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와 사십년 제6부 밀고(密告)
32화제44장 상회(常會)
반장의 가방은 검은 인조가죽이고 손잡이 쪽이 하얗게 닳았다. 그는 그것을 마루에 올려놓고 지퍼를 열었다. 안에서 나오는 것은 늘 같은 순서다. 도장집, 인주, 서류판, 그리고 서식 묶음.
서식은 등사기로 민 것이고 뒤에 번호가 매겨져 있다. 이번 달 것은 종이가 조금 컸다.

나는 그것을 받아 들고 세로줄을 세었다.
세대주. 세대원 수. 국어상용 가정 인정 구분. 배급 등급. 궁성요배. 신사참배. 저축 실적. 근로봉사 인원 및 시간. 방공 자재 정비. 상회 출석. 전출입. 비고.
열둘이었다. 나는 지난달 것을 본 적이 없지만 어머니가 늘 들고 다니는 서식이 어떤 모양인지는 안다. 열둘이었다.
이번 것은 열넷이었다.
"반장님."
"예."
"칸이 두 개 늘었는데요."
반장은 종이를 자기 쪽으로 돌려 보고 다시 나에게 돌려주었다.
"그러네요."
"무슨 지시가 있었습니까."
"부 연맹에서 새 양식이 내려왔습니다. 지난주에요. 저는 이유는 모릅니다. 그냥 이렇게 채우라고 해서 채웁니다."
그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이 사람은 거짓말을 잘 못한다. 위에서 내려온 것을 채우는 사람에게 이유를 묻는 것은 창구에서 도장을 찍는 사람에게 법 취지를 묻는 것과 같다. 나도 사무소에서 그런 질문을 받는다. 나도 같은 대답을 한다.
기입은 반장이 한다. 각 집은 옆에 앉아 확인하고 도장만 찍는다.
그는 위에서부터 내려갔다. 붓을 쥔 손이 빨랐다. 새로 생긴 첫째 칸에 무(無), 무, 무, 무. 종이를 긁는 소리가 짧게 짧게 났다. 여덟 집이 그렇게 지나갔다.
우리 집 줄에서 그가 멈췄다.
붓끝이 종이에서 두 푼쯤 떠 있었다. 잉크가 한 방울 맺혔다가 맺힌 채로 있었다. 나는 그 방울을 봤다.
"댁은… 노인이 계시니까."
"예."
"그러면."
"예."
그는 유(有)라고 썼다. 획이 짧았다.
다음 칸으로 넘어가서는 다시 빨라졌다. 우리 집 둘째 칸에는 무라고 적혔다. 그는 나에게 도장을 내밀었고 나는 도장을 받아 내 이름을 찍었다. 야스모토. 인주가 조금 번졌다.
내 뒤로 두 집 건너에서 붓이 또 한 번 멈췄다. 도쿠야마 씨 댁이었다. 둘째 칸이었다. 그 집은 아들이 흥남에 가 있고 여름마다 사람이 드나든다. 도쿠야마 씨가 무어라 설명을 시작했는데 반장이 손을 들어 막았다.
"적기만 하는 겁니다. 적는 게 나쁜 게 아니에요."
그러고 그는 적었다.
골목을 걸어 나오면서 나는 그가 잘못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다.
그는 우리 집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없는 것을 있다고 하지도 않았다. 우리 집에는 조선말만 하는 노인이 있고 그것은 이 골목 사람이면 다 아는 일이다. 물으면 나도 그렇다고 대답한다. 어머니도 그렇게 대답한다. 거짓을 적으라고 요구할 수도 없다. 거짓을 적어 달라고 부탁하는 순간 그것은 다른 종류의 일이 된다.
그는 아무도 팔지 않았다. 칸을 채웠을 뿐이다.
그런데도 나는 골목 중간에서 한 번 걸음이 느려졌고, 느려진 것을 알아채고 다시 속도를 냈다.
우리 집 대문 앞 평상에 어머니가 나와 앉아 있었다. 삔 손목에 무명을 감고 남은 손으로 바느질감을 무릎에 놓고 있었다. 어두워서 바늘이 보일 리가 없는데도 그러고 있었다.
"끝났어요."
