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LLUSIONTOON

12화제17장 사층

· 44화 중 12화 · 3,505자 · 약 5분 · 무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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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도로 나오자 소리가 커졌다. 남쪽이 아니라 사방이었다.

계단은 한 층에 열여덟 개였다. 아홉을 내려가면 꺾이고 아홉이 더 있었다. 지원은 세면서 내려갔다. 아홉, 열여덟. 이유가 있어서 세는 것은 아니었다.

확전 12화 제17장 사층 — 헤더컷

3층 계단참에 박순임이 서 있었다. 한 손에 손자 태우를 잡고 다른 손에 전기밥솥을 들고 있었다.

"할머니, 그건 왜."

"밥이 돼 있어서."

노인은 그렇게만 말하고 난간을 짚었다. 태우는 잠옷 위에 어른 점퍼를 걸치고 슬리퍼를 짝짝이로 신었다. 왼쪽이 오른쪽 것이었다. 지원은 밥솥을 받아 들었다. 아직 따뜻했다.

서른여섯, 쉰넷.

1층 현관에는 사람이 열댓 명 나와 있었다. 잠옷 바람인 사람, 정장을 다 갖춰 입은 사람. 2층 남자가 나오면서 문을 잠그고, 손잡이를 흔들어 보고, 다시 잠갔다. 누군가는 하늘을 향해 휴대폰을 들고 있었다. 화면에는 검은 것밖에 찍히지 않았다.

"어디로 가야 돼요?" 여자가 물었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물은 사람도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종로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열댓 명이 그 뒤를 따라갔다. 그 여자가 어디로 가는지 아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지원은 그 여자도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알았고, 그래도 따라갔다.


종각역 3번 출구 셔터는 내려가 있었다.

사람들이 그 앞에 모여 섰다. 처음에 스무 명, 곧 백 명이 넘었다. 셔터 안쪽은 캄캄했다. 누가 셔터를 두 번 두드렸고, 그 소리가 지하로 울려 들어갔다가 아무것도 데려오지 않고 돌아왔다.

05시 10분에 소리가 멎었다.

05시 12분에 사이렌이 울렸다. 길게 오르내리는 소리가 텅 빈 종로를 따라 갔다. 사람들이 고개를 들었다. 몇은 웃었다.

5시 30분에 셔터가 올라갔다. 그때까지 맨 앞에 서 있던 것은 노인들과 아이를 안은 사람들이었는데, 셔터가 허리 높이까지 올라간 순간 뒤쪽에 있던 사람들이 양옆으로 돌아 먼저 들어갔다. 밀치지도 않았다. 그냥 빨랐다. 박순임은 세 번째 무리에 섞여 들어갔고, 지원은 밥솥을 안고 그 뒤를 따라갔다.

승강장 바닥은 차가웠다. 열차는 오지 않았다. 안내방송도 없었다. 사람들은 노란 선 안쪽에 앉거나 벽에 기대거나 기둥 아래에 신문지를 폈다. 지하는 이상하게 조용했다. 위에서 무슨 소리가 나는지 여기서는 들리지 않았고,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들끼리 내는 소리에 예민해졌다. 누가 비닐봉지를 부스럭거리자 세 사람이 동시에 그쪽을 봤다.

역무원 한 명이 개찰구 안쪽에 서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물을 때마다 모른다고 대답했고, 대답할 때마다 조금씩 자세를 고쳐 섰다.

박순임은 밥솥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뚜껑을 열었다. 김이 조금 났다. 태우에게 손으로 밥을 뭉쳐 먹였다. 옆에 앉은 남자가 그것을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한 남자가 계속 시계를 봤다. 여섯 시가 되자 그가 일어나 계단을 올라갔다.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회사에 가는 것 같았다.


일곱 시에 지원은 밖으로 나왔다.

관철동 골목의 편의점은 문을 열고 있었다. 아르바이트생이 마스크를 쓰고 바코드를 찍었다. 사람들이 계산대에 올려놓는 것은 라면, 담배, 건전지, 즉석밥이었다. 생수 진열대는 반쯤 차 있었다. 아무도 손을 대지 않았다.

지원은 라면 다섯 개와 건전지 한 팩을 샀다. 카드가 됐다. 영수증도 나왔다. 아르바이트생이 그것을 접어서 봉투에 넣어 줬다.

