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두 개의 태양 제8부 셈(算)
43화제60장 프린스턴에서 온 편지
집에 돌아오니 여덟 시가 넘어 있었다. 아이들은 자고 있었고 아내가 라디오를 켜놓고 다림질을 하고 있었다.
"어떻게 될 것 같아요."

"물러설 거야. 양쪽 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별로 없던데요."
"만주 자료가 다 나와 있잖아. 오십육년에 공개된 실측치. 그걸 양쪽이 다 읽었어."
아내가 다리미를 세웠다.
"당신은 그걸 읽었어요?"
"나는 그걸 만든 쪽이야."
말해놓고 그는 그 말이 정확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낙진 실측치를 만들지 않았다. 그가 만든 것은 그 이전의 숫자다.
아내는 그 말을 물고 늘어지지 않았다. 결혼한 지 아홉 해가 되었고, 그 사이 그가 한국 이야기를 먼저 꺼낸 것은 네 번쯤이다. 그녀는 그 넷을 다 기억하고 있고 그가 그것을 아는지는 모른다.
"애들 방에 불 꺼줘요."
큰애 방에 들어가 스탠드를 껐다. 아홉 살이다. 책상에 지구본이 있었다. 그는 그것을 손으로 한 바퀴 돌렸다가 세웠다. 손이 멈춘 자리는 아무 데도 아니었다.
서재에 들어가 문을 닫았다. 종이를 꺼내고 만년필 뚜껑을 열었다.
1951년 3월, 대구의 수용소를 다녀온 밤에 그는 통역장교에게 물은 적이 있다. 자네는 왜 여기 있느냐고. 그때 그것은 호의였다. 저 사람은 여기 있을 사람이 아니다, 저 머리로 저 영어로 왜 이런 자리에 앉아 있느냐, 그런 뜻이었다.
십일 년 동안 그 질문은 방향을 바꿨다. 이제는 물어볼 상대가 자기밖에 없다.
Dear Han.
첫 문단은 안부였다. 그것은 한 번에 썼다. 사무실은 잘 되는지, 서울의 겨울은 여전한지, 여동생은 만났는지. 여동생 이야기는 3년 전 짧은 편지로 들었다.
둘째 문단에서 그는 세 번 고쳐 썼다.
처음에는 이렇게 썼다. 그것은 내 결정이 아니었다. — 다 쓰고 나서 줄을 그어 지웠다. 사실이지만 사실만으로 되어 있는 문장은 대개 무엇을 가리려고 있다.
다시 썼다. 나는 십일 년 동안 그날에 대해 매일 생각했다. — 지웠다.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어떤 해에는 몇 달씩 생각하지 않았고, 생각하지 않은 기간이 있었다는 쪽이 더 나쁘다.
세 번째로 썼다.
김포에서 내가 자네한테 세 마디를 했다. 그 뒤로 아무 말도 덧붙이지 않았고, 그건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다음 문장을 만들 줄 몰라서였다. 이제 만들었다. 나는 그때 정직한 숫자를 썼다. 정직한 숫자를 쓰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은 자리가 있다는 것을 나는 몰랐다. 나는 그것을 몰랐다는 이유로 용서받을 생각이 없고, 그렇다고 그때로 돌아가 다른 숫자를 쓰겠다는 말도 아니다. 다른 숫자를 쓰는 것은 거짓말이니까. 자리가 잘못되어 있었다. 나는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는 그 문단을 지우지 않았다.
셋째 문단은 짧았다. 내가 옳았는지 그르지 않았는지는 쓰지 않겠다. 나는 그 판단을 할 자격이 있는 사람을 아직 한 명도 만나지 못했다. 자네도 아니고 나도 아니다. 우리 둘 중에 한 사람은 그 자리에 있고 싶어서 있었던 것이 아니고, 나는 있고 싶어서 있었다. 그 차이는 십일 년이 지나도 그대로다.
답장은 하지 않아도 된다고 덧붙일까 하다가 덧붙이지 않았다. 그렇게 쓰면 답장을 바란다는 뜻이 된다.
끝에 이름을 적었다. Ted.
그가 죽는 것은 육 년 뒤다.
우체통은 모퉁이에 있었다. 코트를 걸치고 나가는데 아내가 아침에 부치지 그러느냐고 했다.
"아침이면 안 부칠 것 같아서."
밖은 추웠고 낙엽이 축축했다. 우체통 뚜껑은 손잡이가 차가웠다.
