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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화제34장 아버지의 밤

· 44화 중 25화 · 3,645자 · 약 5분 · 무료

글자3 / 5

수위 노인이 야근 신고부를 내밀었다. 예순은 넘어 보이는 조선 사람인데 말은 국어로만 한다.

"오늘도 늦으십니까."

쇼와 사십년 25화 제34장 아버지의 밤 — 헤더컷

"교본 넘길 게 남아서."

"불 조심하십시오. 서고 쪽은 창을 못 여니까."

노인이 열쇠 꾸러미에서 하나를 골라 주었다. 스물다섯 해 동안 수위는 네 번 바뀌었고, 아무도 그에게 무엇을 하느냐고 묻지 않았다. 청사에서 밤늦게까지 남는 관리는 흔하다. 편수과는 특히 그렇다. 학기가 바뀔 때마다 교본을 고쳐야 하고, 고칠 것은 늘 있다.

서고 제3열은 폐기 예정품과 미분류 압수품을 놓는 자리다. 통풍이 나빠 종이가 상하기 때문에 쓸 만한 것은 여기 두지 않는다. 갓 씌운 전등 하나가 통로 가운데 매달려 있고, 스위치를 올리면 상자 옆면부터 밝아진다.

상자는 스무 개다. 마분지가 아니라 나무 궤짝이고, 옆면에 붓으로 쓴 압수 번호가 여섯 자리씩 있다. 번호는 스물이 다 같고 뒤에 붙은 가지번호만 다르다. 봉인지는 1943년에 한 번 떼어졌다가 다시 붙었고, 그 뒤로 아무도 손대지 않았다. 함흥에서 경성으로 돌아온 뒤로는.

그는 여덟 번째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원고지가 나왔다. 이백 장씩 묶인 것이 열두 뭉치. 스물세 해 전에 그가 자기 손으로 묶은 매듭이다.

표제어 하나에 한 장. 뜻풀이와 용례가 그 아래 붙는다. 그는 뭉치를 무릎에 올려놓고 한 장씩 넘겼다. 넘기는 속도가 일정했다. 어떤 장에서는 멈추고, 멈추면 펜을 들었다.

멈추는 자리는 두 가지다.

죽은 낱말과 새로 생긴 낱말.

죽은 낱말에는 표제어 왼쪽 위에 작은 점을 찍는다. 지우지 않는다. 그는 스물다섯 해 동안 한 낱말도 지운 적이 없다. 다만 점을 찍는다. 지금 이 낱말을 아는 사람이 몇 살 위로만 남아 있다는 표시다.

이 밤에만 점을 열한 개 찍었다. 베틀에 딸린 부품 이름 넷, 상례에 쓰는 말 셋, 물레방아의 부분을 가리키는 말 둘, 그리고 어린아이를 어를 때 쓰던 소리 둘. 마지막 둘에서 그는 잠깐 멈췄다. 자기 어머니가 재호에게 하던 소리였다. 어머니는 아직 살아 있으니 점을 찍는 것은 이른 일이지만, 이 낱말을 그 뒤로 발음한 사람을 그는 알지 못한다. 점을 찍었다.

새로 생긴 낱말은 뒷장 여백에 쓴다. 배급 통장. 인정증. 상회. 천공. 이런 것들은 조선말이면서 조선말인 적이 없던 말이다. 그래도 쓴다. 쓰지 않으면 나중에 이 시절의 문장을 읽을 수가 없게 된다.

용례를 고쳐야 하는 것도 있다. 스물세 해 전에 그가 쓴 용례에는 신문 이름이 들어 있고 학교 과목 이름이 들어 있고 라디오 제2방송이 들어 있다. 그런 것들은 지금 조선에 없다. 그는 옛 용례 옆에 새 용례를 나란히 적었다.

두 글씨가 나란히 놓였다.

스물세 해 전의 획은 가늘고 끝이 날카롭다. 그때는 촉이 가는 펜을 썼고, 손목이 종이에서 떠 있었다. 오늘의 획은 굵고 끝이 뭉툭하고, 세로획이 아래로 갈수록 조금씩 왼쪽으로 밀린다. 오른손 새끼손가락 아래가 저리기 시작한 것이 재작년부터다.

같은 사람의 글씨로 보이지 않았다. 그는 그것을 확인하듯 두 줄을 나란히 오래 보았고, 그러고는 다음 장으로 넘어갔다.


밤 한 시가 지나서 그는 열여섯 번째 상자 앞으로 갔다.

뚜껑을 열었다. 안이 비어 있다.

