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전 제6부 세계
30화제42장 보험료
싱가포르의 화면은 여섯 개였다.
배진호는 그중 두 개만 보고 있었다. 왼쪽은 브렌트, 오른쪽은 호르무즈에서 나오는 대형 유조선의 전쟁위험 할증이었다. 오른쪽 숫자가 먼저 움직였고 왼쪽이 따라왔다.

숫자는 오르지 않았다.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났다.
그것이 그가 십 년 동안 배운 것 중에 제일 이상한 일이었다. 매도 호가가 한 번에 걷힌다. 화면 한쪽이 잠깐 비고, 삼 초쯤 있다가 다시 채워지는데 그때는 아까보다 위에 있다. 계단이 아니라 구멍이다. 그 사이에는 아무 가격도 없다.
이상한 것이 하나 더 있었다. 화면 위에서 오르는 이유가 한반도만은 아니었다. 겨울부터 중동 쪽 도시 이름이 뉴스에 계속 나왔고, 그쪽 사정은 그쪽 사정대로 굴러가고 있었다. 어느 쪽이 얼마를 올렸는지는 아무도 나눠서 계산하지 못한다. 두 개가 같은 화면에서 더해져 하나의 숫자가 된다.
전화 두 대가 동시에 울렸다. 그는 왼쪽을 집었다.
"네. 예. 아니요, 그건 배가 아니라 종이입니다. 예."
수화기를 내려놓고 그는 마우스에 손을 얹었다. 클릭하지 않았다.
그가 파는 것은 종이지만, 그 종이 뒤에는 실제로 기름을 싣고 어딘가에 서 있는 배가 있다. 어느 배인지는 그도 모른다. 화면에는 배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숫자만 나온다.
브렌트가 백팔십 몇 달러를 지나갈 때 그는 커피를 마셨다. 식어 있었다.
부산은 조용했다.
정길수는 야드 사무실 창을 열어 놓고 있었다. 안벽에 배가 없었다. 크레인 네 기가 붐을 올린 채로 서 있었고, 올려놓은 붐은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장치장은 반대로 꽉 찼다. 오단까지 쌓았고 육단은 못 쌓는다. 규정이 그렇고, 규정을 어기면 아래 칸이 찌그러진다. 컨테이너를 가져갈 배가 안 오고, 이미 실린 것을 내릴 배도 안 온다.
제일 급한 것은 냉동 컨테이너였다. 플러그가 모자랐다. 정길수는 아침마다 목록을 들고 나가 어느 박스에 전기를 주고 어느 박스를 뽑을지 정했다. 뽑힌 쪽에서 사흘째부터 냄새가 났다.
부두 뒤편 창고 몇 동은 겨울부터 사람이 쓰고 있었다. 서울에서 내려온 사람들이었다. 아침이면 그쪽에서 물 받는 줄이 길게 늘어섰다. 하역 인부들이 쓰던 식당은 두 달 전에 그 줄을 위해 다시 열었다.
지난주에 서울 본사에서 전화가 왔다. 유럽 쪽 큰 선사 두 곳이 기항지 목록에서 이 항구를 뺐다는 통보였다. 임시라고 적혀 있었다. 정길수는 그 팩스를 받아 게시판에 붙였다가, 십 분 뒤에 떼어 서랍에 넣었다.
정길수는 창틀에 팔을 얹고 서 있다가, 무언가 들린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야드 트랙터의 디젤 소리가 없었다. 스프레더가 박스에 물릴 때 나는 쇳소리도 없었다. 무전기도 조용했다.
그 밑에서 다른 소리가 올라왔다. 그는 그것이 무슨 소리인지 아는 데 한참이 걸렸다. 스무 해를 이 부두에서 보냈는데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 소리였다.
물이 안벽에 닿는 소리였다.
2010년 12월 ~ 2011년 6월 · 경기 이천 / 충북 청주 / 대만 신주 / 캘리포니아
없어진 것은 소리였다.
노경훈은 그것을 눈보다 귀로 먼저 알았다. 천장 전체가 팬이다. 필터 달린 팬이 수천 개 돌면서 공기를 위에서 아래로 밀어 내리고, 그 소리는 하도 계속되어서 소리로 들리지 않는다. 삼 년째 여기 있는 사람에게 그것은 그냥 방의 조건이다.
