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LLUSIONTOON

2화제2장 십삼 분

· 44화 중 2화 · 3,636자 · 약 5분 · 무료

글자3 / 5

밖은 낮인데 낮 같지가 않았다.

연기가 낮게 깔려서 언덕 능선이 잘려 보였다. 진지 앞길에 흙이 부챗살처럼 뿌려져 있고 그 위에 자갈이 얹혀 있었다. 자갈이 아까까지 길에 없던 것이었다.

확전 2화 제2장 십삼 분 — 헤더컷

3번포는 서남쪽을 보고 있었다. 오전 내내 그쪽으로 쐈으니까 그대로였다.

"방향 돌려."

하동찬이 안으로 들어가 앉았다. 포탑이 돌기 시작하는데 평소보다 느리게 느껴졌다. 실제로 느렸는지 내가 그렇게 느낀 건지 모른다.

탄이 없었다. 오전 사격 끝나고 안을 비워 놨으니까 당연했다. 당연한 게 그때는 미치는 일이었다.

"밖에서 날라야 됩니다." 배승기가 말했다.

"날라."

그래서 우리는 밖에서 날랐다. 155밀리 한 발이 사람 하나 무게다. 그 무게를 들고 스무 걸음쯤 걸어야 했다. 윤지호가 앞에서 뒷걸음질을 치고 내가 밀었다. 그 애 얼굴이 하얀데 입만 뭐라고 계속 움직였다. 나중에 물어보니까 숫자를 세고 있었다고 했다.

탄약고에서 포까지 그 스무 걸음이 그날 제일 길었다. 위에서 뭐가 오는 소리가 나면 다들 그 자리에 주저앉는다. 손에 든 걸 놓을 수는 없으니까 끌어안고 주저앉는다. 그러고 나서 다시 일어나 걷는다. 그게 몇 번 반복됐는지는 안 셌다.

두 번째 왕복 때 발밑에 뭔가 걸렸다. 반합이었다. 누가 점심때 진지 앞에 두고 간 건지 뚜껑이 열린 채 엎어져 있었다. 나는 그걸 발로 옆으로 밀고 지나갔다.

그때 2번포 쪽에서 소리가 났다. 소리라기보다 소리가 없어지는 소리였다.

돌아보니까 2번포 옆에 사람이 셋 서 있었다. 서서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포반장이 손으로 계기판 쪽을 가리켰다가 내렸다.

"죽었답니다." 하동찬이 무전을 듣고 말했다. "2번이랑 5번."

"뭐가 죽어."

"안에 불이 다 나갔다는디요."

포는 멀쩡해 보였다. 껍데기는 그대로 있고 포신도 그대로 있는데 안에서 전기가 안 통한다고 했다. 나는 그게 어떻게 되는 건지 몰랐다. 지금도 잘 모른다.

4번포 앞에서는 정비병이 욕을 하고 있었다.

"이 씨발 걸 왜 하필."

오전 열한시 사십 분에 낀 그 탄이었다. 아침에는 오늘 안에 안 되면 내일 하면 되는 일이었다.

여섯 문 중에 셋이 남았다.


무전기 소리가 바뀐 건 그 무렵이었다.

말투가 바뀌었다는 뜻이다. 평소에 사격지휘반은 표적 번호를 부른다. 번호는 외우고 있다. 훈련 때 쓰는 것들이라 종이 안 봐도 안다.

그런데 그날은 번호를 안 불렀다.

김선우 중사 목소리였다. 중사는 원래 말이 느린 사람이다. 급할 때도 느리게 말해서 그게 이 사람 재산이라고들 했다. 그 목소리가 그때 조금 빨랐다.

"포7중대, 사격제원 하달."

그리고 숫자를 통째로 읽었다. 방위각하고 사각하고, 그 앞에 좌표를 붙여서.

"다시 한번 불러 준다."

중사가 같은 숫자를 처음부터 다시 읽었다. 나는 그때 손으로 받아 적고 있었는데, 두 번 읽어 주는 건 처음이라 손이 한 박자 늦었다.

무전이 잠깐 비었다. 그러고 이준하 소위 목소리가 들어왔다.

"확인."

한 박자 쉬었다.

"…확인했습니다."

소위는 사격제원을 복창하고 나서 한 번도 되묻는 법이 없는 사람이다. 규정집을 통째로 외우고 다니는 사람이니까. 그날 그 한 박자를 나는 나중에 여러 번 생각했다. 그때는 아무 생각도 안 했다.