봉투를 넣었다. 안에서 종이가 다른 종이 위로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두께가 있는 소리였다.
그는 투입구에 손을 넣어보았다. 손등까지 들어가고 더는 들어가지 않았다. 손끝에 닿는 것은 없었다.
손을 빼고 뚜껑을 놓았다. 뚜껑이 제자리로 돌아가면서, 아까와 똑같은 소리가 한 번 더 났다.
1971년 6월 / 1974년 11월 / 1979년 3월 / 1986년 4월 · 안주 검문소 / 서울 / 아이오와 시더래피즈 / 도쿄
차단봉은 나무였다. 스무 해 동안 흰 페인트를 여섯 번 다시 칠했고, 마지막 칠은 재작년 봄에 했다.
김 하사는 아침 여덟 시에 그것을 올렸다. 도르래에 매단 추가 내려가면서 봉이 천천히 섰다. 서서 멎었다. 그게 다였다.
상부에서는 사람이 몰릴 것을 대비하라고 했다. 헌병 한 개 소대가 전날 밤에 와서 천막을 쳤고, 등록 서식이 이천 부 내려와 있었다.
아홉 시 반까지 열한 명이 왔다. 그중 여덟은 구경이었다.
노인 하나가 봇짐을 지고 왔다. 등록대 앞에서 이름과 원적을 대는데 손을 떨었다.
"어디까지 가십니까."
"고읍이오. 여기서 이십 리."
"고읍은 아직 안 됩니다. 해제된 건 여기서 북쪽으로 이십 킬로까지고, 고읍은 그 위입니다."
"이십 킬로면 몇 리요."
김 하사는 잠깐 셈을 했다.
"오십 리쯤 됩니다."
노인은 그 말을 듣고 봇짐을 고쳐 멨다. 그러고는 차단봉 너머를 봤다. 길이 있고 길 양쪽에 풀이 있고 그 뒤로 나무가 없었다. 스무 해 동안 아무도 나무를 심지 않았으니 있을 리가 없었다.
"들어가시겠읍니까. 이십 킬로까지는 됩니다."
"거기 뭐 있소."
"없읍니다."
노인은 등록 서식을 손에 든 채로 이 분쯤 서 있었다. 그리고 접어서 주머니에 넣고 돌아섰다.
그날 하루 차단봉 안으로 들어간 사람은 셋이었고 셋 다 그날 안에 나왔다.

오후 네 시에 소대장이 담배를 물고 와서 물었다.
"몇 명 썼나."
"등록은 셋입니다."
"이천 부 내려왔는데."
"예."
소대장은 천막 기둥에 기대 한참 서 있다가 들어갔다. 여섯 시에 김 하사는 차단봉을 도로 내리지 않았다. 내리지 말라는 지시가 그날부터였다.
봉은 그 뒤로 그대로 서 있었다. 서 있는 것도 세워두는 일이라 겨울에 한 번 쓰러졌고, 다시 세웠다.
통계관 이름은 서류에 나오지 않는다. 그는 사회부 조사국 제2과의 계장이고, 1974년 실태조사 보고서의 표를 만든 사람이다.
십일월에 표가 두 개로 늘어났다.
정부 추정 사망자, 십오만 사천. 민간 학술단체 추정, 사십칠만 이천.
세 배가 조금 넘는다. 국장이 그를 불러 계산 방법을 다시 검토하라고 했다.
"세 배가 나면 둘 중 하나는 엉터리 아닌가."
"둘 다 맞읍니다."
"그런 대답을 위에 어떻게 올리나."
계장은 이미 검토했고, 계산 방법에는 틀린 데가 없었다.
차이는 다른 데서 났다.
정부 표는 1951년 5월 29일부터 1953년 12월 31일 사이에, 오염 지역에서, 등록된 주민 중에 사망이 확인된 사람을 셌다. 민간 표는 1951년 5월 29일 이후 지금까지, 그 지역에 있었던 사람 중에 사망한 사람을 셌다.
등록되지 않은 사람. 오는 도중에 죽어서 어느 명부에도 오르지 못한 사람. 1954년 이주 뒤에 남쪽에서 죽은 사람. 봉쇄구역 안에서 죽었는데 신고할 이웃이 없던 사람. 그리고 1951년 여름에 태어나지 못한 사람.
계장은 그것을 보고서에 쓰지 않았다. 쓸 칸이 없었다. 서식에는 사망자 수를 적는 칸이 있고 누구를 세었는지 적는 칸은 없다.