그 방의 조건이 없어졌다.
두 번째로 온 것은 문이었다. 클린룸은 늘 바깥보다 압력이 높다. 밀면 무겁다. 그런데 그 순간 옆 베이로 통하는 문이 손끝에 가볍게 밀렸다. 공기가 안에서 밖으로 나가고 있지 않았다.
"가스!"
그가 소리친 것은 웨이퍼가 아니었다. 배기가 죽으면 사람이 죽는다. 그는 방진복 소매를 걷지도 못한 채 뛰어가 특수가스 라인의 차단 밸브를 순서대로 잠갔다. 장갑이 두 겹이라 손끝 감각이 없었다. 옆에서 조 기사가 스크러버 표시등을 확인하고 엄지를 들었다. 비상발전기가 걸리는 소리가 벽 너머에서 났다. 삼십 초쯤 걸렸다.
그다음부터는 잃는 것만 남았다.
비상 전원은 배기와 조명과 최소 공조까지다. 노광 장비는 안 산다. 확산로 안에서 팔백 도로 돌던 웨이퍼는 온도가 떨어지는 동안 죽는다. 세정 배스에 담겨 있던 것은 화학액 속에 그대로 남아 계속 깎인다. 연마 장비의 슬러리는 굳는다. 진공 챔버는 압력이 풀리면서 벽에 붙어 있던 것을 웨이퍼 위로 떨어뜨린다.
노경훈은 로트 번호를 세지 않았다. 세도 소용없었다. 그 방 안에 들어와 있던 것은 전부였다.
그가 마지막으로 확인한 것은 초순수 배관이었다. 물이 돌지 않으면 배관 안에서 뭔가 자란다. 그러면 다시 켤 때 배관을 처음부터 씻어야 한다.
"과장님." 조 기사가 물었다. "다시 켜는 데 얼마나 걸립니까."
"몇 달."
"몇 달이요?"
"켜는 건 하루야. 켜고 나서 물건이 나오는 데까지가 몇 달이고."
조 기사는 방진복 후드 안에서 눈만 보였다. 그 눈이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챔버를 다 열어서 닦아야 하고, 닦고 나면 먼지를 다시 재고, 공정 조건을 하나씩 다시 잡아야 해. 그게 수백 개야. 다 잡고 나서도 처음 몇 달은 나오는 것 중에 절반이 불량이고."
전력은 그날 밤에 들어왔다가 새벽에 다시 나갔다. 사흘째 되는 날 회사에서 공문이 왔다. 계통이 언제 정상화되는지는 회사도 모른다고 되어 있었다. 청주도 같은 날 섰다는 말이 그 아래 한 줄로 붙어 있었다.
노경훈은 그 공문을 두 번 읽었다. 두 번째로 읽을 때 그의 눈이 멈춘 곳은 문장이 아니라 날짜였다.

임세중이 열쇠를 찾는 데 이십 분이 걸렸다.
카드 리더는 죽어 있었다. 관리동 캐비닛 맨 아래 서랍에 누런 봉투가 있었고, 봉투 겉에는 준공 연도가 적혀 있었다. 그 열쇠는 그때 이후로 한 번도 쓰인 적이 없었다.
12월에 라인이 서고, 1월에 소개 명령이 내려왔다. 그사이에 그가 한 결정은 하나였다. 남은 연료를 어디에 쓸 것인가.
사무동 난방이거나, 클린룸 최소 공조거나.
"사람이 얼면 어떡합니까." 총무과장이 물었다.
"사람은 옷을 껴입으면 돼요." 임세중이 말했다. "장비는 못 껴입어."
연료는 이 주를 갔다. 그다음부터는 클린룸 안 습도가 바깥을 따라갔다.
마지막 날 남은 인원은 열아홉 명이었다. 정문 앞에 버스가 한 대 서 있었고, 사람들은 각자 캐비닛에서 뺀 것을 봉지에 담아 들고 있었다. 누가 화분을 들고 나왔다. 누가 그걸 보고 웃었고, 웃은 사람도 종이 상자를 안고 있었다.
"공장장님, 안 타십니까."
"먼저 가."
