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전 제6부 세계
32화제45장 광장
워싱턴의 그 방에는 지도가 두 장 걸려 있었다.
같은 벽이었다. 왼쪽이 반도, 오른쪽이 지중해 남쪽 해안이었다. 지도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그 자리에 누가 포스트잇을 하나 붙여 두었다. 회의실 예약 번호가 적혀 있었다.

로라 벤슨은 오전 회의와 오후 회의에 다 들어갔다. 참석자 명단이 열둘 중 아홉이 겹쳤다. 오전에는 반도의 항구와 소개민 숫자를 다루었고, 오후에는 나일강 삼각주의 도시들을 다루었다. 자료를 만드는 사람도 같았고, 복사기도 같았고, 회의가 길어지면 시켜 먹는 샌드위치 가게도 같았다.
한 번은 그녀가 오후 회의에 오전 자료를 들고 들어갔다. 반쯤 읽고서야 알아차렸다. 아무도 지적하지 않았다. 다들 자기 앞의 종이를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책상 뒤 벽에 시계가 세 개 걸려 있었다. 워싱턴, 서울, 카이로. 그녀는 첫 주에 그것을 보고 계산을 해 보고 그만두었다. 카이로가 밤이 될 때 서울은 새벽이고, 서울이 조용해질 때 카이로가 깬다. 그 사이에 그녀가 잘 수 있는 시간이 없었다.
국무장관이 방에 들어온 것은 목요일 오후였다. 서서 들었고, 앉지 않았다.
"이집트 쪽 우리 사람 몇이나 남아 있죠."
담당관이 숫자를 말했다.
"공관 말고. 현장 나가는 사람요."
담당관이 다시 숫자를 말했다. 아까보다 훨씬 작았다.
국무장관은 그 숫자를 받아 적었다. 그러고는 왼쪽 지도를 한 번 보았다.
"저쪽 카운터파트하고 통화가 오늘 세 번이었나요."
"네 번입니다."
"오늘 밤에 한 번 더 있습니다." 그녀는 문 쪽으로 가다가 돌아서서 덧붙였다. "이 방 예약은 계속 잡아 두세요. 두 개 다요."
3월의 회의는 목록으로 시작했다.
국방부 지역 담당이 종이를 읽었다. 순항미사일 잔량. 전자전기 대수. 공중급유기의 하루 가능 소티. 정찰 자산의 위성 통과 시간. 항목마다 옆에 현재 위치가 붙어 있었고, 그 칸에는 같은 지명이 반복해서 적혀 있었다.
"북아프리카에 필요한 게 뭔지는 다들 아십니다." 그가 말했다. "첫 사흘은 방공망을 눌러야 합니다. 그러려면 전자전이 필요하고, 전자전기를 띄우려면 급유기가 필요합니다."
"그게 몇 대 필요합니까." 누가 물었다.
그는 대답 대신 목록의 세 번째 항목을 손톱으로 짚었다.
"여기 적힌 게 지금 서해 위에 있습니다. 저기서 빼면 저기가 빕니다."
"급유기를 빌려주는 것도 안 됩니까." 다른 쪽에서 물었다.
"빌려주면 그 소티만큼 저기서 못 뜹니다. 지금 서해에서 하루에 몇 번 뜨는지 아십니까. 그 숫자가 이미 계획보다 아래입니다."
"영국하고 프랑스가 하겠다고 합니다."
"하라고 하십시오."
"우리 없이 됩니까."
"모릅니다." 그가 종이를 넘겼다. "되는지 안 되는지가 우리가 대답할 질문이 아니게 됐다는 게 오늘 제가 드리는 보고입니다. 우리는 못 갑니다."
아무도 그 말을 받지 않았다. 열두 사람이 앉아 있었고, 열두 사람이 다 자기 앞의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누가 물잔을 들었다가 마시지 않고 도로 놓았다.
로라 벤슨이 물었다.
"그럼 우리가 저기서 할 수 있는 게 뭡니까."
그는 서류철을 덮었다.
"표를 던지는 겁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하는 걸 보는 거고요."
2011년 4월 ~ 5월 · 황해북도, 재편성 지역 진지
새로 온 애들 이름을 나는 사흘 만에 외운다.
예전에는 오래 걸렸다. 자대에 누가 오면 한 달쯤 이름 대신 야, 너, 그렇게 부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입에 붙었다. 지금은 사흘이면 된다. 사흘이면 그 애가 손을 어떻게 쓰는지 다 보인다.
