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와 사십년 제8부 불씨
43화제60장 어머니의 반닫이
"이게 뭡니까."
"어디에 무얼 넣었는지 적은 거다." 어머니가 첫 권을 가리켰다. "책 이름하고 쪽하고 줄이 있고, 뒤에 그 낱말이 있고."

"몇 개나."
"마지막에 세어 보고 그이가 그러더라. 삼만 천사백 개라고."
숫자를 듣고도 나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손이 공책 위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등잔 심지가 한 번 튀었고 재숙이 그것을 손가락으로 눌렀다.
삼만 천사백 개면 한 해에 천이백 개가 넘는다. 한 달에 백 개. 하루에 셋씩, 스물다섯 해 동안, 매일 같은 시각에 나가서 매일 같은 시각에 돌아오지 않던 사람이.
그는 총독부가 찍어서 조선 팔도 학교에 보낸 책에다 그것을 넣었다. 찍어 낸 것은 관에서 했고 넣은 것은 그가 했다. 배포도 관에서 했다. 지금 그 책들은 학교 창고와 헌책 시렁과 남의 집 다락에 있다. 어디에 몇 권이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것이 그가 고른 방식이었다.
"그럼 저 책들이 다."
"그건 나도 모른다. 그이는 그 얘긴 안 했어."
"어머니는 언제부터 아셨습니까."
"처음부터."
"스물다섯 해입니까."
"세어 보진 않았다만 그쯤 된다. 네가 두 살 나던 해 여름부터니까."
나는 물었다. 목소리가 낮게 나왔다. 나는 화를 내지 않았다. 화를 내지 않는 것이 이 집의 방식이었고 그것도 배운 것이다.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습니까."
어머니는 대답하기 전에 실패 상자의 뚜껑을 닫았다. 그리고 무릎 위에 손을 포갰다.
"처음에는 무서워서 안 했다. 그때 너는 두 살이었고 재영이가 여덟이었다. 그 무렵엔 사람 하나 없어지는 게 별일이 아니었어.
그다음엔 네가 학교에 들어갔다. 이 학년이던가, 선생이 집에서 무슨 말 쓰느냐고 아이들 손 들게 하고 적어 갔다지. 네가 손 안 들었다고 좋아하면서 저녁상에서 말하더라. 그날 밤에 네 아버지가 그러더구나. 재호한테는 아무것도 말하지 말자고. 내가 그러겠다고 했다.
그때부터는 못 해서 안 한 게 아니라, 안 하기로 한 걸 그냥 계속한 거다. 한 해 안 하면 그다음 해엔 더 못 한다. 사람이 그렇게 된다.
나중엔 네가 그 청에 드나들고, 의원 나리 밑에 들어가고, 도쿄까지 다녀오고 그랬다. 나는 그게 잘되기를 바랐다. 진짜로 바랐어. 그게 잘되면 이건 안 꺼내도 되는 거니까.
그리고 이게 제일 큰 이유다. 너한테 말하면 너는 그날부터 아는 사람이 된다. 아는 사람은 붙들려 가면 댈 게 있고, 모르는 사람은 없다. 나는 네가 댈 게 없는 사람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것뿐이다. 스물다섯 해 동안 내가 한 게 그것뿐이야."
문가에서 재숙이 등잔 심지를 조금 올렸다. 어머니가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그 애는 거의 알아듣지 못했을 것이다. 조선말이었으니까.
"이제 남은 게 이거밖에 없다." 어머니가 말했다.
나는 오래 앉아 있었다.
시월에 나를 앉혀 놓고 물었던 사람은 내가 무엇을 아는지를 물었다. 두 달을 물었다. 나는 아는 것이 없었고, 그래서 두 달이 걸렸고, 끝에 가서 서명했다. 그때 나는 내가 아무것도 몰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는 것이 억울했다. 그 억울함이 어디서 시작된 것인지가 이 방에 있었고, 그것을 만든 사람이 내 앞에 무릎을 포개고 앉아 있었다.
나는 그 사람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대신 열네 권을 한 권씩 다시 쌓았다. 위에 일곱, 아래에 일곱. 어머니가 꺼내 놓은 순서 그대로 놓았다.
"어머니, 이걸 읽어 주십시오."
"어디를."
"처음부터."
어머니가 첫 권을 무릎에 놓았다. 등잔을 당겨 놓고, 몸을 조금 앞으로 숙이고, 첫 줄에 손가락을 댔다. 손가락이 줄을 따라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갔다.
읽는 소리가 낮았다. 스물다섯 해 동안 이 방에서 이 소리가 몇 번 났는지 나는 모른다.
"국어 보급 교본 상권, 스물세 쪽, 대역란 넷째 줄."
손가락이 줄 끝으로 옮겨 갔다.
"가다."
1965년 12월 28일 · 강원도 인제군 산골, 간이학교
버스는 인제읍까지만 갔다. 거기서부터는 걸어야 한다고 차장이 말했고, 얼마나 걸리느냐고 묻자 눈이 안 오면 반나절이라고 했다. 눈은 오고 있었다.
이십 리였다.
최영선은 이불 보따리를 등에 지고 왼손에 책 보자기를, 오른손에 물주전자를 들었다. 물주전자는 면사무소에서 받은 것이었다. 관사에는 아무것도 없으니 그릇은 가져가라고 했고 그릇이라고 준 것이 주전자였다.
길은 개천을 따라 올라갔다. 눈이 발목까지 왔다가 무릎까지 왔다. 앞서 간 소달구지 자국이 있어서 그 홈을 밟았다. 홈이 끊기면 서서 다음 홈을 찾았다.