"응."
어머니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배급 공지도, 인정받은 집이 어디인지도, 서식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나는 마루에 앉아 신을 벗었다. 건넌방에서 할머니가 뭐라고 말하는 소리가 났다.
방에 들어가 불을 켜고 나는 오늘 본 것을 순서대로 떠올렸다. 열넷 중 앞의 열둘은 십오 년 전에도 있던 것이다. 새로 생긴 것은 두 개다.
가정 내 조선어 사용 빈도. 외부인 출입 상황.
1965년 9월 5일 · 경성 본정 다방, 그리고 재호의 기억 속 세 장소
두환이 먼저 연락을 해 온 것은 처음이었다.
사무소로 전화가 왔고, 이름을 대지 않고 본정 어디어디 다방에서 네 시, 하고 끊었다. 나는 세 시 사십 분에 갔고 그는 이미 앉아 있었다.
"종로는 아는 얼굴이 많아."
그가 말했다. 인사도 없었다. 손톱 밑에 잉크가 까맣게 끼어 있었고 그것은 씻어서 지워지는 것이 아니다. 문선공의 손이다.
이 다방은 일본인 손님이 많다. 옆자리 둘은 미쓰코시에서 나온 사람들 같았고 계속 여름 재고 이야기를 했다.
두환이 탁자 위에 책을 한 권 올려놓았다. 표지가 뜯겨 나가고 등이 갈라진 것이었다.
"인쇄소에 파지가 한 짐 들어왔는데 그 속에 있더라."
『세계최종전론』이라고 적혀 있었다. 이시와라 간지. 나는 그 책을 본 적이 없지만 이름은 안다. 총독부 도서과 목록에는 없고, 헌책방 주인들이 안쪽 상자에 넣어 두는 종류다.
두환이 아무 데나 폈다.
"들어 봐라. 도시를 해체하고 공장을 농촌으로 흩어 놓아야 최종전에서 살아남는다. 이 양반은 이걸 스물다섯 해 전에 썼다."
그가 웃었다.
"만주 만든 사람이 쓴 거다. 그리고 이 사람이 조선 사람들한테 뭐라고 했는지 아나. 동아연맹에 들어와라, 그러면 협화한다, 대등하게 한다."
"…들었다."

"대등. 좋은 말이지."
그는 책장을 넘기면서 계속 웃었다. 웃는 얼굴이 굳어 있었다. 이 사람은 웃으면서 가장 나쁜 말을 하는 버릇이 있다.
"근데 재호야. 그 사람 죽은 지가 십육 년이다. 이 책은 파지로 들어왔고. 대등하다고 써 놓은 종이가 지금 우리 인쇄소에서 표지 속지로 들어간다."
나는 잔을 놓고 손을 무릎에 얹었다.
"그 사람은 군인이었다. 우리하고 상관없는 사람이야."
"상관이 왜 없나. 너 하는 일이 그거잖아."
"…"
"제국 안에서 자리를 얻는다. 요건을 고친다. 표를 늘린다. 그게 이 책이랑 뭐가 다른데."
"다르다."
"어디가."
"이 사람은 위에서 내려 준다고 했고, 나는 밑에서 요구한다."
두환이 잠깐 나를 봤다. 그러고는 다시 웃었다.
"그래. 그건 다르네."
그 다르다는 말을 그는 위로처럼 하지 않았다. 옆에 놓아 두고 지나가는 식으로 했다.
옆자리 사람들이 계산을 하고 나갔다. 두환이 그제야 목소리를 낮췄다.
"대구 조기환이가 열흘 전에 경찰서에 다녀왔다."
나는 찻잔을 들고 있었다. 그대로 들고 있었다.
"무슨 일로."
"모른다. 하룻밤 자고 나왔단다. 아무것도 안 물었대. 물은 건 딱 하나, 서문로 인쇄소에 재고 장부가 몇 권이냐."
"…그게 다냐."
"그게 다다. 그게 다인 게 나쁜 거다."
그는 담배를 물고 성냥을 그었다. 성냥은 첫 번에 붙었다. 그는 그것을 담배로 가져가지 않고 잠깐 그대로 들고 있었다. 불이 종이 개비를 타고 내려와 손가락 쪽으로 왔다. 그는 마지막에 담배에 불을 붙이고 성냥을 재떨이에 떨어뜨렸다.