고 이병은 왼손잡이인데 오른손으로 하려고 애쓴다. 남 일병은 장약통 뚜껑을 열 때 무릎을 쓴다. 그런 건 안 가르쳐 줘도 알아서 생긴다.
이름은 내가 헬멧 안쪽에 적어 놨다. 안 보고 부르려고 적은 게 아니라, 잊어버릴까 봐 적었다.
여섯 번 바뀌었다. 나는 그걸 세고 있다. 세지 말자고 몇 번 생각했는데 안 됐다.
가르치는 것도 짧아졌다. 예전에는 방렬부터 시작해서 순서대로 갔다. 지금은 첫날에 손부터 잡아 준다. 여기 잡아라, 여기는 절대 잡지 마라, 이 소리 나면 뒤로 빠져라. 세 가지다. 나머지는 하다 보면 는다. 는 놈은 늘고 못 느는 놈은 옆에서 계속 봐 준다.
고 이병이 사흘째 되던 날 나한테 물었다.
"오 병장님, 여기 오기 전에 어디 계셨습니까."
"섬에."
"어느 섬입니까."
"됐다." 나는 장갑을 던져 줬다. "이거나 껴라."
내가 지금 반장은 아니다. 반장은 남 일병 위로 새로 온 하사가 하고, 나는 포대 선임이다. 뭐 하는 자리냐고 물으면 딱히 대답할 게 없다. 아침에 다섯 개 포상을 돌면서 밤새 뭐가 없어졌나 보는 것. 그게 내가 하는 일이다.
4월부터 상자가 달라졌다.
겨울까지는 상자 옆에 한글이 찍혀 있었다. 회사 이름하고 만든 해하고, 무슨 무슨 창이라고 쓰여 있었다. 그게 봄부터 안 온다.
지금 오는 건 영어다.
트럭에서 팔레트를 내릴 때 나는 여덟씩 센다. 여덟, 열여섯, 스물넷. 그게 편하다. 손이 그렇게 기억하고 있다.
띠를 끊고 덮개를 걷으면 옆면에 스텐실이 있다. 글자가 굵고, 검고, 가장자리가 번져 있다. 페인트를 대충 뿌린 거다.
숫자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155라고 적힌 건 나도 안다. 그 아래 알파벳 석 자하고 숫자가 붙어 있는데 그게 뭔지는 모르겠다. 그 뒤에 네 자리 숫자가 있었다.
1997.
나는 그걸 두 번 봤다. 내가 초등학교 3학년이었다.
미군 보급 담당이 옆에 서 있었다. 나보다 나이가 많고 배가 나온 병장이었다. 내가 그 숫자를 손가락으로 짚으니까 그 사람이 어깨를 으쓱했다.

"나인티 세븐. 예."
"오케이?"
"오케이." 그가 팔레트를 손바닥으로 툭 쳤다. "굿. 노 프라블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쪽이 괜찮다면 괜찮은 거다. 어차피 나는 이걸 안 쏠 수가 없다.
그 사람은 종이에 볼펜으로 적고 있었다. 겨울에는 안 그랬다. 겨울에는 손바닥만 한 기계를 들고 다니면서 상자마다 대고 삑 소리를 냈다. 그 기계가 지금 그 사람 허리춤에 그냥 매달려 있었다. 화면이 까맸다.
내가 그걸 턱으로 가리키니까 그 사람이 그것을 들어 흔들어 보이고 고개를 저었다.
"데드."
"고쳐요?"
"노 파츠."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노 파츠 애니웨어."
나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반쯤만 알아들었다. 부품이 없다는 것 같았다. 부품이 없으면 어디서 가져오면 되는 거 아닌가 싶었는데, 그 사람이 애니웨어라고 한 걸 보면 어디에도 없다는 말인 것 같았다.
한길이가 나중에 그러더라. 남쪽 공장들이 다 섰다고. 전기가 없어서 섰고, 사람이 다 내려가서 섰다고. 그래서 요즘 세상에 그런 게 안 만들어진다고.
"그거 니가 어떻게 아노."
"라디오에서 들었지예."
요즘 위에서 하는 말은 나도 들었다. 알아서 찾아가서 떨어지는 폭탄이 있는데 그게 이제 잘 안 온다고. 그래서 비행기가 그냥 폭탄을 떨어뜨린다고 했다. 한길이가 그 얘기를 어디서 듣고 와서 사흘 동안 했다.
