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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화제35장 대역란(對譯欄)

· 44화 중 26화 · 3,590자 · 약 5분 · 무료

글자3 / 5

나는 첫 권을 뒤로 넘겨 판권장을 봤다.

편찬 겸 발행 — 조선총독부 학무국. 인쇄 — 조선서적인쇄주식회사. 정가 표시는 없다. 배부품이다. 그리고 그 밑에 아무것도 없다. 편수 담당자 이름은 쓰지 않는다. 교본은 사람이 아니라 관청이 짓는 것으로 되어 있다.

쇼와 사십년 26화 제35장 대역란(對譯欄) — 헤더컷

발행 연도를 봤다. 소화 십구년.

두 번째 권을 폈다. 소화 이십삼년. 세 번째, 소화 이십팔년. 네 번째, 소화 삼십삼년.

"한 권 더 있습니까."

"작년에 온 게 있습니다." 그녀가 사물함에서 흰 표지를 꺼내 왔다. 소화 삼십팔년.

다섯 권이 나란히 놓였다. 사 년, 오 년, 오 년, 오 년. 개정 주기가 일정하다.

책등의 종이 질이 해마다 좋아졌다. 첫 권은 갱지에 가까워서 손가락에 닿으면 부스러기가 났고, 마지막 권은 표지에 광이 돌았다. 스물한 해 동안 총독부의 살림이 그만큼 나아졌다는 뜻이다. 같은 기간에 조선어를 읽고 쓰는 사람은 다섯에 하나에서 열둘에 하나로 줄었다. 나는 그 숫자를 사월에 개정안 이유서를 쓰면서 직접 표에 넣었다.

"이 마지막 권도 보셨습니까."

"제7과까지요."

나는 제7과를 폈다. 국어 문장은 스물한 해 전 것과 거의 같았다. 아버지가 연장을 고칩니다. 대역란에도 같은 자리에 같은 것이 있었다. 자귀.

편수과가 옛 판을 그대로 베껴 넘긴 것일 수도 있다. 관청 문서는 대개 그렇게 굴러간다. 앞사람이 만든 것을 뒷사람이 옮겨 적고, 아무도 처음을 다시 보지 않는다. 스물한 해쯤은 그렇게 지나갈 수 있다. 나는 그 설명이 마음에 들었고, 마음에 든다는 것이 좀 걸렸다.

걸린 자리는 하나였다. 소화 십구년 판에 실린 물고기가 네 점인데, 삼십삼년 판에는 다섯 점이다. 하나가 늘었다. 베껴 넘긴 것이라면 늘지 않는다.

나는 그 장을 두 번 봤다. 획이 촘촘한 자리라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읽지 못했다. 읽을 수가 없다. 나는 저 글자를 배운 적이 없다.

빗소리가 굵어졌다. 등사기 롤러에서 잉크가 한 방울 떨어졌다.

"다카야마 선생."

"네."

"이 자료, 어디서 받으셨습니까."


1965년 7월 6일 · 경성역 조선통운 창고 터, 황금정 4정목 고물상

관리인은 자물쇠를 두 번 돌려 열고도 문을 반쯤만 밀었다.

"안에 볼 것 없습니다."

젊은 남자는 그래도 목을 들이밀었다. 시멘트 바닥에 나무 깔판이 쌓여 있고 벽을 따라 마대가 줄지어 서 있었다. 콩깻묵 냄새가 났다.

"이 건물이 언제 지은 겁니까."

"쇼와 이십육년입니다. 저 철골이 그때 것이고요."

"그전에는요."

"목조였다고 들었습니다." 관리인은 열쇠 꾸러미를 손가락에 걸고 돌렸다. 재작년에 부산에서 올라온 사람이었고 스물아홉이었다. "저는 그때 여기 없었습니다."

"화물 대장이 남아 있겠습니까. 이십 년쯤 전 것으로."

"본사에 물으십시오. 여기는 오 년 치만 둡니다." 관리인은 문을 닫고 자물쇠를 도로 걸었다. "헐 때 나온 물건은 죄 넘어갔습니다. 임자 있는 건 임자가 찾아가고, 없는 건 고물로요."

"고물로 어디에."

"황금정입니다. 사정목 쪽에 그 장사들이 몰려 있습니다. 트럭 대고 며칠씩 실어 갔다고 하더군요."