방위각이 아침 것하고 완전히 달랐다. 등 뒤가 앞이 됐다는 것만 알았다. 그 숫자가 가리키는 데가 어딘지는 내 알 바가 아니었다. 좌표는 사격지휘반에서 온다. 나는 제원을 맞추는 사람이다.

"3번포, 제원 확인."

하동찬이 숫자를 넣었다. 배승기가 탄을 올렸고 장전기가 그걸 약실로 밀었다. 쇠가 쇠를 미는 소리. 윤지호가 장약 봉지를 들고 왔는데 손이 떨려서 내가 받아 챘다.

"장전 끝."

폐쇄기 손잡이가 넘어가면서 마지막에 딸깍 걸렸다. 나는 그 소리를 듣기 전에 손으로 먼저 알았다. 아침하고 똑같았다. 손은 아침에 하던 걸 그대로 하고 있었다.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귀마개가 거기 있었는지 없었는지 모르겠다. 손이 뭘 찾다가 그냥 나왔다. 뒤통수를 쳐 줄 사람은 지금 저 아래 지휘반에 있었다.

무전에서 이 소위가 말했다.

"사격."

내가 복창했다. 내 목소리가 남의 것 같았다.

"쏴."

포신이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2010년 11월 23일 14시 30분 · 조선인민군 제4군단 예하 개머리 해안포중대 진지

분필이 짧아져서 리성철은 그것을 손톱 끝으로 잡았다.

갱도 안은 늘 축축했다. 벽에서 배어 나온 물이 바닥 가장자리를 따라 검은 줄을 만들어 놓았고, 탄약 상자는 그 줄에서 한 뼘 떨어뜨려 쌓게 되어 있었다. 상자 옆구리마다 숫자가 적혀 있다. 그가 적은 것이다. 몇째 줄 몇째 칸, 그리고 안에 몇 발.

소대장이 물으면 그는 상자를 세는 척한다. 세지 않아도 안다. 세지 않아도 아는 것을 소대장 앞에서 보이면 좋을 게 없다는 것도 안다. 그의 아버지가 그렇게 가르쳤다. 셈이 빠른 것은 재주가 아니라 흠이 될 때가 있다고.

"성철 동무."

확전 2화 제2장 십삼 분 — 전환컷

같은 반 전사가 갱도 입구에서 고개를 들이밀었다.

"아침에 정치일꾼이 한 말 들었소?"

"들었소."

"남조선 놈들이 우리 쪽 바다에 대고 쐈다는 거."

"들었소."

"몇 발이나 쐈겠소, 그게."

리성철은 분필을 주머니에 넣었다. "많이 쐈겠지."

오전 내내 남쪽에서 포성이 왔다. 물을 건너온 소리라 뭉개져 있었지만 발수는 셀 수 있었다. 그는 속으로 셌다. 어느 방향으로 쏜 것인지는 그의 세계에 없는 물음이었다. 정치일꾼이 우리 쪽으로 쐈다고 했으면 우리 쪽으로 쏜 것이다.


열네시 삼십분에 하늘에서 소리가 났다.

갱도 밖에 있던 전사들이 고개를 들었다. 구름 밑으로 검은 점이 지나갔다.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었고 남쪽으로 비스듬히 갔다.

"우리 것이오." 누가 말했다.

"우리 것이 왜 저리 낮게 다니오."

"높이 다니라는 법이 있소?"

리성철도 잠깐 올려다봤다. 비행기를 그렇게 가까이 본 것은 입대하고 두 번째였다. 첫 번째는 열병식 실황을 텔레비죤으로 본 것이니 가까이 본 것이 아니었다.


열네시 삼십사분에 중대가 쏘기 시작했다.

포신이 뒤로 물러날 때마다 갱도 천장에서 잔돌이 떨어졌다. 리성철은 탄을 받아 넘겼다. 받고 넘기고, 받고 넘겼다. 장전수의 일은 생각할 자리를 주지 않는다. 그것이 좋았다.

세 발째부터 그는 세기 시작했다.

밖에서 방사포가 함께 나갔다. 그쪽 소리는 이쪽과 달라서 한꺼번에 찢어지듯 나간다. 갱도 밖으로 나갔던 전사 하나가 뛰어 들어오며 웃었다.

"섬에 불붙었소! 보이오, 저기!"

아무도 대꾸하지 않았다. 오철남 대위가 관측구 앞에 서 있다가 뒤를 돌아봤다.

"떠들지 말라."

중대장은 마흔이 다 된 사람이고 목소리가 크지 않다. 그가 목소리를 낮추면 중대가 조용해진다.