상자 맨 아래 줄에 도시 이름이 있었다.
앞의 것들은 읽어졌다. 미들타운, 아이오와. 그건 한 번에 읽었다.
그다음 트럭에서 내린 건 아니었다.
글자가 길었다. 나는 팔레트 옆에 쪼그려 앉아서 손가락으로 한 자씩 짚었다.
M, C, A, L… 나는 입술을 움직이면서 천천히 갔다.
"맥…앨…"
"뭐 하십니까." 한길이가 팔레트 반대편에서 물었다.
"이거 읽고 있다."
"읽어서 뭐 하시게요."
"매캘레스터. 오클라…호마."
한길이가 잠깐 아무 말도 안 했다. 그러더니 웃었다.
처음엔 코로 한 번 나오더니, 그다음에 소리가 났다. 허리를 굽히고 팔레트에 손을 짚고 웃었다.
"오 병장님. 그게 아입니다."
"그럼 뭔데."
"저도 모릅니더." 그리고 또 웃었다.
나는 그 소리를 오른쪽 귀로 들었다. 왼쪽은 작년 십일월부터 안 들린다. 사람 말은 얼굴을 돌려서 들으면 되는데, 웃음소리는 짧아서 놓칠 때가 있다. 이건 안 놓쳤다.
한길이가 웃는 걸 들은 게 언제였는지 생각해 봤는데, 생각이 안 났다. 고 이병하고 남 일병은 한길이가 저렇게 웃는 걸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소대장님이 그때 지나갔다. 발을 멈추고 우리를 봤다.
"뭐가 그렇게 재밌어."
"상자에 적힌 거 읽는데요." 내가 말했다.
소대장님이 팔레트 옆으로 와서 스텐실을 봤다. 한참 봤다. 손가락으로 네 자리 숫자를 짚었다가 뗐다.
"오 병장."
"예."
"이거 오늘 몇 개 왔어."
"쉰여섯입니다."
"어제는."
"어제는 없었습니다."
소대장님은 고개를 끄덕이고, 아무 말도 안 하고 갔다.
한길이가 내 옆구리를 찔렀다.
"소대장님도 못 읽는갑네."
밤에 나는 수첩을 꺼냈다.
수첩은 원래 탄약 남은 거 적으라고 받은 거다. 앞쪽 절반은 숫자로 차 있다. 날짜, 종류, 남은 수량. 그 뒤로는 비어 있다.
나는 빈 쪽을 폈다. 손전등을 입에 물고 연필을 잡았다.
매캘레스터.
한글로 적었다. 맞는지 모르겠다. 그 옆에 아이오와 미들타운도 적었다. 그리고 1997이라고 적었다.
왜 적는지 나도 모르겠다. 나중에 찾아볼 것도 아니고, 찾아본다고 뭐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냥 이 상자가 어디서 왔는지를 아는 사람이 여기 나 말고 없는 것 같았다.
내가 여기서 쏘는 것들이 다 어디선가 만들어져서 온 거라는 생각을 나는 그날 처음 했다. 만든 사람이 있을 거다. 그 사람은 그때 이게 어디로 갈지 몰랐을 거다. 1997년이면 그 사람도 지금은 늙었을 거고, 어쩌면 그 공장은 없어졌을 수도 있다.
그리고 이게 십사 년 동안 어디에 쌓여 있었는지도 생각했다. 창고겠지. 창고에 십사 년 있다가 배를 타고 여기까지 왔다.
배를 타고 왔을 거다. 그 생각을 하니까 아버지 생각이 잠깐 났다. 나는 그 생각은 접었다.
한 자 더 적으려고 힘을 주는데 연필심이 부러졌다.
부러진 심이 수첩 위로 굴러가서 접힌 자리에 들어가 박혔다. 나는 손전등을 입에 문 채로 그걸 손톱으로 파냈다. 종이에 검은 자국이 길게 남았다.
부러진 심이 수첩 위로 굴러가서 접힌 자리에 들어가 박혔다. 나는 손전등을 입에 문 채로 그걸 손톱으로 파냈다. 종이에 검은 자국이 길게 남았다.
남은 12화 · 약 42,305자 · 약 60분
좋아요와 책갈피는 이 기기에 저장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