거리에는 유리 조각이 있었다. 사람이 다니는 자리만 누가 벌써 쓸어 놓았다. 종로2가 횡단보도의 신호등은 정상으로 바뀌고 있었고, 차가 한 대도 없는데 사람들이 초록불을 기다렸다. 지원도 기다렸다.

청계천 쪽에서 검은 연기가 두 줄 올라왔다. 소방차 소리가 났다가 멀어졌다. 사거리에 구급차 한 대가 비상등을 켠 채 서 있었는데, 문이 닫혀 있고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그 옆을 지나가면서 지원은 잠깐 걸음을 늦췄다. 창문 안에 아무도 없었다.


여덟 시에 그녀는 사무실 문을 열었다.

형광등이 다 켜져 있었다. 남기석 사장이 탕비실에서 원두를 갈고 있었다. 손잡이를 돌리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났다.

"왔어?"

정미연이 자기 자리가 아니라 창가 소파에 앉아 있었다. 코트를 벗지 않은 채였다.

"언니, 전화 돼요?"

"안 돼."

"저도 안 돼요."

책상 여섯 개 중에 앉은 사람은 없었다. 컴퓨터는 전부 켜져 있었다. 누군가 아침에 켜 놓고 앉지 않은 것이 아니라, 어젯밤에 끄지 않은 것이었다. 팩스에 종이가 한 장 걸려 있었다. 지원이 빼 보니 지난주에 보낸 견적서였다. 상하이 쪽 거래처가 확인 서명을 해서 되돌려 보낸 것이었고, 도착 시각은 새벽 세 시 십일 분으로 찍혀 있었다.

미연이 옆에 와서 그 종이를 들여다봤다.

"이거 아직 유효해요?"

"몰라."

지원은 그것을 결재판에 끼워 사장 책상에 올려놓았다. 놓고 나서, 놓은 자리를 손바닥으로 한 번 눌렀다.

확전 12화 제17장 사층 — 전환컷

벽에 걸린 텔레비전에는 소리가 꺼져 있었다. 화면 아래로 흰 글자가 지나갔다.

정부, 사망자 3천여 명 추정 … 코스피 개장 연기 … 인천공항 국제선 전편 결항 … 서울시, 시민 여러분께서는 안전한 곳에 머물러 주시기 바랍니다

지원은 서랍에서 통장을 꺼내 가방에 넣었다. 그러고는 자리에 앉지 않고 서 있었다. 미연도 서 있었다. 둘 다 나갈 생각이 없었다.

사장이 커피를 세 잔 내려 왔다. 종이컵이 아니라 손님용 잔이었다. 그가 하나를 지원 앞에 놓고, 하나를 미연에게 주고, 남은 하나를 들고 자기 방 문턱에 기대섰다. 한 모금 마시고 잔을 내려다봤다.

"지원 씨." 사장이 말했다. "은행 문 열면 가서 잔고 좀 뽑아 와요. 어제 들어오기로 한 게 있는데, 확인은 해야 되잖아."


2010년 11월 26일 · 인천 연안부두 → 인천 시내 임시 집결지

배에서 내리는 순서는 우리가 마지막이었다.

이틀 만에 뜬 배였다. 갑판에 주민들이 먼저 올랐고 우리는 뒤쪽 화물칸 옆에 앉아서 왔다. 두 시간 반 동안 아무도 말을 안 했다. 정한길이 한 번 뭐라고 했는데 엔진 소리 때문에 안 들렸다. 나는 왼쪽 귀를 그쪽으로 돌리지 않았다. 오른쪽 귀로 들으려면 몸을 돌려야 했고 그러기가 귀찮았다.

부두에 닿았을 때 제일 먼저 안 것은 냄새였다. 기름 냄새하고 젖은 시멘트 냄새. 섬에서 나던 냄새하고 달랐다. 섬 냄새는 이틀째 탄 냄새였다.

발판을 밟고 내려서는데 다리가 이상했다. 배가 흔들려서가 아니었다. 흔들리지 않는 게 이상했다.


부두에 사람이 너무 많았다.

대합실 안에도 있고 밖에도 있었다. 바닥에 종이상자를 깔고 앉은 사람들, 서서 전화를 거는 사람들, 캐리어 위에 앉은 사람들. 우리 중대가 내리자 그쪽이 웅성거렸다. 그리고 몇 명이 우리 쪽으로 걸어왔다.

