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와 사십년 제2부 감(柿)이 익다
10화제13장 시월 초하루
함흥행 열차는 오후 두 시 십 분에 경성역을 떠났다.
수갑은 앞으로 채워졌고 그 위에 겉옷을 걸쳐 주었다. 승객들에게 보이지 않게 하려는 배려가 아니라 소란을 막으려는 절차였다. 형석은 창가에 앉았고 형사는 통로 쪽에 앉아 곧 졸기 시작했다.

창밖으로 논이 지나갔다. 시월 초의 논은 노랬다. 벤 데도 있고 아직 안 벤 데도 있어서, 노란색이 두 가지로 갈라져 있었다. 소를 몰고 가는 사람이 보였다가 없어졌다.
원산을 지나면서 바다가 나왔다.
형사가 눈을 뜨고 기지개를 켰다. 그는 담배를 붙이더니 형석 쪽으로 갑을 내밀었다.
"안 피웁니다."
"편하겠소." 형사는 창밖을 보며 연기를 뱉었다. 서른 안팎으로 보였다. "함흥이 춥소. 여기보다 한 달 빠르오."
형석은 대답하지 않았다.
"나도 거기까지만 갑니다. 넘겨주고 밤차로 돌아와요." 형사는 재를 털었다. "선생 같은 분들은 처음이오. 나는 원래 절도 쪽인데 요새 사람이 모자란다고 붙여 놨소."
주머니 속에서 감자가 아직 미지근했다. 형석은 그것을 꺼내지 않았다.
형석은 세 시간 동안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무릎 위에서 손가락 하나가 아주 조금씩 움직였다. 획을 쓰는 모양이었다.
머릿속에는 다른 것이 없었다. 뜻풀이 셋째와 넷째를 합칠지 말지도, 어제 저녁상에 무엇이 올랐는지도 남아 있지 않았다. 벽에 등을 대고 서서 보았던 것, 서툰 붓이 나무에 남긴 굵은 획, 왼쪽에서 세 번째 상자의 옆면. 그것만 있었다.
그는 눈을 감고 처음부터 다시 불러 보았다.
170632.
1942년 12월 ~ 1943년 9월 · 함흥경찰서 유치장, 함흥형무소
물은 밤에 왔다.
함흥경찰서 유치장은 반지하였고 창이 천장 가까이에 하나 있었다. 십이월이 되자 그 창틀에 성에가 손가락 두 마디 두께로 앉았다. 낮에는 아무도 그것을 보지 않았고 밤에는 다들 그것을 보았다.
취조는 위층에서 했다. 내려올 때 사람이 걷지 못하면 둘이 부축해 왔고, 부축해 온 사람도 조선말을 쓰지 않았다. 옷이 젖어 있으면 아침까지 얼었다. 유치장 안에서는 젖은 사람을 가운데에 눕히고 둘러앉는 것이 규칙처럼 되었다. 누가 정한 것이 아니었다.
이윤재는 벽 쪽에 앉아 있었다. 쉰이 넘은 사람이었고, 이곳에 들어온 뒤로 안경다리 한쪽이 부러져 노끈으로 묶여 있었다.
밤에 그는 벽에 손가락을 댔다.
콘크리트에 손끝을 대고 천천히 움직였다. 획이 있고, 멈춤이 있고, 다시 획이 있었다.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손톱이 다 닳아 있어서 자국조차 나지 않았다.
옆에서 배윤식이 그것을 보고 있었다. 밀양 사람이었고 마흔둘이었고 기침이 잦았다.
"선생님, 뭐 쓰십니까."
"잊을까 봐."
"잊으면 어떻습니까. 어차피 다 저기 있는데."
"저기가 어딘데."
배윤식은 대답하지 못했다. 상자들이 어느 건물 어느 방에 있는지 여기서는 아무도 몰랐다.