경성에서 이 자리까지 오는 데 서류가 넉 장 있었다. 파면 통지, 그 사유란의 여섯 글자, 도(道) 학무과가 보낸 대용교원 발령, 그리고 면사무소의 부임 확인. 정식 교원은 될 수 없다고 도에서 온 편지에 적혀 있었다. 대용교원은 자격 없는 자리이고 봉급이 정교원의 절반이고 언제든 그만두게 할 수 있는 자리다. 그 자리는 남아 있었다. 산골에서는 늘 남아 있었다.
해가 능선 뒤로 넘어갈 무렵 마을이 보였다. 열여덟 채쯤 되었다.

간이학교는 마을 끝 비탈에 있었다. 방 하나에 툇마루가 달렸고, 지붕은 함석이고, 마당에 국기 게양대가 서 있었다. 게양대만 새것이었다.
구장이 열쇠를 들고 나와 있었다.
"고생하셨소. 선생 안 온 지 일곱 달째요."
"일곱 달이요."
"앞엣분은 갑자기 그만두셨소. 애들은 그동안 그냥 놀았지." 구장이 문을 열면서 말했다. "선생, 한 가지만 미리 말해 두겠소."
"예."
"여기 애들은 집에서 조선말을 쓰오. 다 쓰오. 국어상용 인정받은 집이 우리 마을에 두 집이오. 산 밑에 두 집. 면에서는 해마다 그걸 적어 가고, 해마다 나한테 뭐라 하고." 그는 문지방의 눈을 발로 밀어냈다. "그거 고치는 게 선생 일이오. 나야 뭐, 시키는 대로 하는 사람이고."
방 안은 흙바닥에 널판을 깔았고 널판 위에 멍석이 있었다. 칠판은 판자에 검은 칠을 한 것이었다. 난로는 없고 방 한쪽에 아궁이가 있었다.
이튿날 아침 아이들이 왔다.
열일곱 명이었다. 여덟 살부터 열두 살까지 섞여 있었고, 절반은 신을 신고 절반은 짚신이었다. 들어오면서부터 떠들었다.
영선은 그 소리를 알아듣지 못했다. 문장이 어디서 끊기는지도 몰랐다. 억양이 오르내리는 것과 웃음이 터지는 자리로 대충 짐작할 뿐이었다. 앵정국민학교 삼 학년 교실에서는 아이들이 쉬는 시간에도 국어로 떠들었다. 여기서는 국어가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그녀가 교단에 서자 소리가 그쳤다.
"오늘부터 이 학교를 맡은 다카야마 리쓰코입니다."
아이들이 일제히 일어나 인사했다. 그것은 완벽했다. 허리 각도까지 같았다. 일곱 달 동안 선생이 없었어도 그것만은 남아 있었다.
뒤에서 두 번째 자리에 오길남이 앉아 있었다.
국어 시간에 그녀는 독본을 폈다.
"제1과. 우리 마을. 따라 읽으세요."
아이들이 따라 읽었다. 소리가 잘 맞았다. 발음이 정확했다. 억양도 틀리지 않았다. 열일곱 명이 한 목소리로, 산속 방 하나에서, 우리 마을에는 우체국이 있습니다, 하고 읽었다. 이 마을에는 우체국이 없다.
그녀는 문장을 끊어 읽히고 한 사람씩 시켰다. 다 됐다. 뜻을 물었다.
"우체국이 뭡니까."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열일곱 명 다 방금 그 낱말을 소리 냈다.
한 아이가 조선말로 뭐라고 하자 옆 아이가 대답했고 셋이 웃었다. 영선은 그 대화를 알아듣지 못했고, 그것이 자기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만 알았다.
오길남이 손을 들었다.
"편지 넣는 데입니다."
"맞아요. 어떻게 알았어요."
"경성 있을 때 봤습니다."
경성에서 이 아이는 두 달 동안 교실에서 입을 열지 않았다. 여기서는 손을 든다. 영선은 분필을 놓고 그 사실을 잠깐 들여다보았다가 다음 과로 넘어갔다.
수업이 끝나고 길남의 어머니가 왔다.
머리에 보자기를 이고 마당에 서서, 방으로 들어오라는 말을 세 번 사양한 뒤에 툇마루 끝에 걸터앉았다. 보자기 안에는 언 감자가 들어 있었다.
"선생님이 우리 애 학교 선생님이었다고 그러대요."
"예."
"경성서 여기까지 오셨네."
"발령이 여기로 났습니다."
여자는 그 말을 믿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자기 이야기를 했다. 이 마을에서 났고, 열일곱에 나가서 함경도 물건을 지고 경성까지 다녔고, 신당정 판자촌에서 십 년을 살았고, 가을에 짐을 싸서 친정 마을로 들어왔다고 했다. 판자촌이 헐린다는 말이 여름부터 돌았다고 했다.
"여기 오니까 애가 말을 해요." 여자가 말했다. "경성 있을 땐 벙어리인 줄 알았어요. 학교에서 뭐라고 종이도 보내고 그랬는데, 내가 그걸 읽을 줄을 알아야지."
영선은 그 종이를 기억하고 있었다. 자기가 쓴 것이었다. 언어 지체 소견, 이라고 적혀 있었다.
"어머님." 그녀가 말했다. "그 애는 말을 못 하는 게 아니었습니다."
여자가 웃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웃음이었고, 아이 선생이 좋은 말을 해 주었으니 웃어야 한다는 웃음이기도 했다. 그녀는 감자 보자기를 툇마루에 놓고 갔다.
여자가 웃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웃음이었고, 아이 선생이 좋은 말을 해 주었으니 웃어야 한다는 웃음이기도 했다. 그녀는 감자 보자기를 툇마루에 놓고 갔…
남은 1화 · 약 5,804자 · 약 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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