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LLUSIONTOON

33화제45장 내가 한 말

· 44화 중 33화 · 3,382자 · 약 5분 · 무료

글자3 / 5

그가 일어섰다. 계산서를 집어 들고 잠깐 들여다보더니, 지갑에서 동전을 세어 탁자에 내려놓았다.

"내 거."

쇼와 사십년 33화 제45장 내가 한 말 — 헤더컷

전에는 늘 한 사람이 냈다. 누가 내는지는 그날 형편대로였고 그것을 세어 본 적이 없다.

"두환아."

"다음에 보자."

그는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갔다. 문에는 놋쇠 방울이 달려 있다. 밀 때 한 번 울리고, 문이 저절로 닫히면서 한 번 더 울린다.

두 번째 소리가 첫 번째보다 길었다.


1965년 9월 18일 새벽 ~ 9월 20일 · 종로 6정목 자택

사흘째 할머니는 계속 말을 하고 있었다.

십육일 밤부터였다. 처음에는 잠꼬대인 줄 알았다. 십칠일 낮에도 계속했고, 밤에도 했고, 십팔일 새벽 세 시가 넘어서도 하고 있었다.

건넌방은 낮에도 어둡다. 창이 담장 쪽으로 나 있어서 그렇다. 어머니가 머리맡에 등을 놓아 두었는데 심지를 낮춰서 방 안이 누랬다.

십칠일 오후에 의사가 왕진을 왔다. 종로 삼정목 병원의 조선 사람인데, 맥을 짚고 눈꺼풀을 뒤집어 보고 나서 어머니한테 국어로 말했다. 준비를 하시라는 뜻의 말을 그는 아주 짧게 했다. 어머니는 알아들었다. 어머니는 늘 알아듣는다.

준비라는 것이 무엇인지 나는 그날 처음 알았다. 부청 호적계 서식, 반장 앞 신고, 화장장 예약. 전부 종이였다.

나는 세 시 반쯤 들어가 앉았다. 할머니가 손을 뻗어서 내 손을 잡았다. 손이 가벼웠다. 마른 나뭇가지를 쥔 것 같았다.

"언년아."

내 이름이 아니었다.

"언년아, 그거 저기 놨다."

그다음은 알아듣지 못했다. 말이 아니라 소리로 들렸다. 높낮이가 있고 마디가 있는데 뜻이 붙지 않는 소리였다. 중간에 삼월이라는 것이 두 번 나왔고 봉출이라는 것이 한 번 나왔다.

나는 조선말을 반쯤 한다. 밥이니 물이니 춥다니 하는 것은 다 알아듣는다. 그런데 할머니가 지금 하는 말은 그 반 안에 들어 있지 않았다.


어머니가 들어와 반대쪽에 앉았다.

"뭐라고 하시는 거예요."

"…옛날 사람들 이름."

"언년이가 누구예요."

"나도 모른다."

어머니는 그다음부터 통역을 했다. 할머니가 한 마디 하면 어머니가 잠깐 있다가 옮겼다. 옮기지 않고 넘어가는 것이 더 많았다.

"뒤란에 뭘 묻어 놨다고 하신다."

"어디요."

"재령 집 뒤란이겠지."

"…"

"그 집이 지금 있겠니."

할머니가 또 무어라 길게 말했다. 어머니가 듣고 있다가 고개를 저었다.

"이건 나도 모르겠다."

"모르시다니요."

"말은 다 들리는데 무슨 소린지를 모르겠어. 그 동네 말인가 보다."

어머니는 1912년생이고 경기 사람이다. 시어머니와 서른다섯 해를 한집에서 살았어도 오십 년 전 황해도 재령 안골의 말은 모른다.

할머니가 무언가를 물었다. 끝이 올라갔으니 물은 것이다.

어머니가 대답했다. 조선말이었다.

나는 어머니가 조선말 하는 것을 평생 들어 왔는데도 그날은 그 목소리가 낯설었다. 어머니가 국어로 말할 때는 어미가 짧고 조심스럽다. 조선말로 말할 때는 문장이 길어지고 중간에 쉬는 자리가 다르다. 같은 사람의 목소리가 아닌 것 같았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이런 생각을 했다. 우리 집에서 할머니 말을 끝까지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은, 원래부터 한 명도 없었구나.