그날 밤부터 두 사람은 나누어 외우기로 했다. 잠이 안 오는 시간에 낮은 소리로, 앞쪽은 윤식이 뒤쪽은 형석이. 하루에 열 개씩. 소리를 내면 간수가 온다고 해서 나중에는 입만 움직였다. 한징이 그것을 보고 두어 번 웃었다. 웃음이 소리는 아니었다.
"이래 봐야 얼마나 갑니꺼." 윤식이 어느 날 물었다.
"열 개면 한 달에 삼백이오."
"삼백 개 외우면 우리가 뭐 됩니꺼."
형석은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다음 날 밤에도 열 개를 했다.
형석이 위층에 불려 올라간 것은 열 몇 번이었다. 세지는 않았다. 처음 몇 번은 무엇을 묻는지 알았고, 나중에는 묻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대답이 아니라 사람이 자기 대답을 스스로 못 믿게 되는 상태였다.
이월 어느 날 아침에 유치장 문이 열리고 야스다가 직접 내려왔다. 그는 문턱에 서서 안을 한번 훑어보았다. 감기 든 사람이 셋이었고 기침이 이어졌다.
"여기 계신 분들은 학자시라던데." 그는 그 말을 예의 바르게 했다. "학자는 죽으면 손해요. 나라도 손해고 집안도 손해요."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문을 닫고 올라갔다.
이듬해 봄부터 취조실 분위기가 달라졌다.
야스다 경부보는 셔츠 소매를 걷은 채로 들어와 서류철 세 개를 책상에 올려놓았다. 물도 몽둥이도 없었다. 그는 의자를 당겨 앉고 서류철을 하나씩 폈다.
"자제분 학적부요."
형석은 책상을 보았다.

"안재영. 종로 제2국민학교 오학년. 열한 살." 야스다는 손가락으로 칸을 짚어 갔다. "산술 우, 국어 양, 조행 중. 담임 소견란에 이렇게 적혀 있소. '가정 사정으로 결석이 잦음.'"
책장 넘기는 소리.
"안재호. 다섯 살. 아직 학적이 없소. 이건 이태 뒤 서류요."
야스다는 두 번째 철을 폈다. 배급 통장 사본이었다.
"종로 6정목 제17반. 등급이 삼등이오. 작년 유월에 이등이었는데 시월에 내려갔소. 왜 내려갔는지는 나도 모르오. 부에서 하는 일이니까."
"…"
"그리고 이건 인정 신청서요." 세 번째 철. 그는 그것을 형석 쪽으로 반쯤 돌려놓았다. "부인이 오월에 냈더군. 국어상용 가정 인정 신청. 반장 도장까지 받아서 올렸는데 부에서 보류가 걸려 있소. 세대주 난이 비어 있어서요."
형석은 그 서류를 보았다. 아내의 글씨였다. 아내는 국어를 잘 쓰지 못했다. 획이 조심스럽고 자간이 넓었다. 한 글자 한 글자 물어 가며 썼을 것이다.
"인정되면 미곡이 한 등급 올라갑니다. 아이들 상급학교 내신에도 붙고." 야스다는 서류철을 나란히 정돈했다. 모서리를 맞추었다. "내가 부에 전화 한 통 넣을 수는 있소. 하지만 세대주가 여기 있는 동안은 아무 소용이 없소."
그는 화를 내지 않았다.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았다. 그것이 겨울보다 오래갔다.
여름 동안 야스다는 같은 서류를 여러 번 꺼냈다. 순서를 바꾸어 꺼내기도 했다. 어떤 날은 학적부만, 어떤 날은 통장만. 매번 새 서류가 한 장씩 늘어 있었다. 유월에는 재영의 담임이 새로 쓴 소견이 붙었고, 팔월에는 반장이 올린 상회 출석부가 붙었다. 형석의 집은 여덟 달 동안 상회에 사람을 못 내보내고 있었다.
"기소되는 사람은 열대여섯이오." 팔월 말에 야스다가 말했다. "검사국에서 그렇게 잡았소. 나머지는 처분이 달라요."