바닥에 원고지 부스러기가 조금 있고 먼지가 얇게 앉아 있다. 상자 옆면에는 여섯 자리 번호가 다른 것들과 똑같이 붓으로 쓰여 있다. 봉인지도 붙어 있다. 목록상 이 상자에는 시옷에서 이응 앞까지가 들어 있어야 한다.

그는 손을 넣어 바닥을 한 번 쓸었다. 먼지가 손끝에 묻었다. 부스러기 하나를 집어 등불에 대 보았다. 원고지 귀퉁이의 붉은 인찰선이 반쯤 남아 있고 글자는 없다.

시옷에서 이응 앞까지는 세 뭉치가 넘는다. 사람이 하루에 옮길 수 있는 부피가 아니다. 그것을 옮긴 사람은 스물세 해 전 함흥에서 화물 목록에 손을 댈 수 있는 자리에 있었고,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의 수는 많지 않다. 그는 그 계산을 여러 해 전에 끝냈다.

그러고는 뚜껑을 도로 덮었다. 안쪽에 연필로 오늘 날짜를 적고, 날짜 옆에 두 글자를 적었다. 回收. 그 밑에는 아무것도 적지 않았다. 이 상자 안쪽에는 스물다섯 해 치의 날짜가 층층이 적혀 있고, 두 글자는 매번 같다.

그는 그 앞에 한참 서 있었다. 전등이 낮은 소리로 울었다.


새벽 세 시에 그는 상자를 전부 원래 자리에 놓고, 열의 간격을 손으로 맞추고, 스위치를 내렸다.

복도 끝 세면대에서 손을 씻었다. 손톱 밑에 먹과 잉크와 삼십 년 묵은 종이의 가루가 낀다. 비누는 없다. 그는 손목까지 물을 올려 두 번 문지르고, 손등을 뒤집어 한 번 더 보고, 다시 물을 틀었다.

수위 노인이 신고부에 퇴청 시각을 적어 주었다. 세 시 십분. 노인은 숫자를 적으면서 하품을 했고, 아무 말도 묻지 않았다. 스물다섯 해 동안 아무도 묻지 않은 것이 그가 가진 것의 전부다.

밖은 아직 어두웠다. 광화문통 정류장에는 아무도 없었다. 첫 전차는 다섯 시에 온다.

집까지는 걸어서 사십 분이다. 걸으면 다섯 시 전에 닿고, 마당을 지날 때 발소리가 난다. 아내는 그 소리에 깬 적이 없다고 하지만 깨어 있다는 것을 그는 안다. 전차를 타면 집 앞 골목에 여섯 시에 닿는다. 그 시각이면 물 긷는 소리가 이미 나 있어서 발소리가 묻힌다.

그는 벤치에 앉지 않고 선 채로, 젖은 손을 바지 옆에 늘어뜨리고, 물이 마르기를 기다렸다.


1965년 6월 30일 저녁 · 경성 앵정국민학교 숙직실

숙직실 문을 열자 등사 잉크 냄새가 먼저 나왔다.

원지와 아교와 알코올이 섞인 냄새다. 벽에 등사기가 놓여 있고 롤러에 아직 젖은 잉크가 묻어 있었다. 창밖은 장맛비였다. 운동장 조회대 밑에 물이 고여 검게 번들거렸다.

다카야마 훈도는 숙직 근무표에 이름이 올라 있는 날이라고 했다. 사흘 전에 의원 사무소로 전화가 왔다. 잠깐 봐 주실 것이 있습니다, 그 한마디뿐이었고 무엇인지는 말하지 않았다.

책상 위에 교본이 네 권 펼쳐져 있었다. 표지가 얇고 색이 다 다르다. 갈색, 회색, 다시 갈색, 그리고 거의 흰 것.

"앉으십시오." 그녀가 자기 방석을 내주고 자기는 걸상에 앉았다. "일주일 걸렸습니다."

"뭘 하셨습니까."

"처음부터 봤습니다. 제1과부터."

쇼와 사십년 25화 제34장 아버지의 밤 — 전환컷

"전부요?"

"네 권 다요." 그녀는 그것이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얼굴이었다. "저는 이 말을 모릅니다. 아는 사람은 대충 보고 넘기겠지만 저는 대충이 안 됩니다. 왼쪽 국어 문장에 든 낱말이 오른쪽에 몇 개 있는지 세면서 봤습니다."

"세면서요."

"네."


붉은 연필 자국이 스물세 군데였다. 그녀가 첫 장을 폈다.

