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전 제7부 정지(停止)
39화제55장 나흘 뒤
나가는 길에 상황판 앞에 섰다.
판은 벽 하나를 다 쓴다. 아래에서 조명이 올라와서 뒤에서 종이를 비춘다. 부대 부호가 자석으로 붙어 있고, 그중 하나가 파란 직사각형에 흰 글자다.

그는 그것을 오래 봤다.
지난 1월에 그는 이 마크를 손에 들고 선 아래에서 선 위로 옮겼다. 선은 검은 실선이고 폭이 1밀리쯤 됐다. 그때 그는 그것이 종이 위에서 아무 힘도 안 든다고 생각했다.
이제 그 마크는 다시 아래로 내려와 있지 않았다. 신평 부근에 붙어 있었다.
그는 손을 뻗지 않았다.
벽 옆의 스위치를 내렸다.
판이 꺼졌다. 방이 어두워졌는데 눈앞에는 판이 아직 남아 있었다. 밝던 자리가 어둡고 어둡던 자리가 밝았다. 부대 부호들이 검은 네모로 떠 있었다. 그중 어느 것이 파란 것이었는지 그 잔상에서는 구별되지 않았다.
그는 그것이 옅어질 때까지 서 있었다.
2011년 10월 ~ 11월 · 황해북도 → 개성 → 파주 → 인천
길이 막혀서 우리는 갓길로 갔다.
차가 막은 게 아니라 사람이 막았다. 도로 한가운데를 사람들이 걸어가고 있었고 우리 트럭은 그 옆을 사람 걸음보다 조금 빠르게 갔다. 그러다가 결국 못 가서 내렸다. 내려서 걸었다.
사흘 걷고 하루 탔다. 그러고 또 걸었다.
사람들은 두 방향으로 갔다.
북에서 남으로 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짐이 많고 걸음이 느리다. 남에서 북으로 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쪽은 짐이 적고 걸음이 빠른데 얼굴을 잘 안 든다. 그리고 어느 쪽으로도 안 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 사람들은 길가에 앉아 있었다. 앉아서 지나가는 걸 봤다.
앉아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노인이었다. 짐이 있는 사람도 있고 없는 사람도 있었다. 한 사람은 신발을 벗어서 무릎에 올려놓고 있었다. 신발 바닥이 다 닳아서 안이 비쳤다.
그 사람들이 왜 앉아 있는지 나는 물어보지 않았다. 다리가 아파서 앉은 건지, 갈 데를 정하는 중인지, 아니면 정할 게 없어서 앉은 건지 모르겠다. 지나가면서 보면 다 똑같이 앉아 있다.
우리는 가운데로 갔다. 우리도 어느 쪽인지 모르겠다.
이틀째에 여자가 나한테 물었다.
애를 업고 있었다. 애는 자고 있었고 여자는 발이 젖어 있었다. 걷다가 우리 쪽으로 두 걸음 와서 말했다.
"저 앞에 밥 줍네까."
말투가 달랐다. 나는 한 박자 늦게 알아들었다.
"…앞에 집결소가 있습니다."
"거기서 밥 줍네까."
"모르겠습니다."
여자는 고개를 끄덕이고 두 걸음 물러났다. 그러더니 다시 왔다.
"군인 동무, 거기 가면 밥이 있습네까."
같은 말이었다. 대답을 바꾸면 사실이 바뀔 것처럼 물었다.
"…있을 겁니다."
없을 수도 있는데 그렇게 말했다. 여자는 그 말을 듣고 갔다. 나는 그 여자가 걸어가는 걸 한참 봤다. 애 신발 한 짝이 벗겨져서 발목에 걸려 있었는데 그 말은 못 했다.
한길이가 옆에서 물었다.
"거기 밥 있습니꺼."
"모른다."
"모르는데 있다 캤습니꺼."
"그래."
한길이는 더 안 물었다.
개성은 지나가기만 했다.