남자는 고맙다고 하고 돌아섰다. 관리인은 그가 역 광장 쪽으로 걸어가는 것을 보다가 사무실로 들어갔다. 그날 오후에 유안 비료 이백 톤이 들어오기로 되어 있었다.


하마다 도라키치는 처마 밑에 놋그릇을 내다 널고 있었다.

장마 중에 사흘 볕이 났다. 사흘 안에 말리지 않으면 놋에 곰팡이 같은 것이 뜬다. 대야, 요강, 제기 한 벌. 제기는 조선 사람이 잡히러 온 물건인데 기한이 넘도록 찾아가지 않았다.

가게 안쪽에 재봉틀 세 대와 괘종시계 넷이 있었다. 시계는 하나만 갔다. 나머지 셋은 태엽을 감아도 삼십 분을 못 넘긴다.

"이 미싱 얼마요."

조선 사람이었다. 오십 줄에 국민복 웃옷만 걸쳤다.

"팔십 엔입니다."

"발판이 헐거운데."

"헐거우니까 팔십입니다. 성한 건 백이십 받습니다."

"칠십에 합시다."

"칠십오 하십시오. 기름 쳐서 드리겠습니다."

사내는 손등으로 이마를 훔치고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 다 국어로 말했다. 하마다는 경성 남산정에서 났고 예순넷이 되도록 내지에는 세 번 가 봤다. 조선말은 흥정에 쓸 만큼은 알아듣지만 쓰지 않는다. 쓰면 상대가 값을 더 깎으려 든다.

미싱을 지게에 얹어 보내고 나니 열한 시였다.

그때 젊은 남자가 들어왔다.


여름 양복에 넥타이를 맸다. 고물상에 그런 차림으로 오는 사람은 대개 물건을 팔러 오지 사러 오지 않는다. 그런데 손에 아무것도 없었다.

"뭘 찾으십니까."

"구경 좀 하겠습니다."

남자는 재봉틀을 지나고 시계를 지나 안쪽으로 들어갔다. 놋대야를 한 번 들었다 놓고, 궤짝 위에 얹힌 저울추를 만졌다. 물건을 보는 손이 아니었다. 물건이 놓인 자리를 보는 손이었다.

"이 댁이 전에는 활자를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하마다는 놋그릇을 뒤집던 손을 멈추지 않았다.

"누가 그럽디까."

쇼와 사십년 26화 제35장 대역란(對譯欄) — 전환컷

"이 골목 세 집을 들렀습니다. 두 번째 집에서 그러더군요. 사정목 하마다 씨가 옛날에 주조소를 했다고."

"했지요. 스물몇 해 됩니다."

"인쇄소 물건이 들어오는 일이 있습니까."

"어떤 걸 말씀하시는 겁니까."

"활자라든지."

하마다는 놋대야를 널판 위에 엎어 놓았다. 소리가 한 번 났다.

"활자는 안 삽니다."

"안 사십니까."

"납은 근으로 사는데 활자는 섞인 게 많습니다. 안티몬이 들었고 주석이 들었고, 도가니에 넣으면 뜨는 것도 있고 가라앉는 것도 있어요. 골라내는 품이 더 듭니다." 그는 앞치마에 손을 닦았다. "그래서 안 삽니다. 값이 안 나옵니다."

거짓말은 하나도 없었다. 그는 활자를 사지 않는다.

남자는 잠깐 서 있었다. 무엇을 더 물어야 할지 모르는 얼굴이었다. 하마다는 그 얼굴을 여러 번 봤다. 팔러 오는 사람들이 값을 부르기 전에 짓는 얼굴이다.

"혹시 조선 글자 활자는요."

"그런 건 조선에 없습니다." 하마다가 말했다. "쇼와 십구년에 다 회수됐습니다. 관에서 걷어 갔어요. 저희도 냈습니다."

"…예."

남자가 명함을 내밀었다. 하마다는 두 손으로 받아 앞치마 주머니에 넣고 보지 않았다.

"수고하셨습니다."

남자는 인사를 하고 나갔다. 문틀에 매단 방울이 두 번 울렸다.


하마다는 뒷마당으로 나갔다.

수돗가에 대야가 엎어져 있고 그 옆에 장독이 셋. 담 밑으로 한 평 반쯤 되는 맨땅이 있다. 비가 사흘 왔다가 그쳐서 흙이 눅눅했다.

그는 그 자리를 지나가면서 오른발로 흙을 한 번 눌렀다. 걸음을 멈추지 않았고 내려다보지도 않았다. 이십일 년째 하는 것이라 이제는 발이 알아서 한다.