"우리 쪽 규칙이 뭔지 아나."
"…안다."
"묻지 않는다. 말하지 않는다. 이름 붙이지 않는다."
그는 재떨이를 손끝으로 조금 밀었다.
"네 해 전에 나한테 그걸 가르쳐 준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은 자기 이름도 안 가르쳐 줬다. 그런데 나는 사월에 너한테 조기환이 이름을 말했다."
"…"
"조기환이가 열여덟에 걸린 거 어떻게 걸린 줄 아나. 대구사범 아이들이 돌려 보던 회보가 하나 있었다. 등사한 거다. 『반딧불』이라고. 그게 순사 손에 들어갔다. 그것 하나다. 배신자도 없었고 밀고도 없었다."
그가 재떨이에 재를 털었다.
"그때는 종이였다."
사월이었다. 황금정 인쇄소 뒷골목. 비가 왔고 처마에서 물이 떨어졌다. 두환은 앞치마를 벗지도 않고 나와서 담배를 피웠다. 활자 냄새가 났다. 납 냄새와 기름 냄새가 섞인 것이다.
그때 그가 말했다. 대구에 조기환이라고 있다. 스물몇 해 전에 학생 때 한 번 걸렸던 사람인데 지금은 인쇄소를 한다. 조선에도 아직 그런 사람이 있다.
그는 나에게 무엇을 하라고 하지 않았다. 그냥 그렇게 말했다. 그 말을 왜 했는지는 지금도 모르겠다.
유월이었다. 도쿄. 개정안 표결을 앞둔 주였고, 정조회 사람들과 저녁을 먹고 이차로 요정에 갔다. 방이 좁고 술이 셌다. 김두석이 옆에 앉았다.
그가 취해서 말했다. 야스모토 씨, 솔직히 말해 봅시다. 조선에는 이제 아무도 없지 않습니까. 다 끝난 거 아닙니까. 우리가 이러고 다니는 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나는 그 말이 싫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 말을 하는 그 사람의 표정이 싫었다. 체념한 사람의 얼굴이 아니라 체념을 자랑하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그는 자기가 남들보다 먼저 포기했다는 것을 남들보다 먼저 안 사람의 값으로 치고 있었다.
방에는 우리 말고도 넷이 더 있었다. 그중 둘은 자고 있었고 하나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나는 술이 세지 않다. 그날은 여덟 잔쯤 마셨다.
그래서 나는 대답했다. 대답할 필요가 없었고, 아무도 나에게 대답을 요구하지 않았고, 그 방에서 그 대화를 기억할 사람도 없어 보였다.
팔월이었다. 부청 삼층 복도. 김두석이 맞은편에서 걸어왔다. 서류철을 옆구리에 끼고 있었고 걸음이 빨랐다. 나는 손을 들려고 했다. 그는 세 걸음 앞에서 창 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창밖에 볼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그대로 지나갔다. 나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돌아보면 그 사람이 걸음을 늦추는 것을 볼까 봐 그랬는지, 늦추지 않는 것을 볼까 봐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나는 내가 유월에 한 말을 정확히 기억한다.
대구에 조기환이 있습니다.
그것뿐이었다. 그 뒤에 무슨 말을 덧붙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아무것도 덧붙이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그 말을 자랑처럼 했고, 자랑처럼 했기 때문에 짧았다.
열한 글자다.
나는 그것을 속으로 다시 세어 보았다. 두 번 세었다. 두 번 다 열한 글자였다.
"두환아."
"어."
"내가."
"안다."
그는 화를 내지 않았다. 목소리도 높이지 않았다. 그편이 훨씬 나빴다. 화를 내면 나는 사과를 할 수 있고 사과를 하면 무언가 처리가 된다.
"네가 나쁜 놈이라서 그런 게 아니다. 그냥 그런 거다. 사람이 술 마시면 아는 걸 말한다. 아는 게 그것밖에 없으면 그걸 말한다."
"…"
"나도 사월에 그랬고."
'나도 사월에 그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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