임세중은 정문 옆 쪽문에 열쇠를 넣고 두 번 돌렸다. 손잡이를 당겨 잠긴 것을 확인하고, 한 번 더 당겼다. 그러고 나서 봉투에 열쇠를 도로 넣었는데, 봉투를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라서 그냥 외투 안주머니에 넣었다.
신주의 팩스는 그날 종이가 떨어졌다.
차이야원은 새 롤을 갈아 끼우다 절단날에 손가락 옆을 베었다. 피가 종이에 한 방울 묻었다. 그녀는 그 장을 버리지 않고 그대로 썼다.
오전에 들어온 주문서는 열한 장이었다. 현물 가격은 겨울 전의 아홉 배였다. 그녀가 이 일을 시작한 뒤로 본 적 없는 숫자였고, 회의에서 부장은 세 번 웃었다.
그녀는 웃지 않았다.
"우리 능력으로 저 자리를 얼마나 메웁니까." 그녀가 물었다.
부장이 계산기를 두드렸다. 그리고 손을 멈췄다.
"…조금."
계약으로 묶인 고객에게는 계약가로 줘야 한다. 현물로 돌리면 값은 크지만 그 고객은 내년에 없다. 없어진 고객이 내년에 사 줄 물건도 같이 없어진다.
오후에 들어온 팩스는 다섯 장이었고 전부 취소였다. 메모리는 구했는데 다른 것이 없다고 했다. 화면이 없거나, 저장하는 다른 칩이 없거나, 이름도 처음 듣는 부품 하나가 없거나였다. 하나가 없으면 나머지 이백 개가 소용없다.
"저쪽이 언제 돌아옵니까." 부장이 물었다.
"모릅니다."
"모르면 우리는 설비를 늘려야 됩니까, 말아야 됩니까."
차이야원은 손가락에 붙인 반창고를 만졌다. 설비를 늘리면 이 년이 걸린다. 이 년 뒤에 저쪽이 돌아와 있으면 늘린 설비가 전부 짐이 된다. 안 늘리면 지금 오는 주문을 못 받는다.
"부장님." 그녀가 말했다. "우리가 지금 값을 아홉 배로 받는 건 저쪽이 없어서인데요. 저쪽이 아주 없어지면, 우리 물건을 사서 조립하던 데도 같이 없어집니다."
부장은 대답 대신 담배를 꺼내 물었다. 불은 붙이지 않았다.
그녀는 주문서를 검은 클립으로, 취소서를 빨간 클립으로 묶었다. 빨간 쪽이 매주 두꺼워졌다.
레이 갤러거는 4월 첫째 주에 자기 회사 노트북 라인을 세웠다.
그가 그 결정을 내린 것은 아니었다. 그는 그냥 부품을 사는 사람이고, 살 수 없다고 적어서 위로 올렸을 뿐이다. 자재 명세서는 이백 몇십 줄이었고 그중 한 줄이 빨간색이었다.
12월에 그 줄이 처음 노랗게 됐을 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창고에 있었으니까. 1월에도 있었다. 2월에는 줄어드는 게 보였다. 3월에 없어졌다.
그의 위에서는 대체품을 찾으라고 했다. 그는 찾아봤다. 대만이 있었고, 일본에 한 곳이 있었고, 미국 안에도 하나 있었다. 셋을 다 합쳐도 빈자리가 안 메워졌다. 대만 쪽은 값을 아홉 배로 부르면서 물량은 원하는 만큼 못 준다고 했다. 그가 이 일을 십사 년 했는데, 값이 문제가 아니라 물건 자체가 없다는 답을 받아 본 것은 처음이었다.
그는 지도를 열고 도시 이름을 쳤다. Icheon.
처음에 뜬 것은 Incheon이었다. 공항이 있는 데였다. 그는 삼 분쯤 그 지도를 들여다보다가 철자가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다시 쳤다. 서울에서 남동쪽으로 내려간 자리에 점이 하나 찍혔다. 지도를 확대해도 별로 나오는 게 없었다.
전화가 연결됐다. 상대는 잠을 못 잔 목소리였다.
"됐고." 갤러거가 말했다. "그러니까 내가 오늘부터 물어야 하는 건 언제 오느냐가 아니라, 오기는 오느냐군요."
'됐고.' 갤러거가 말했다. '그러니까 내가 오늘부터 물어야 하는 건 언제 오느냐가 아니라, 오기는 오느냐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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