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전 제5부 임계(臨界)
27화제38장 낙진
낮인데 어두웠다.
해가 있는데 색이 이상했다. 누런 것 같기도 하고 흐린 것 같기도 한데, 구름은 없었다. 하늘 전체가 유리 한 장을 낀 것처럼 됐다.

내리는 건 소매에서 먼저 알았다.
보호의 소매에 회색 가루가 앉았다. 처음엔 우리가 일으킨 흙먼지인 줄 알았다. 그런데 손으로 털었더니 다시 앉았다. 눈이면 녹는데 안 녹았다. 재면 검은데 검지 않았다. 손가락으로 문질러 보니까 아주 곱고 미끌미끌했다.
한길이 자기 소매를 보고 방독면 안에서 뭐라고 했다. 방독면을 쓰면 말이 다 뭉개진다. 나는 못 알아들었고, 그놈도 두 번 말하지 않았다.
미군 차 두 대가 우리 진지 옆에 섰다. 내린 사람들은 우리하고 다른 옷을 입고 있었다. 하나가 노란 막대기가 달린 기계를 들고 걸어 다녔다. 그 기계에서 소리가 났다. 딸깍, 딸깍, 하다가 어떤 데 가면 딸깍딸깍딸깍 하고 붙어서 났다.
그 사람이 우리 포 옆에 왔을 때 소리가 붙어서 났다. 그는 아무 말도 안 하고 손짓으로 뒤로 물러나라고 했다. 우리는 물러났다.
기계 소리가 무슨 뜻인지 나는 몰랐다. 그런데 그 사람의 걸음이 무슨 뜻인지는 알았다. 그 사람은 우리 포 쪽으로 다시 오지 않았다.
오후 세 시에 이동 명령이 왔다.
남쪽으로 갔다. 사흘 전에 올라온 길을 도로 내려갔다. 먼지를 일으키지 말라고 했는데 궤도 차량이 먼지를 안 일으키는 방법은 없다. 결국 간격을 두 배로 벌리고 천천히 갔다. 트럭 뒤에 탄 사람들은 방독면을 쓴 채로 앉아 있었고, 방독면을 쓰고는 물을 못 마시니까 다들 입을 다물고 있었다.
가면서 남쪽으로 가는 우리하고 남쪽으로 가는 다른 것들이 섞였다. 구급차. 견인차에 매달린 장갑차. 그리고 아무것도 안 실은 트럭들. 아무것도 안 실은 트럭이 그렇게 많이 내려가는 건 처음 봤다.
제독소는 개천 옆에 있었다.
천막이 세 동 있고 그 사이에 통로가 있었다. 절차가 종이에 적혀서 붙어 있었는데 방독면을 쓰고는 그걸 읽기가 어려웠다.
먼저 장구를 벗어서 통에 넣는다. 그다음 보호의를 벗는데, 벗는 순서가 정해져 있다. 겉에 묻은 것이 안으로 들어가지 않게 벗어야 한다고 했다. 우리를 지도하는 화생방 부사관이 한 사람씩 붙잡고 순서를 시켰다. 그 사람은 하루에 몇백 번 같은 말을 해서 목이 다 쉬어 있었다.
"소매 끝 잡고. 안쪽으로 말아서. 뒤집으면서. 됐고, 손 대지 말고."
그다음에 옷을 다 벗는다.
삼월 열흘이었다. 개천 옆이었고 바람이 불었다. 백 명이 넘는 남자가 벗은 채로 줄을 서 있었다. 아무도 가리지 않았다. 가릴 생각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 앞사람 등만 보고 서 있었다.
물은 미지근했다. 뜨거울 거라고 기대한 게 잘못이다. 비누 같은 걸 온몸에 바르고, 손톱 밑하고 귀 뒤하고 머리를 특히 오래 씻으라고 했다. 나는 왼쪽 귀를 씻는데 귀 안에서 물소리가 안 났다. 오른쪽은 났다. 그때는 물이 덜 들어간 줄 알았다.
옷은 다 버렸다. 이름표를 떼서 비닐봉지에 따로 넣었다. 봉지에 매직으로 이름을 적었다. 오태석. 세 글자 쓰는데 손이 떨려서 마지막 획이 밀렸다.
나오는 데서 가슴에 다는 작은 것을 하나씩 나눠 줬다. 손톱만 한 거였고 번호가 찍혀 있었다.