"어머니."

"응."

"이거 혼잣말이에요?"

어머니가 나를 봤다.

"혼잣말이지."

혼잣말. 나는 그 낱말을 안다. 알기는 아는데 입 밖에 내 본 적이 없어서, 말해 놓고 나니 내 입에서 나온 소리가 남의 소리 같았다.

들을 사람이 없는 말이라는 뜻이다.

할머니는 십오 년쯤 이 집에서 혼잣말을 해 왔다. 아버지는 늦게 들어왔고, 어머니는 삯일을 했고, 나는 도쿄에 있었고, 재숙이는 알아듣지 못했다. 우리는 할머니가 말이 없어졌다고 생각했다. 말이 없어진 것이 아니라 대답이 없어진 것이었다.


재숙이는 밤 열한 시에 퇴근해서 그대로 건넌방에 들어왔다. 교환국 제복 그대로였다.

그 애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할머니 손을 잡았다. 두 손으로 잡았다. 그러고 세 시간을 그러고 있었다.

"오빠."

"응."

"할머니 뭐라고 하셔?"

"…옛날 얘기."

쇼와 사십년 33화 제45장 내가 한 말 — 전환컷

"무슨 옛날."

"할머니 어릴 때."

재숙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다시 손을 잡았다. 그 애가 할 수 있는 것이 그것뿐이었다. 그 애는 열아홉이고 1946년생이고 조선말을 한마디도 못한다. 할머니가 그 애 이름을 조선식으로 부르면 그 애는 웃는다. 자기를 부르는 줄 모르고 웃는 것이다.

새벽에 할머니가 갑자기 또렷하게 말했다.

"재영아."

어머니의 손이 멈췄다.

재영이 형은 1954년 삼월에 연해주에서 죽었다. 열한 해 전이다. 위패에 적힌 이름은 야스모토 다케히코고, 그 이름으로 형을 부른 사람은 이 집에 하나도 없었다.

할머니는 형을 계속 불렀다. 몇 번인지는 세지 않았다.

아버지는 문지방 쪽에 앉아 있었다. 무릎 위에 손바닥만 한 공책을 놓고 연필로 무언가를 적고 있었다. 나는 아버지가 무엇을 적는지 안다. 칠월에 알았다.

낱말이다. 할머니 입에서 나오는 낱말이다.

나는 그것을 보고 있었다. 오래 보았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겠는데도 무슨 마음으로 그러는 것인지는 모르겠어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새벽 다섯 시 이십 분에 할머니가 마지막으로 말했다.

"언년아, 나 여기 있다."

그리고 여섯 시 조금 넘어서 숨이 멎었다.

라디오에서는 기념일 방송이 나오고 있었다. 스물네 해 전 오늘 개전했다는 이야기와 군가와 총독 각하의 담화 예고였다. 아버지가 일어나서 라디오를 껐다.


반장이 열 시에 왔다. 상장을 달고 왔고 문상 인사를 하고 나서 가방에서 종이를 꺼냈다.

"이걸 순서대로 하시면 됩니다."

부 연맹에서 내려온 「장의 절차 표준」이었다. 항목이 열둘이었다.

사망 신고, 이십사 시간 내. 반장 앞 통보. 인보반 조력 배정. 통야. 고별식. 조사 봉독. 분향 순서. 출관. 화장 허가증 수령. 유골 안치. 초칠일. 그리고 마지막 열두 번째.

배급 통장 세대원 정정.

전부 국어로 인쇄되어 있었다. 곡을 하라는 항목은 없었다. 곡을 하지 말라는 항목도 없었다. 그런 말은 아예 나오지 않았다.

"저희 반에 상 나면 다들 이대로 하십니다. 편하십니다."

"…예."

"아, 그리고."

반장이 조금 목소리를 낮췄다. 친절한 사람이 친절한 말을 하기 직전의 목소리였다.