"놈들이 쏘면 저기부터 쏜다."

대위가 바다 쪽을 턱으로 가리켰다. 무도 쪽이었다. 늘 그랬다는 뜻이었고, 그래서 여기 있는 사람들은 늘 그렇듯 여기 있으면 된다는 뜻이었다. 리성철은 그 말을 믿었다. 믿을 이유가 없어서 믿은 것이 아니라, 그것 말고 들은 말이 없어서 믿었다.

열네시 사십칠분에 첫 것이 떨어졌다.

무도 쪽이 아니었다.


소리가 아니라 먼저 빛이었다. 관측구 밖이 한번 하얘졌다가 어두워졌다. 그다음에 갱도 전체가 위로 들렸다가 놓였다. 리성철은 탄을 안은 채로 무릎이 꺾였고, 옆에 있던 전사가 그의 등 위로 넘어졌다.

흙이 갱도 입구로 밀려 들어왔다. 밀려 들어온다기보다 뱉어졌다.

밖에 사람이 있었다. 방사포 진지 쪽으로 탄을 나르던 인원이었고, 사격 중이라 갱도로 들어올 이유가 없던 인원이었다.

"들것! 들것 가져오라!"

누가 그렇게 소리쳤다. 들것은 갱도 안쪽 벽에 걸려 있었다. 리성철이 그것을 떼어 냈다. 손잡이에 먼지가 두껍게 앉아 있어서 손바닥이 미끄러졌다.

밖으로 나가 보니 낮이 아니었다. 흙먼지가 해를 덮어서 사방이 저녁 색이었다. 그는 들것 한쪽을 잡고 뛰었고, 반대쪽을 누가 잡았는지 나중에도 기억하지 못했다.

한 사람을 옮기고 두 사람째를 옮겼다.

두 번째 사람은 옮기는 중에 조용해졌다. 리성철은 그것을 알아차렸다. 무게가 바뀐 것도 아니고 소리가 그친 것도 아닌데 알아차려졌다. 그는 들것을 놓지 않고 끝까지 갔다.

갱도 안에 내려놓고 나서 그는 벽에 손을 짚고 서 있었다. 손이 벽의 검은 줄에 닿았다. 물이 묻었다.

열네시 오십오분에 중대의 사격이 멎었다.


열다섯시 십이분에 다시 쏘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리성철은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손이 제 것 같지 않았다. 탄을 받는데 손가락 마디가 저 혼자 늦게 움직였다. 앞에 선 전사가 그것을 봤는지 아무 말 없이 한 박자 기다려 주었다.

스무 발쯤 나갔다. 그는 그것은 셌다. 열아홉이었는지 스물하나였는지는 자신이 없다.

포신이 식는 냄새가 갱도에 찼다. 남쪽에서는 아무것도 오지 않았다. 아무것도 오지 않는 동안 사람들은 서로 말을 하지 않았고, 중대장만 관측구 앞을 두 번 왔다 갔다 했다.

두 번째 것은 열다섯시 이십오분에 왔다.

첫 번째보다 많았다. 리성철은 그것을 소리로 알았다. 첫 번째는 셀 수 있었고 두 번째는 셀 수 없었다. 세려고 했는데 숫자가 서로 겹쳐서 자리를 잃었다.

그는 세는 것을 멈추지 못했다. 멈추면 다른 것이 들어올 자리가 생겼다.

갱도가 흔들릴 때마다 천장에서 물이 떨어졌다. 어둠 속에서 누군가 어머니를 불렀다. 스무 살쯤 되는 목소리였다. 리성철도 스무 살이었다.

멎고 나서 그는 밖으로 나갔다.

포진지 옆 흙벽에 사람이 하나 기대앉아 있었다. 등을 벽에 대고 다리를 뻗은 자세였다. 리성철은 그를 알았다. 지난달에 고향에서 편지가 왔다고 자랑하던 전사였다. 편지지가 얇아서 글씨가 뒤로 비친다고, 그런 얘기를 했었다.

"동무."

대답이 없었다.

그는 한 번 더 불렀다. 어깨에 손을 대려다가 대지 않고 손을 내렸다. 그러고는 잠깐 그 앞에 서 있다가, 뒤에서 누가 자기를 부르는 소리에 돌아섰다. 돌아서면서 그는 자기가 아직도 무언가를 세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한 시간 뒤에도 그는 자기가 몇까지 셌는지 말할 수 없었다.

한 시간 뒤에도 그는 자기가 몇까지 셌는지 말할 수 없었다.

남은 42화 · 약 148,334자 · 약 3시간 3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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