섬은 작다. 서로 다 안다.

어떤 할머니가 내 소매를 잡았다. 나는 그 할머니를 몰랐다. 할머니는 아들 이름을 댔다. 육지 사람 이름이었다. 나는 모르겠다고 했고 할머니는 소매를 놓지 않았다. 하동찬이 와서 할머니 손을 살살 떼어 내고 저쪽 안내소를 가리켰다. 안내소에는 아무도 없었다.

대합실 구석 의자에 최영도 아저씨가 앉아 있었다. 굴 하는 집이다. 아저씨는 나를 보고 고개만 한 번 끄덕였다. 옆에 아주머니가 담요를 덮고 앉아 있었는데 기침을 했다. 마른기침이었고, 두 번 하고 멈췄다가 또 두 번 했다.

대합실 텔레비전 앞에 사람이 스무 명쯤 모여 있었다. 소리는 안 들리고 자막만 지나갔다. 숫자가 하나 있었는데 나는 그게 뭘 센 숫자인지 몰랐다. 옆에서 어떤 아저씨가 "저거 어제 아침에는 다른 숫자였다"고 했다. 아무도 대꾸하지 않았다.

배급소에서 김밥을 나눠 주고 있었다. 은박에 싼 것이었고 한 사람에 한 줄이었다. 나눠 주던 여자가 어떤 남자한테 화를 냈다. 두 줄 가져갔다고. 남자는 애 것이라고 했다. 여자는 애를 데려오라고 했다. 남자가 한 줄을 돌려놓고 갔다. 여자는 그 줄을 다시 상자에 넣지 않고 한참 손에 들고 있었다.

윤지호가 내 뒤에 바짝 붙어 있었다. 자대 온 지 사십 일 된 애다.

"저 사람들 다 어디로 갑니까."

"몰라."

"우리도 저기 섞이는 겁니까."

"우린 명단이 있어."

지호는 그 말을 알아들은 것 같았다. 알아듣고 나서 조금 나아진 얼굴을 했다.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도로를 봤다.

차가 밀려 있었다. 밀려 있는데 한 방향으로만 밀려 있었다. 남쪽이었다. 지붕에 이불하고 상자를 묶은 승용차, 트렁크가 안 닫혀서 노끈으로 묶은 차, 짐칸에 사람이 앉은 트럭. 갓길로 걷는 사람도 있었다. 유모차를 밀고 가는 여자가 있었고 유모차에는 애가 아니라 짐이 실려 있었다. 개를 두 마리 끌고 가는 남자도 봤다. 개들은 걷기 싫어했다.

한길이가 내 옆에서 계속 말했다.

"행님, 저 차 아까부터 저기 있는데예. 십 분 됐는데 안 움직인다 아입니까."

"그래."

"저래 갖고 어데를 갑니까."

"몰라."

"공항도 안 뜬답니다. 아까 배에서 아저씨가 그러던데, 어제 공항 갔다가 그냥 돌아왔다고. 표를 안 판다고."

"저기 저 아저씨는 냉장고 싣고 갑니다. 냉장고를."

"봤어."

"저걸 어데다 놓고 살라꼬."

김선우 중사가 지나가면서 한길이 뒤통수를 툭 쳤다. 때린 게 아니라 손을 얹은 거였다. 중사님은 사람을 이름보다 버릇으로 기억한다. 한길이는 말하는 애, 동찬이는 장갑 벗는 애, 나는 세는 애다.

"입 아끼라. 오늘 길다."

나는 도로를 계속 봤다. 그 차들이 다 서울에서 오는 것이라고 누가 말해 줬다면 나는 그런가 보다 했을 것이다. 그런데 아무도 말을 안 했고, 나는 그냥 차가 많다고만 생각했다. 섬에서 한 시간 칠 분 동안 있었던 일이 있고, 지금 이 도로가 있는데, 두 개가 같은 크기가 아니라는 게 손에 잡히지 않았다. 나는 그걸 문장으로 만들지 못했다. 그냥 속이 좀 이상했다.

나는 도로를 계속 봤다. 그 차들이 다 서울에서 오는 것이라고 누가 말해 줬다면 나는 그런가 보다 했을 것이다. 그런데 아무도 말을 안 했고, 나는 그냥 차가…

남은 32화 · 약 112,743자 · 약 2시간 4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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