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두 개의 태양 제5부 낙진(落塵)
25화제34장 정주의 유월
비는 이튿날 저녁에 왔다.
해가 지기 전부터 서쪽이 검어지더니 바람이 한 번 크게 돌고 나서 굵은 것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마당에 널어둔 것을 걷으러 나갔다가 재옥은 머리가 다 젖었다. 처마 밑에서 옷을 털면서 오마니에게 말했다.

"오마니, 못자리는 이제 안 대도 되갔소."
"기래. 하늘이 대주네."
밤새 왔다. 지붕에서 떨어지는 소리가 굵어졌다 가늘어졌다 했고, 새벽녘에 안방 서까래 밑이 새기 시작했다. 재옥이 대야를 받쳤다. 대야에 떨어지는 소리 때문에 오마니가 잠을 못 잤다.
이튿날도 왔고 그 이튿날도 왔다.
사흘 내내 마을은 어제 일을 계속 이야기했다. 이야기는 세 갈래에서 더 늘지 않았다. 폭격이라는 사람과 화약고라는 사람과 상급에서 내려온 말을 옮기는 사람. 비 오는 처마 밑에 모이면 그 세 가지가 다시 나왔고, 나올 때마다 조금씩 커졌다. 이만술은 신의주에 다녀온 조카를 기다린다고 했다. 조카는 오지 않았다.
둘째 날 오후에 재옥은 물독을 채웠다. 우물까지 가지 않아도 되니 좋은 일이었다. 처마 끝에 함지를 놓고 받으면 반 시간에 하나가 찼다. 그것을 부엌으로 나르고 다시 놓고, 그러기를 여섯 번 했다.
네 번째쯤에 손등을 보니 물이 조금 미끄러웠다. 비누를 만진 뒤 덜 헹군 것 같은 감촉이었다. 함지 바닥에는 앙금이 얇게 깔려 있었다. 기울여서 따라내니 물빛이 조금 흐렸다. 아주 검지는 않고, 우물물보다 조금 어두운 정도였다.
재옥은 그것을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장마 전 비는 늘 흙을 몰고 온다. 봄에 밭을 갈아엎어 놓으면 첫 비에 그 흙이 하늘로 올라갔다가 도로 내려온다고, 아바지가 살아 계실 때 그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재옥은 앙금을 마당에 버리고 함지를 헹궈 다시 놓았다.
저녁에 오마니가 그 물로 밥을 지었다. 밥에서는 아무 맛도 나지 않았다. 늘 나던 맛이 났다.
사흘째 되는 날 아침에는 새는 데를 막았다. 재옥이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 이엉을 들추니 밑에 깔린 짚이 검게 삭아 있었다. 작년에 손을 봐야 했는데 넘겼다. 헛간에서 성한 짚단을 꺼내 갈아 끼우고 새끼로 눌러 묶었다. 비를 그대로 맞으면서 했다. 손이 미끄러워 새끼줄을 두 번 놓쳤다.
내려와서 손을 씻는데 손톱 밑에 검은 것이 끼어 있었다. 지붕에서 묻은 검댕이라고 생각했다. 짚을 오래 얹어두면 그런 것이 생긴다. 재옥은 우물가에서 손톱을 문질러 씻고 앞치마에 닦았다.
밤에 재옥은 잠결에 무슨 소리를 듣고 깼다.
오마니가 등잔도 켜지 않고 앉아서 머리를 빗고 있었다. 참빗이 머리카락을 훑는 소리는 아주 작았다. 오마니는 열일곱에 시집와서 삼십 년 넘게 그 시각에 그것을 했다. 재옥은 다시 눈을 감았다.
"안 자네?"
"자요."
"기래, 자라."
유월 이일 저녁에 비가 그쳤다.
구름이 동쪽으로 밀려가고 서쪽 산등성이 위로 늦은 볕이 났다. 마당의 흙이 김을 냈다. 마을 여기저기에서 문 여는 소리가 나고 사람들이 나와서 하늘을 보고 처마를 보고 논을 보았다. 물은 넉넉했다. 사흘 비에 못자리가 알맞게 잠겼고, 무너진 논둑은 아랫말 두 곳뿐이었다.
