
여섯 매였다. 첫머리는 언덕 너머까지 이어진 대열이었고, 가운데는 석회선과 물과 가위였고, 뒤쪽 세 문단이 브레넌 대위와의 문답이었다.
이튿날 오후에 공보처 검열관이 붉은 연필로 그 세 문단에 줄을 그었다. 소령이었고 안경을 썼고 예의가 발랐다.
"이 부분은 곤란합니다."
"사실이 아닙니까."
"사실 여부를 따지는 자리가 아닙니다." 그는 연필을 내려놓았다. "이걸 그대로 실으면 저 선을 통과한 사람들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남쪽 마을에서 그 사람들을 받아주겠습니까?"
"그러면 지금은 받아줍니까."
"지금은 씻고 왔으니까 받습니다."
오정민은 원고를 도로 받아 세 문단을 손으로 찢어냈다. 찢어낸 종이는 검열관 앞에서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나머지는 실어주십시오."
"그러죠."
밖으로 나와서, 그녀는 주머니에 든 종이를 펴고 자기 수첩에 옮겨 적었다. 문장 하나도 고치지 않고 그대로 적었다. 옮겨 적으면서 한 군데를 바꿀 뻔했다. 브레넌 대위가 "제 임무는 그것뿐입니다"라고 말했을 때의 어조를 적어 넣고 싶었는데, 어조는 그가 한 말이 아니었다. 그녀는 그 자리를 비워두고 넘어갔다.
다 적고 나서 찢어낸 원고는 태웠다. 수첩 뒤쪽에는 이런 것이 벌써 여러 장 있었다. 실리지 않은 문단들이 실린 기사보다 두꺼워지고 있었다.
다 적고 나서 찢어낸 원고는 태웠다. 수첩 뒤쪽에는 이런 것이 벌써 여러 장 있었다. 실리지 않은 문단들이 실린 기사보다 두꺼워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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