"열두 번 항목 하실 때 말입니다. 세대원이 하나 빠지지 않습니까. 그러면 댁도 인정 신청이 됩니다. 제가 서류 봐 드리겠습니다."

부엌 쪽에서 어머니가 그릇을 놓았다. 놓는 소리가 났고, 그다음에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나는 반장에게 고맙다고 했다.


통야는 십팔일 밤에 했다. 반원들이 왔다가 갔고 국수를 삶았고 향이 계속 탔다. 고별식은 십구일 아침이었다. 조사는 아버지 편수과의 촉탁이 대신 읽어 주었다. 고인이 어질고 부지런하였으며 자손이 국은에 보답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국어였다. 잘 쓴 글이었다.

관이 마당을 나갈 때였다.

골목에 서 있던 히라야마 씨 댁 노파가 소리를 냈다. 아이고, 하는 소리였다. 그 소리가 두 번 나오다가 뚝 끊겼다.

아무도 그 노인에게 그만하라고 하지 않았다. 노인 스스로 입을 다물었고, 손등으로 입을 눌렀고, 그러고는 다른 사람들처럼 고개만 숙였다.

장례는 이십일에 끝났다.

절차표대로 했다. 열둘 중 열하나까지 했고 열두 번째는 아직 안 했다.

집이 조용해졌다. 원래도 조용했는데 종류가 달라졌다.

나는 밤에 내 방에 앉아 양복 안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냈다. 사무소에서 쓰는 수첩이다. 앞쪽에는 의원 일정과 전화번호와 열람 신청 접수 날짜가 적혀 있다.

뒤에서 세 번째 장을 폈다.

할머니가 마지막에 부른 이름을 적으려고 했다.

나는 그 이름을 한글로 쓸 줄 모른다. 학교에서 배운 적이 없다. 획이 몇 개인지, 어느 쪽에 무엇이 붙는지 전혀 모른다.

그래서 소리 나는 대로 적었다. 가나로 적었다.

적어 놓고 한참 들여다봤다. 그것은 이름 같지 않았다. 그냥 소리 같았다.


1965년 9월 25일 · 조선총독부 통계과 천공카드실, 경무국 보안과

천공카드실은 청사에서 가장 서늘한 방이다.

기계가 열을 내기 때문에 통풍을 세게 돌리고, 종이가 눅으면 카드가 걸리기 때문에 습기를 잡는다. 구월 말인데도 가와카미는 안에 들어서면서 팔뚝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어서 오십시오, 경부보님."

오노 통계과장이 손수건으로 안경을 닦으며 나왔다. 이 사람은 자기 방을 보여 주는 것을 좋아한다.

"오늘도 저희 애들 부려 먹으러 오셨습니까."

"신세를 지겠습니다."

방 가운데에 기계가 다섯 대 있었다. 천공기 둘, 검공기 하나, 분류기 하나, 그리고 안쪽에 제표기가 한 대. 제표기 옆구리 명판에는 독일어가 붙어 있고 그 아래 조작 요령이 국어로 다시 인쇄되어 붙어 있었다. 붙인 지 오래돼서 모서리가 말려 있었다.

"저희가 육 년 되었습니다. 처음에 카드 뚫는 데만 이 년 걸렸어요. 삼천만 장이 넘으니까요."

"국어상용 판정도 여기서 나옵니까."

"나옵니다. 세대 카드 서른한 번째 칸입니다. 전에는 부에서 사람이 하나하나 봤는데 지금은 저녁에 걸어 두면 아침에 나옵니다."

기술관은 스물 몇 살로 보이는 사내였다. 그가 배선반 앞에 서서 플러그를 꽂았다. 한 장의 카드에 구멍을 뚫을 수 있는 칸은 여든 개고, 그 여든 칸에 한 사람의 일생이 들어간다.

기술관은 스물 몇 살로 보이는 사내였다. 그가 배선반 앞에 서서 플러그를 꽂았다. 한 장의 카드에 구멍을 뚫을 수 있는 칸은 여든 개고, 그 여든 칸에 한 사…

남은 11화 · 약 41,502자 · 약 59분

내 서재

좋아요와 책갈피는 이 기기에 저장됩니다

쇼와 사십년전 44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