들어간 게 아니라 옆으로 돌았다. 멀리 건물이 보였고 굴뚝에서 연기가 났다. 어디는 무너졌고 어디는 안 무너졌다. 안 무너진 데가 더 많았는데 그게 이상해 보였다. 나는 그때까지 무너진 것만 봤다.
임진강에 온 건 시월 말이었다.
다리 위에서 우리는 두 줄로 섰다. 헌병이 세었다. 앞에서 뭘 확인하느라 십 분쯤 서 있었고, 나는 난간 쪽으로 붙었다.
물이 아래에 있었다.
넓지 않았다. 색이 흐리고, 가운데가 빨랐다. 강물은 바다하고 다르다. 바다는 어디로 가는지 모르겠는데 강은 어디로 가는지가 보인다.
아버지 생각을 했다.
우리 아버지는 배를 탔고 바다에서 죽었다. 물에서 죽은 사람 아들이 물을 무서워하냐고 누가 물으면 나는 아니라고 대답한다. 진짜로 아니다. 나는 물이 무섭지가 않다. 무서운 건 물이 아니라 배가 안 돌아오는 거다.
여기 물은 저 아래로 가서 바다로 갈 거다. 바다로 가면 다 섞인다.
"오 병장님, 갑니다."
줄이 움직였다. 나는 난간에서 손을 뗐다. 쇠가 차가워서 손바닥에 자국이 남았다.
다리를 건너는 데 사 분 걸렸다. 세지는 않았는데 대충 그쯤이었다.
한길이는 시월에 갔다.
파주에서 서류가 나왔고 그놈이 먼저 됐다. 부산 간다고 했다. 삼촌이 용접 일을 하는데 거기 붙어서 배운다고 했다.
"오 병장님도 곧 나오시지예."
"십일월이다."
"연락하이소."
"번호가 있어야 하지."
그놈이 종이 쪼가리에 번호를 적어 줬다. 자기 집 번호랑 삼촌 가게 번호랑 두 개를 적었다. 적으면서 볼펜이 안 나와서 두 번 그었다.
우리는 악수를 했다. 그게 다였다. 그놈은 뒤도 안 돌아보고 갔는데 십 미터쯤 가서 손을 한 번 들었다. 등을 보인 채로 들었다.
소대장님은 십일월 초에 봤다.
파주 임시 주둔지였다. 그 사람은 아직 남아 있었다. 부대가 반으로 갈려서 반은 내려가고 반은 위에 남는데 그 사람은 남는 쪽이었다.
천막 밖에서 만났다. 그날은 바람이 셌다.

"나온다며."
"예."
"날짜 언제야."
"십사일입니다."
"그러네."
우리는 한참 서 있었다. 그 사람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가 뺐다. 담배를 찾은 것 같은데 안 꺼냈다.
"나가서 뭐 할 거야."
"모르겠습니다."
"그래."
"소대장님은요."
"나도 모른다." 그가 말했다. "규정집에 그건 없더라."
나는 웃었다. 웃은 게 그날 처음이었는지 어땠는지는 모르겠다.
그 사람이 종이에 뭘 적어서 줬다. 번호였다.
"오 병장."
"예."
"나중에 물어볼 거 생기면 나한테 물어라."
나는 그 종이를 봤다. 무슨 말인지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았다.
"지금 물어보면 안 됩니까."
"지금은 안 된다."
"언제 됩니까."
"몰라." 그 사람이 말했다. "근데 언젠가 될 거다. 그때 물어라."
전역 신고는 십일월에 했다.
인천이었다. 컨테이너로 만든 임시 사무실이었고 안에 책상이 셋 있었다. 나는 문 앞에서 모자를 고쳐 쓰고 들어갔다.
원래는 이런 게 아니다. 원래는 부대에서 하고, 도열을 하고, 지휘관이 악수를 하고, 사진을 찍는다. 나는 그걸 다른 사람 것으로 두 번 봤다.
그날은 그런 게 없었다.
행정 담당관이 서류를 넘겨봤다. 세 장이었다.
"오태석 병장."
"예."
"여기하고 여기 서명."
나는 서명했다.