"이거 뭡니까."
"달고 있어. 떼지 말고."
"뭐 하는 겁니까."
"나중에 읽는 거야."
사흘을 기다렸다.
기다린다는 걸 우리가 정한 게 아니다. 명령이 그것뿐이었다. 재편성 지역에 들어가서 대기. 대기하는 동안 우리는 아무것도 안 하고 아무거나 했다.
포신을 닦았다. 오전에 한 번 닦고 오후에 또 닦았다. 두 번째 닦을 때 한길이 그랬다.
"아까 닦았는데예."
"닦아."
그놈은 더 안 물어보고 닦았다.
둘째 날 아침에 옆 천막으로 사람들이 들어왔다. 앞쪽에 있다가 내려온 부대라고 했다. 그 사람들은 걸어서 왔고 겉으로는 멀쩡했다.
점심때부터 그중 몇이 토했다. 하나가 토하니까 옆에서 또 토했다. 감기 같은 게 도는 줄 알았는데 열은 없다고 했다. 오후에 위생병 여럿이 뛰어다녔고 저녁에 그 천막이 통째로 옮겨졌다.
한길이 그걸 보고 나한테 물었다.
"저 사람들 왜 저럽니까."
"몰라."
"우리도 저래 됩니까."
"모른다니까."
그날 밤에 나는 가슴에 단 것을 손으로 만져 봤다. 손톱만 한 게 옷 속에서 딱딱했다. 그걸 만지고 나서 김 중사님 라이터를 꺼내서 한참 들고 있었다. 담배는 안 피웠다. 켜 보지도 않았다.
말은 돌았다. 앞에 있던 미군 대대가 없어졌다더라. 우리 기갑여단 선두도 없어졌다더라. 그리고 그 말이 나왔다. 핵이라던데. 누가 그 말을 처음 했는지는 모른다. 그 말이 나오면 다들 잠깐 조용해졌다가 다른 얘기로 넘어갔다.
이 소위한테 물어봤다.
"소위님, 그거 진짜입니까."
"확인된 거 없습니다."

"확인이 안 된 겁니까, 안 알려주는 겁니까."
이 소위가 나를 봤다.
"오 병장님, 저는 확인된 것만 말합니다."
그 사람은 그러고 갔다. 그 사람이 규정대로 말할 때는 규정 말고 할 말이 있을 때다. 나는 그걸 알면서도 더 안 물어봤다.
12일 오후에 명단이 왔다.
행정병이 천막 기둥에 붙이려다가 그만두고 손에 들고 있었다. 붙이면 사람들이 몰릴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아무도 몰리지 않았다. 다들 자기 자리에 앉아서 그쪽을 보기만 했다. 결국 그 애가 한 사람씩 돌면서 보여줬다.
내 차례가 왔을 때 나는 앉은 채로 받았다. 서서 받을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일어나면 뭔가 격식이 생길 것 같아서였다.
중대 행정반에서 뽑아 온 것이었다. 소속, 계급, 군번, 성명. 그리고 오른쪽 끝에 구분란이 있고 거기에 글자가 하나씩 찍혀 있었다.
나는 위에서부터 읽었다.
김선우. 중사. 군번이 우리하고 다르게 시작한다. 직업군인은 앞자리가 다르다. 그건 알고 있었는데 그날 처음으로 그 숫자를 오래 봤다.
윤지호. 이병. 스무 살.
두 번 읽었다. 두 번째 읽을 때는 이름만 보지 않고 줄 전체를 봤다. 줄이 다 채워져 있었다. 빈칸이 없었다. 행정병이 빈칸 없이 다 채워 넣었다.
종이를 반으로 접었다. 접힌 자국을 손톱으로 눌렀다. 이 소위가 하는 것처럼. 그리고 한 번 더 접었다.
주머니에 넣으려고 손을 들었는데, 손이 주머니 앞에서 멈췄다.
2011년 3월 10일 ~ 3월 30일 · 워싱턴 / 평양 / 베이징, 그리고 평안남도의 어느 도로
워싱턴에서 만들어진 문서에는 네 항목이 있었고 그중 어느 것도 도덕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첫째, 표적이 없다.