"제7과입니다. 국어 문장은 이렇습니다. 아버지가 연장을 고칩니다. 그런데 오른쪽에는……"

그녀가 대역란에 손가락을 얹고 소리 내어 읽었다. 발음이 조심스러웠다. 자모를 하나씩 붙여서 소리로 만드는 사람의 읽기였다. 사범학교에서 두 학기 언문 자모를 배웠다고 했다.

"아버지가……자귀를……고칩니다."

"자귀." 나는 되뇌었다. 아는 말이다. 나무 깎는 연장이다. 어릴 때 할머니가 그 말을 쓰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연장입니다. 도끼처럼 생겼는데 날이 가로로 붙었습니다."

"국어 문장에는 연장이라고만 되어 있습니다." 그녀가 왼쪽을 손톱으로 짚었다. "연장이라는 말은 오른쪽에도 그대로 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오른쪽에는 없고 자귀가 있습니다."

"번역이란 게 원래……." 나는 말을 멈췄다.

"그런 겁니까?"

"보통은 그렇습니다. 말을 옮기면 어긋납니다."

"스물세 번 어긋납니다." 그녀가 다음 장을 폈다. "그리고 어긋난 쪽에 있는 낱말이 전부 한 종류입니다."


그녀가 하나씩 읽었다. 나는 듣기만 했다.

따비. 씨아. 홈대패. 물레의 부분 이름 둘. 그리고 물고기가 넉 점 — 도루묵, 열목어, 꺽지, 밴댕이. 병 이름이 셋 — 학질, 다래끼, 고뿔. 뒤쪽 두 권에서는 장례에 쓰는 말이 나왔다. 널. 상제. 그리고 사람이 죽으면 지붕에 올라가 부른다는 소리 하나.

읽는 데 한 시간이 걸렸다. 그녀는 한 번도 급하게 넘기지 않았다.

내가 아는 말이 열일곱이었다. 여섯은 몰랐다.

"이건 뭡니까." 씨아를 읽고 나서 그녀가 물었다.

"목화에서 씨를 빼는 겁니다." 그건 알았다.

"이건요."

밴댕이 다음에 나온 것이었다. 나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모르십니까."

"들어는 봤습니다."

"뜻은요."

"모릅니다."

그녀는 그 자리에 붉은 연필로 작은 동그라미를 쳤다. 야스모토 씨도 모름, 이라고 옆에 적지는 않았지만 적은 것과 같았다. 나는 그 동그라미를 보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상한 것은 열일곱 쪽이었다. 나는 그 낱말들을 다 안다. 안다는 것은 소리를 들으면 뜻이 따라온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나는 이 교본을 지금까지 여러 번 봤으면서, 대역란에 자귀가 있든 연장이 있든 걸린 적이 없다. 눈으로 훑을 때 그것은 그냥 조선말이었다. 조선말은 원래 학교에서 배운 것이 아니고 집에서 주워들은 것이니 정확할 리가 없다고, 나는 그렇게 정리해 두고 살았다.

그녀는 한 낱말도 모르기 때문에 하나하나를 세어야 했다. 그래서 봤다.

"왜 이런 게 들어 있습니까." 그녀가 물었다.

"모르겠습니다."

"학교에서 쓸 자료입니다. 아이가 이걸 소리 내서 읽습니다. 뜻도 모르고요."

"그렇겠지요."

"이런 말을 아이가 알아서 뭘 합니까. 국어를 가르치려고 만든 책 아닙니까."

그녀가 걸상을 조금 뒤로 밀었다.

"그런데 하나가 겹칩니다."

"뭐가요."

"우리 반 아이 말입니다. 두 달째 말 안 하는 아이. 오월에 한 번 뭐라고 했습니다. 저한테 한 게 아니라 혼자서요. 저는 못 알아들어서 소리 나는 대로 수첩에 적어 뒀습니다."

그녀가 수첩을 폈다. 가나로 적힌 다섯 글자였다. 나는 그것을 두 번 읽고 나서야 그게 무슨 소리인지 알았다. 조금 전에 그녀가 읽은 스물세 개 중 하나였다. 물고기 이름이었다.

"그 애 어머니가 함경도에서 왔다고 들었습니다." 그녀가 수첩을 덮었다. "저는 이 아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알 방법이 이 책밖에 없습니다."

'그 애 어머니가 함경도에서 왔다고 들었습니다.' 그녀가 수첩을 덮었다. '저는 이 아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알 방법이 이 책밖에 없습…

남은 19화 · 약 70,511자 · 약 1시간 4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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