책상 위에 신문이 접혀 있었다. 부고란에 배동헌이라는 이름이 있었다. 전 사회부 사무관, 향년 예순둘. 1960년에 파면된 사람이라 직함 앞에 전 자가 붙어 있었다. 계장은 그 이름을 알았고, 아는 사이는 아니었다.
그는 두 개의 표를 그대로 두고 보고서를 올렸다. 발표는 정부 숫자로만 나갔다. 이듬해 봄에 그는 다른 과로 옮겼다. 옮겨달라고 한 것은 아니었다.
서랍은 아래에서 둘째 칸이었다.
데커 부인은 남편이 죽고 나서 두 달 동안 그 방에 들어가지 않았다. 3월에 들어갔다. 정비소 장부와 세금 서류와 병원 청구서를 정리해야 했다.
손잡이가 뻑뻑했다. 두 번 흔들어 당기니 열렸다.
수첩은 공구 목록 밑에 있었다. 표지가 딱딱하고 모서리가 닳은, 군에서 쓰던 것.
대부분은 치수와 토크 수치였다. 60인치. 128인치. 5톤.
뒤에서 세 장째에 숫자가 열두 개 세로로 적혀 있었다. 일련번호였다. 날짜는 1951년 5월 27일. 그 아래 아무 설명이 없었다.
로이는 그 이야기를 한 번도 하지 않았다. 결혼한 것이 1953년이고, 그 사이 스물여섯 해 동안 한 번도.
부인이 기억하는 것은 겨울마다 그가 손끝을 입에 대고 녹이던 것이다. 정비소 일이 그렇지 뭐, 하고 그는 말했다. 스물몇 해를 그렇게 말했다. 아이오와 겨울에 손 시린 정비공이 그 사람 하나는 아니었다.
작년 가을에 병원에서 피 검사 결과를 들었을 때도 그는 별말을 하지 않았다. 담당 의사한테 딱 한 가지를 물었다. 그게 언제 것까지 계산에 들어가느냐고.
변호사는 수첩을 보고 두 시간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복사를 해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소송의 쟁점은 하나로 좁혀졌다. 필름 배지 기록에 따르면 로이 데커의 누적 선량은 기준 이하였다. 배지는 가슴 주머니 위에 달려 있었다.
그날 폭탄창 안에서 십일 분 동안 그의 손이 어디에 있었는지는 아무 데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는 그것을 알고 있었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수첩은 그것을 증명하지 못한다. 수첩은 그가 거기 있었다는 것만 증명한다.
1985년에 기각됐다.
1986년 4월 28일 저녁, 도쿄. 후지타는 사회부 야근이었다.
스톡홀름발 외신이 먼저 들어왔다. 스웨덴 원자력발전소에서 검출된 것이 자기네 것이 아니라는 내용. 그다음에 모스크바가 여섯 줄짜리 발표를 냈다.
후지타는 서른아홉이고, 1951년에는 아오모리에서 네 살이었다. 그해 여름에 어머니가 빨래를 밖에 널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다. 왜 안 널었는지는 오래 몰랐다.
자료실에서 1951년 6월 철을 꺼내 왔다. 도호쿠 각지 강우 검출 기사가 사흘 간격으로 실려 있고, 활자가 작았다. 그 여름부터 이 나라에서 반핵이라는 말이 시작됐다. 그는 그 철을 책상에 펴놓은 채로 원고를 썼다.
그는 첫 문장을 세 번 고쳤다.
처음에는 발생 장소와 시각을 앞에 놨다. 둘째는 소련의 발표를 인용했다. 셋째로 그는 이렇게 썼다.
데스크가 원고를 읽고 손가락으로 첫 줄을 짚었다.
"이거 확인됐나."
"수치는 아직입니다."
"그럼 왜 이렇게 쓰나."
"수치가 나와도 이 문장은 안 바뀔 겁니다."
데스크는 담배를 한 대 피우는 동안 원고를 다시 읽었다. 두 번째 읽을 때는 소리를 내지 않고 입술만 움직였다.
"고칠 거면 지금 고쳐."
"안 고치겠습니다."
데스크는 아무것도 고치지 않고 조판에 넘겼다.
윤전기는 새벽 한 시에 돌았다. 1면 왼쪽 아래, 본문 첫 줄.
체르노빌에서 일어난 일은, 1951년 5월 이후 인류가 겪은 것 중 가장 큰 것이다.
체르노빌에서 일어난 일은, 1951년 5월 이후 인류가 겪은 것 중 가장 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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