밑에 궤짝이 열한 개 있다.

쇼와 십구년 이월에 회수 명령서가 왔다. 보유 활자 전량, 자모 전량, 종별과 호수를 적어 신고한 뒤 지정일에 용해할 것. 입회는 부 산업과에서 나온다고 되어 있었다. 그는 신고서를 썼다. 사호 활자 몇 관, 오호 활자 몇 관, 자모 몇 벌. 숫자는 정직하게 적었다.

지정일 아침에 그는 도가니에 불을 지피지 않았다.

입회하러 온 사람은 스물몇 살 먹은 서기였고, 마당에 쌓인 납덩이 무더기를 보고 도장을 찍고 갔다. 그 납은 활자가 아니라 인쇄소들에서 나온 지형과 연판 부스러기였다. 무게만 맞으면 되었다. 관청은 무게를 적지 종류를 적지 않는다.

왜 그랬느냐고 물으면 그는 대답하지 못한다.

값 때문은 아니었다. 그해 납값은 쌌고 지금은 더 싸다. 조선말을 아껴서도 아니다. 그는 조선말로 된 것을 평생 한 줄도 읽지 않았다.

기억나는 것은 하나뿐이다. 오호 한글 자모 한 벌을 아버지 대에 각자공 노인이 깎았다. 초성 중성 종성을 따로 새겨 붙이는 방식이라 벌 하나를 채우는 데 사 년이 걸렸다. 노인은 눈이 어두워질 때까지 그것을 하다가 소화 팔년에 죽었다. 녹이면 사 년이 없어진다. 그것은 이유가 아니라 그냥 사실이다. 사실은 이유보다 오래간다.

그는 광에서 삽을 꺼내지 않고 그대로 가게로 들어갔다.


아들이 저울을 닦고 있었다. 스물아홉이고 조선에서 나서 조선에서 자랐다.

"아까 그 사람 뭡니까."

"의원 비서관이란다." 하마다는 앞치마 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내 유리 밑에 밀어 넣었다. "윤 아무개 의원 사무소."

"뭘 찾는답니까."

"안 물어봤다."

아들이 걸레를 접었다. "물어보지 그러셨습니까. 관에서 나온 사람이면 일이 될 수도 있는데요."

하마다는 계산대 앞에 앉아 주판을 끌어당겼다.

"또 오거든 없다고 해라."

"아버지가요, 물건이요."

하마다는 주판알을 위로 한 번 밀어 올렸다가 아래로 털었다.

"둘 다."

아들은 더 묻지 않았다. 이 집에서는 원래 두 번 묻지 않는다.

해가 기울면서 처마 밑 놋그릇에 볕이 옮겨 붙었다. 하마다는 그것들을 걷어 들이려고 다시 밖으로 나갔고, 대야를 안고 돌아오는 길에 담 밑 맨땅을 지났다.

이번에는 걸음을 한 번 멈췄다. 그러고는 아까와 같은 자리를 같은 발로 밟았다. 흙이 조금 더 단단해져 있었다.


1965년 7월 15일 · 경성 교외 사릉(思陵) 근처, 이광수 자택

사릉역에서 내린 사람은 나까지 넷이었다.

객차가 둘뿐인 열차였다. 청량리에서 한 시간 십 분. 창을 열어 두었더니 소나기가 지나간 뒤의 풀냄새가 들어왔고, 무릎 위 서류 봉투가 눅눅해졌다. 봉투 안에는 윤 의원의 소개장 한 통과 봉축 사업 자문 의뢰서 사본이 들어 있었다.

역에서 논둑을 따라 이십 분을 걸었다. 능 쪽으로 소나무가 검게 서 있고, 그 아래로 초가와 함석지붕이 섞여 있었다. 물어물어 찾은 집은 낮은 흙담에 나무 대문이었다. 문패는 없었다.

늙은 여자가 문을 열었다.

"어디서 오셨소."

조선말이었다. 나는 명함을 내밀었다.

여자가 명함을 두 손으로 받아 들고 안으로 들어갔다. 마당에 고추가 심겨 있고 그 옆에 함지박이 엎어져 있었다. 매미가 울었다. 능 쪽에서 우는 것이라 소리가 멀고 두꺼웠다.

"들어오시라우."

마루에 노인이 앉아 있었다.

마루에 노인이 앉아 있었다.

남은 18화 · 약 66,921자 · 약 1시간 3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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