이만술이 지팡이를 짚고 나와 논둑을 한 바퀴 돌았다. 아이들이 웅덩이를 밟고 다녔다. 해가 넘어가자 개구리가 울기 시작했다. 사흘 만에 듣는 소리였다.
재옥은 방 안에 걸어두어 눅눅해진 빨래를 걷어 안고 나왔다. 빨랫줄에 맺힌 물방울을 손바닥으로 훑어내고, 홑청부터 한 장씩 다시 널었다. 널면서 팔이 조금 시큰했다. 사흘 동안 함지를 나른 탓이라고 생각했다.
1951년 6월 4일 ~ 12일 · 정주, 마을과 인민병원 진료소
우물가에 사람이 엎드려 있었다.
아랫말 방앗간집 며느리였다. 물동이는 옆으로 넘어져 있고 물은 다 쏟아졌고, 그 여자는 두레박 틀을 붙잡고 토하고 있었다. 재옥이 등을 두드려주었다. 나올 것이 없는데도 계속 켁켁거렸다.
"뭘 잘못 잡쉈소."
"어제 저녁에 남은 걸 먹었댔는데."
여자는 손등으로 입을 닦고 일어서다가 다시 주저앉았다. 재옥이 물동이를 대신 이고 아랫말까지 데려다주었다. 그 집 마당에서 시어머니가 또 토하고 있었다.
그날 아침 아랫말에서 세 집이 그랬다. 방앗간집, 그 옆집, 그리고 끝집. 상한 것을 먹었다고들 했다. 유월이니 그럴 만했다. 장독이 시고 남은 밥이 쉬는 철이었다.
이튿날 아침에는 아홉 집이 되었다.
아홉 집 중에 여덟이 아랫말이었다.
재옥은 그것을 세어보고 나서, 세어봤다는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먹은 것을 맞춰보았다. 사흘 전 아랫말 잔칫집에서 나눠 먹은 떡이 있었나 물어보니 그런 것은 없었다. 그다음에는 우물을 맞춰보았다. 아랫말은 아랫우물을 쓰고 윗말은 웃우물을 쓴다. 그럴듯했다. 그런데 웃우물을 쓰는 집 하나가 앓아누웠고, 아랫우물을 쓰는 집 둘은 멀쩡했다.
오마니가 토한 것은 유월 육일 아침이었다.
재옥이 부엌에서 불을 때고 있는데 안방에서 소리가 났다. 들어가 보니 오마니가 요강을 붙들고 있었다. 이마에 손을 대보니 뜨거웠다.
"오마니, 뭐 잘못 잡쉈소."

"너하고 같은 걸 먹었디."
재옥은 그 말에 대꾸하지 못했다. 재옥은 토하지 않았다. 머리도 아프지 않았고 열도 없었다. 사흘 비를 오마니보다 더 오래 맞았고 지붕에도 재옥이 올라갔고 함지도 재옥이 날랐다.
그날부터 재옥은 마을을 머릿속으로 그리기 시작했다. 아랫말 열넷, 윗말 아홉, 고갯마루 셋. 아픈 집에는 점을 찍고 안 아픈 집은 비워두었다. 점은 아래쪽에 몰려 있었다. 몰려 있는데 반듯하지 않았다. 아랫말 한가운데 두 집이 비어 있었고, 윗말 맨 끝 한 집에 점이 찍혔다.
재옥은 그 그림을 며칠 동안 고쳐 그렸다. 고칠수록 아무 모양도 되지 않았다.
저녁이면 물을 길으러 가는 척하고 아랫말까지 내려갔다. 마당에 그릇이 나와 있는 집, 굴뚝에 연기가 안 나는 집, 낮인데 문이 닫혀 있는 집을 지나가면서 셌다. 베를 짤 때 날실을 세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셌다. 스물, 스물하나, 스물둘. 세다가 틀리면 처음부터 다시 셌다.
한 번은 아랫말 두 번째 집 앞에서 오래 서 있었다. 그 집은 사흘 전까지 점이 없었는데 그날 아침에 점이 생겼다. 마당에 대야가 나와 있었고 그 안에 든 것이 무엇인지 재옥은 보지 않으려고 했다. 보고 나서 걸음을 빨리했다.
순회 의사는 유월 팔일에 왔다. 자전거를 끌고 왔고 가방 하나를 들고 있었다.