"어떻게 다릅니까."
"불기소요. 서류가 한 장 있으면." 야스다는 팔짱을 끼고 의자를 뒤로 기울였다. "이건 협박이 아니오. 규정이 그렇소. 규정은 내가 만든 게 아니고."
구월이었다.
야스다는 종이 한 장을 내놓았다. 인쇄된 것이었다. 위쪽에 제목이 있고 아래로 다섯 항이 찍혀 있었으며, 각 항의 끝에 빈칸이 있었다. 마지막 줄에 날짜와 성명과 무인 자리가 있었다.
"읽어 보시오."
형석은 읽었다. 문장은 그가 아는 문장이었다. 이런 문장을 쓰는 사람은 정해져 있고, 쓰는 사람이 정해져 있으면 문장도 정해진다. 새로 지어낸 것이 하나도 없었다.
"다 읽었소?"
"예."
"틀린 데 있소?"
형석은 고개를 저었다. 틀린 데가 없었다. 사실만 적혀 있었다. 자기가 무엇을 했는지, 그것이 어떤 뜻이었는지가 남이 정한 말로 적혀 있을 뿐이었다.
야스다는 벼루를 밀어 주었다. 먹은 이미 갈려 있었다. 만년필이 아니라 붓이었다.
"인장은 안 가져오셨을 테니 무인을 찍으시오."
형석은 붓을 들었다. 붓끝을 벼루 가장자리에서 두 번 훑었다.
성명란은 네 자였다. 나중에 붙은 씨 두 자와 원래 이름 두 자.
첫 자의 갓머리를 긋고 아래로 내려오는 데서 손목이 떨렸다. 획이 끊겼다. 그는 붓을 떼지 않고 그대로 이어 썼다. 이어 붙인 자리가 굵어졌다.
둘째 자와 셋째 자는 지나갔다.
넷째 자에서 다시 끊겼다. 쇠 금 변의 마지막 점을 찍기 전에 손이 한 박자 멈췄고, 다시 놀렸을 때 먹이 이미 번져 있었다. 점 하나가 원래보다 크게 앉았다.
네 자를 다 쓰고 나서 그는 붓을 벼루에 걸쳐 놓았다. 손가락 끝에 인주를 묻히고 이름 옆에 눌렀다.
야스다가 종이를 들어 잉크가 마르는 쪽으로 기울여 보았다.
"됐소."
그는 그것을 서류철에 끼웠다. 서류철에는 이미 다른 종이들이 여러 장 들어 있었다. 형석의 것은 그중 하나가 되었고, 끼워 넣는 데 이 초쯤 걸렸다.
함흥형무소 정문은 서쪽으로 나 있었다.
구월 하순의 오후 세 시였다. 사무실에서 소지품을 돌려받았다. 두루마기, 허리띠, 손수건, 그리고 종잇조각 두 장. 감자를 쌌던 신문지는 없었다.
문이 열렸다. 그가 나가자 뒤에서 다시 닫혔다.
길에는 아무도 없었다. 담을 따라 미루나무가 서 있고 잎이 반쯤 노랬다. 저쪽에서 자전거 한 대가 지나갔다. 형석은 잠시 서서 담을 보았다. 안에 아직 사람들이 있었다. 이윤재도 한징도 배윤식도 그 안에 있었고, 그중 누구도 오늘 나오지 않았다.
그는 걸음을 뗐다.
두루마기가 헐렁했다. 열한 달 사이에 허리가 줄어 있었다. 걸으면서 그는 손을 한 번 폈다 오므렸다. 오른손 검지와 중지 사이에 아직 붓의 감촉이 남아 있는 것 같았지만 그것은 착각이었다.
길이 내리막으로 접어들었다. 함흥 시가가 아래에 보였다. 굴뚝이 몇 개 서 있고 연기가 한쪽으로 눕고 있었다.
형석은 걸었다. 걸음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았다.
형석은 걸었다. 걸음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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