그 사람이 도장을 찍었다. 도장은 세 번 찍혔다. 첫 번째는 인주가 많이 묻어서 번졌고, 두 번째는 옅었고, 세 번째는 괜찮았다. 그 사람이 종이를 들어서 후 불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예."
그게 다였다. 나는 서류를 받아서 봉투에 넣었다. 봉투가 서류보다 커서 안에서 헐거웠다.
밖에 나와서 문을 닫았다. 문이 컨테이너 문이라 소리가 컸다.
누가 나한테 무슨 말을 해 줄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었다. 그런데 아무 말도 없으니까 잠깐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다음에 뭘 해야 하는지를 아무도 안 알려 줬다. 삼 년 동안 그걸 알려주는 사람이 항상 있었다.
부두에는 걸어서 갔다.
한 시간쯤 걸렸다. 옷은 아직 그대로였다. 갈아입을 게 없었다.
매표소 유리에 종이가 붙어 있었다. 항로 이름이 여러 개 적혀 있고 그중 몇 개는 가로줄이 그어져 있었다. 안 그어진 것도 있었다.
배가 한 척 대어 있었다.
크지 않았다. 흰색이었는데 아래쪽이 녹물로 붉었다. 사람은 안 탔다. 갑판에 사람 둘이 있었고 뭘 하는지는 안 보였다.
나는 안벽 끝까지 갔다.
배가 흔들렸다. 물이 오르내리니까 배도 오르내리는데, 배가 큰 것보다 훨씬 작게 움직였다. 계류줄이 팽팽해졌다가 늘어졌다가 했다. 늘어질 때 줄이 물에 닿았다.
가을 바다 냄새가 났다. 여름 냄새하고 다르다. 여름은 비린데 가을은 차고 짜다. 목포에서 맡던 것하고 여기 것도 조금 다르다. 뭐가 다른지는 말을 못 하겠다.
나는 오른쪽 귀로 물소리를 들었다.
배가 안벽에 닿았다 떨어졌다 하면서 나는 소리가 있다. 낮고 둔한 소리다. 그게 일정하지가 않다. 셀 수가 없다.
나는 서서 그걸 들었다.
2011년 12월 ~ 2012년 3월 · 인천
짐을 푸는 데 십오 분이 걸렸다.
가방은 하나였다. 옷이 반이고 나머지는 세면도구하고 종이였다. 전역증, 병원에서 준 것 몇 장, 통장. 라이터가 하나 있었는데 그건 가방에서 꺼내지 않고 그냥 주머니에 넣었다. 삼월에 받은 거다.
방은 두 평이 안 됐다. 창을 열면 옆 건물 벽이 있고 벽하고 창 사이가 팔뚝 하나 길이쯤 됐다. 그 틈으로 빛이 조금 들어왔다. 벽지는 밑에서부터 십 센티쯤 색이 달랐다. 언젠가 물이 찼던 자리다.
주인 아주머니가 이불을 들고 올라왔다.
"보일러는 아홉 시에 끄니까 그전에 씻어."
"예."
"군인이었어?"
"예."
"어디."
"연평도요."
아주머니가 이불을 방바닥에 놓고 손으로 두 번 눌렀다. 뭐라고 하려다 안 했다. 나가면서 문을 닫는데, 잡아당기다가 마지막에 소리가 안 나게 살살 닫았다.
첫날 밤에는 잠이 안 왔다.
조용해서 그런 게 아니고 소리가 한쪽에서만 와서 그랬다. 오른쪽으로 누우면 아무것도 안 들리고, 왼쪽으로 누우면 다 들렸다. 위층에서 누가 걸어 다니고, 어디서 물 내려가는 소리가 나고, 새벽 두 시쯤에는 골목으로 차가 한 대 들어왔다가 후진해서 나갔다. 나는 왼쪽으로 누워서 그걸 다 들었다.
병실에서는 사람이 많아서 몰랐던 거다. 혼자 있는 방은 처음이었다.
병실에서는 사람이 많아서 몰랐던 거다. 혼자 있는 방은 처음이었다.
남은 5화 · 약 17,110자 · 약 2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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