집집을 돌면서 배를 눌러보고 혀를 보고 눈꺼풀을 뒤집어 보았다. 아랫말 끝집에서 한참 있다가 나왔다.
"이질입니다." 그가 마당에 모인 사람들에게 말했다. "아니면 상한 걸 잡쉈거나."
"이질이면 배가 아파야디요." 이만술이 말했다. "우리 집 며느리는 배는 안 아프고 머리가 아프답네다. 아침에 한 번 게우고 나면 낮에는 또 멀쩡해요. 그런 이질도 있소?"
의사는 가방을 고쳐 들었다.
"물을 끓여 잡수시오. 그릇 따로 쓰고. 마당하고 뒷간을 자주 쓸고."
"약은 없소?"
"소독약은 진료소에 조금 있는데 그건 상처에 쓰는 거고요." 그는 잠깐 말을 멈췄다. "약이 오면 가져오갔습니다."
가기 전에 재옥네 집에도 들렀다. 오마니의 눈꺼풀을 뒤집어 보고, 목덜미를 보았다. 목덜미가 볕에 덴 것처럼 붉었다. 오마니는 사흘 동안 논에 나가지 않았다.
"여기 언제부터 이랬습네까."
"모르갔소. 나흘 됐나."
의사는 그 자리를 손가락으로 눌러보고 손을 뗐다. 눌렀던 자리가 하얘졌다가 도로 붉어졌다. 그는 가방을 열었다가 그대로 닫았다.
"잘 잡숫고 누워 계시라요."
그는 자전거를 끌고 고개를 넘어갔다. 마을 사람들은 그날부터 물을 끓여 먹었다. 재옥도 끓였다. 아침저녁으로 가마솥에 물을 붓고 장작을 넣고 김이 오를 때까지 앉아 있었다. 끓인 물은 식으면 맛이 밍밍했다. 오마니는 그 물을 두 모금 마시고 남겼다.
앓는 순서가 있었다.
아침에 게운다. 낮에는 괜찮아진다. 저녁에 열이 오른다. 밤에 땀을 흘리고 새벽에 식는다. 그러고 나서 다시 아침이다.
그 순서가 집집마다 거의 같았기 때문에 마을은 그것을 병의 모양이라고 여겼다. 낮에 괜찮아지는 대목이 사람들을 안심시켰다. 아랫말 며느리는 사흘째 되던 날 낮에 밭에 나가 김을 맸다.
오마니는 나흘 만에 죽 한 그릇을 다 비웠다. 재옥이 그릇을 부엌으로 들고 나오면서 처음으로 마음을 놓았다. 그날 밤 오마니는 자다가 두 번 일어나 물을 찾았다.
첫 사람은 유월 구일에 죽었다.
아랫말 끝집 노인이었다. 여든이 넘었으니 마을에서는 놀라지 않았다. 이틀 뒤에 방앗간집 시어머니가 죽었다. 그 이는 예순셋이었다. 그다음 날 아침에 아랫말 셋째 집의 아이가 죽었다. 여섯 살이었다.
세 번째 장례에 마을이 다 나왔다. 나온 사람 중에도 서 있기 힘들어하는 사람이 있었다. 상여를 멜 사람이 모자라서 윗말에서 넷을 데려왔다. 윗말 사람들은 아랫말 마당에 오래 서 있지 않았고, 일이 끝나자 곧 올라갔다. 아이의 어미는 관을 붙들고 있다가 사람들이 떼어냈다. 그 여자도 아침마다 게우는 사람이었다.
무덤은 셋 다 뒷산 같은 자락에 썼다. 흙이 얕아서 세 번 다 돌을 얹었다.
돌아오는 길에 리정순이 재옥 옆에 붙어 걸었다.
"이런 거 여기저기 옮기지 말라."
"내가 뭘 옮겼네."
"세는 거 말이야." 정순이가 앞을 보면서 말했다. "너 요새 사람들 집 앞에서 서 있다가 가디."
재옥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랫말이라서 그런 거이 아니야. 아랫말이 더러워서 그런 것도 아니고." 정순이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위생 사업이 부족했던 게 있으면 고치면 되는 거이고."
"기래."
정순이는 고갯길에서 갈라져 올라갔다.
정순이는 고갯길에서 갈라져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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