브리핑을 한 것은 여드레 전과 같은 대령이었다. 슬라이드도 대부분 같았고 그가 한 말도 거의 같았다. 다른 점은 이제 아무도 그 말을 의심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남아 있는 핵 관련 시설은 좌표가 다 있고, 지도부가 있는 곳도 좌표가 있고, 그 좌표들에 재래식으로 도달하지 못하는 것은 없다. 파괴가 완전하지 않은 표적이 몇 개 있으나 그것들은 어떤 수단으로도 완전하지 않다.
둘째, 중국.
인민해방군 제39집단군의 선두가 폭발점에서 이백 킬로 안에 있었다. 지도 위에 컴퍼스로 원을 그렸고, 그 원 안에 중국군 부대 부호가 넷 들어갔다.
"한 발이 두 발이 되면," 멀린이 말했다. "그다음부터는 우리가 관리하는 상황이 아닙니다. 우리가 상대하는 나라가 바뀝니다."
셋째, 동맹.
무기를 이 전구로 들이는 물리적 작업에는 사 주가 걸리고 그 사 주는 위성에 보인다. 첫날부터 보인다. 그것이 도쿄에 보이는 순간 지금의 내각은 그날로 끝난다. 그리고 이 전쟁의 화물 대부분은 일본의 항구와 활주로를 지난다. 다음 내각이 그 항구를 계속 열어 둘 것인지는 다음 내각도 모른다.
넷째를 말한 것은 회의 탁자 끝에 앉아 있던 국가안전보장회의 실무진의 서른한 살짜리였다. 그는 아무도 그것을 말하지 않는 것이 이상해서 말했다.
"넷째는, 답할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저쪽은 이미 죽어가고 있습니다."
방이 조용해졌다.
그것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 그 방의 모두가 그것을 알고 있었고, 앞의 세 항목은 그 넷째를 소리 내지 않기 위해 만들어진 것에 가까웠다. 게이츠가 그를 한 번 봤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문장은 회의록에 들어가지 않았다. 서른한 살짜리는 그날 저녁 지하철에서 그 생각을 했고, 그 뒤로 여러 해 동안 가끔 그 생각을 했다.
대통령은 네 항목을 다 읽고 나서 하나를 물었다.
"우리가 답하지 않으면, 저쪽은 우리가 못 하는 걸로 읽습니까 안 하는 걸로 읽습니까."
"못 하는 걸로 읽을 겁니다." 게이츠가 답했다. "당분간은."
"그게 문제가 됩니까."
"이 전쟁에서는 안 됩니다. 다음 전쟁에서 됩니다. 다만 다음 전쟁은 제 소관이 아닙니다."
대통령은 그 말에 웃지 않았다. 서명은 그날 오후에 났다.
3월 14일부터 미 공군의 대규모 전역이 시작되었다. 답은 그 형태로 나갔다. 표적 목록은 이미 만들어 둔 것을 그대로 썼다.
평양에서 두 번째 명령서가 나온 것은 3월 하순이었다.
정만복 소장은 그것도 세 번 읽었다. 이번에는 세 문장이었다. 한 문장이 늘어난 이유는 이번 장치의 소재지가 첫 번째와 달랐기 때문이다.
문서 끝에 인장이 찍혀 있었다. 인장은 제 자리에 정확히 찍혔고 인주가 고르게 묻어 있었다. 인장 옆의 서명란에는 이름이 하나 적혀 있었는데, 정만복이 예상한 이름이 아니었다.
젊은 쪽은 서명하지 않았다.
정만복은 그 사실을 삼 초쯤 들여다보고 서류를 덮었다. 그가 삼십 년 동안 배운 것 가운데 이런 것이 있다. 명령이 내려올 때 누가 쓰지 않았는가를 보면, 그 명령이 나중에 누구 것이 될 예정인지를 알 수 있다.
호송은 다시 상좌가 맡았다. 그는 첫 번째 때와 같은 방식으로 준비했다. 트럭 세 대, 가운데 한 대에 화물, 앞뒤는 비운다. 이번에는 화물차 조수석 문에 흰 페인트로 세 자리가 적혀 있었다. 사, 일, 칠. 부대 정비계에서 지난겨울에 적어 놓은 번호였고 아무 의미도 없었다.
3월 28일 밤에 출발했다.
3월 28일 밤에 출발했다.
남은 17화 · 약 60,626자 · 약 8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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