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전 제7부 정지(停止)
37화제53장 멈추라는 말
2011년 9월 17일 ~ 9월 19일 08시 · 황해북도 신평 진지
종이가 두 장이었다.

행정병이 아니라 소대장님이 직접 들고 왔다. 오후 네 시쯤이었고 하늘이 맑았다. 소대장님이 종이를 내밀면서 아무 말도 안 해서 나는 또 사격 요청인 줄 알았다.
복사한 거라 글씨가 흐렸다. 오른쪽 아래가 접혔다 펴진 자국이 있었다. 여러 사람 손을 거쳐서 여기까지 온 종이다.
첫 장은 수신처하고 근거하고 그런 거였다. 나는 그런 건 잘 안 읽는다. 그래도 맨 위에 찍힌 도장은 봤다. 도장이 두 개였고 하나는 번져 있었다.
둘째 장 가운데에 이렇게 있었다.
2011년 9월 19일 09시 19분부로 일체의 사격을 중지한다.
나는 그걸 읽었다.
읽고 나서 밑으로 내려갔다. 자위권은 유지한다고 되어 있었다. 진지를 옮기지 말라고 되어 있었다. 상대편에 표지나 신호를 보내지 말라고 되어 있었고, 접촉하지 말라고 되어 있었다. 방호태세는 그대로 유지하라고 되어 있었다.
다시 위로 올라가서 그 줄을 한 번 더 읽었다.
09시 19분.
그게 제일 이상했다. 아홉 시면 아홉 시고 열 시면 열 시지 왜 십구 분인지 모르겠다. 십구 분은 무슨 시각인가. 밥 먹는 시각도 아니고 교대 시각도 아니다. 뭔가를 하다가 중간에 끊는 시각이다.
"소대장님."
"어."
"이거 왜 십구 분입니까."
소대장님이 나를 봤다. 그러고는 종이를 도로 받아서 자기도 그 줄을 봤다.
"모르겠다."
"위에서도 얘기 안 해 줍니까."
"안 해 준다."
나는 종이를 다시 받아서 세 번째로 읽었다. 세 번 읽고 나서 내가 뭘 느끼고 있나 생각해 봤다.
아무것도 없었다.
기분이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고 그냥 아무것도 없었다. 그게 좀 이상해서 나는 한 번 더 생각해 봤는데 그래도 없었다. 대신 생각난 건 탄이었다. 지금 스물두 발이 있다. 안 쏜 게 쌓여서 스물두 발이다. 그게 이제 어떻게 되나 싶었다.
그다음에 생각난 건 저녁밥이었다.
애들한테 말한 건 그날 저녁이었다.
세 가지가 한꺼번에 나왔다.
남 일병이 먼저 웃었다. 소리를 내서 웃었고, 웃으면서 반합 뚜껑을 두 번 쳤다. 그러다가 아무도 같이 안 웃으니까 뚝 그쳤다. 그 애 얼굴이 그친 다음에 어떻게 되는지 나는 봤다.
반장이 화를 냈다.
"그럼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건 뭡니까."
"뭐가."
"우리가 여기까지 왜 왔습니까. 여기 지금 어딥니까. 여기 남습니까 물러납니까. 그 얘기는 왜 없습니까."
"없다."
"없으면 안 되는 거 아닙니까."
그는 종이를 손가락으로 두 번 짚었다. 짚으면서 목소리가 커졌다. 그러다가 자기가 커진 걸 알고 그만뒀다. 그는 나보다 두 살 어리고 나한테 존대를 하는 사람이다. 그날은 나한테 화를 낸 게 아니었다.
고 이병은 아무 말도 안 했다. 밥을 먹고 있었고, 계속 먹었고, 다 먹고 나서 반합을 씻으러 갔다.
한길이는 한참 아무 말이 없었다. 이 사람은 계속 말하는 사람인데 그날은 십 분쯤 조용했다. 그러더니 물었다.
"오 병장님. 전화 됩니꺼."
"안 될걸."
"집에 말해야 되는데예."
"뭘 말하는데."
"그냥예." 그놈이 자기 무릎을 봤다. "우리 어무이가 뉴스를 안 봅니더. 무서워서 안 본다 캅디다. 그라믄 이거 모를 거 아입니꺼."
밤에 옆 포반 애가 와서 물었다.
"오 병장님, 저거 진짭니까."
"종이로 왔다."
"종이는 봄에도 왔지 않습니까."
봄에 온 건 다른 거였다. 그건 뭐가 어떻게 될 거라는 얘기였고 그대로 안 됐다. 나는 그 얘기를 하려다가 안 했다.
"진짜다."
"진짜면 왜 아직 방호태세 유지랍니까."
나는 대답을 안 했다. 그 애도 대답을 기다린 게 아니었다.
소대장님은 그날 밤에 대대에 두 번 확인했다. 한 번은 여덟 시에 했고 한 번은 열한 시에 했다. 열한 시에 확인한 걸 나는 옆에서 들었다. 대대에서 나온 말은 처음하고 똑같았다. 똑같은 말을 두 번 듣고 나서 소대장님이 수화기를 내려놓았는데, 내려놓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
밤에 나는 포신을 닦았다.
닦을 필요가 없었다. 팔월 십일일 이후로 이 포는 한 발도 안 냈다. 그런데도 나는 헝겊에 기름을 묻혀서 포신 위를 훑었다.
발판을 딛고 올라가서 위에서부터 내려왔다. 손이 닿는 데까지 가고, 안 닿으면 내려와서 발판을 옮기고, 다시 올라갔다. 세 번 옮겼다.
기름 냄새가 났다. 이 냄새는 내가 스무 살 때부터 맡은 냄새다. 처음에는 역했다.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고 오히려 이게 안 나면 뭔가 빠진 것 같다.
포신 아래쪽에 페인트가 벗겨진 자리가 있다. 작년 겨울에 뭐에 긁힌 건데 그 자리에 녹이 얇게 났다. 나는 그 자리를 오래 문질렀다. 문지르면 녹이 헝겊에 묻어난다. 묻어나는 만큼 없어지는 게 아니라는 걸 아는데도 문질렀다.
닦으면서 나는 이 포에 몇 명이 붙었었나를 세어 봤다.
처음에 다섯이었다. 연평도에서 다섯이었고 그중에 지금 여기 있는 건 나하고 한길이다. 그 뒤로 들어온 애들 이름을 나는 헬멧 안쪽에 적어 놨는데, 적어 놓은 게 몇 줄인지는 세지 않기로 했다. 세지 않기로 했는데 몇 줄인지는 안다.
포는 그대로다. 사람만 바뀌었다. 이 쇳덩이는 재작년에도 여기 있었고 내년에도 어딘가에 있을 거다.
한길이가 자다가 한 번 깼다. 뭐 하시냐고 물었다. 나는 자라고 했다. 그놈은 도로 누웠다가 또 일어나서 이번엔 그냥 내 옆에 앉아 있었다. 아무 말도 안 하고 앉아 있다가 다시 갔다.
그날 밤에 자는 사람이 없었다. 다들 누워는 있는데 자는 사람은 없었다. 누가 돌아누울 때마다 소리가 났다.

네 시 반쯤에 소대장님이 왔다.
발소리가 났고, 나는 돌아보지 않았다. 그가 내 왼쪽으로 오다가 오른쪽으로 돌아왔다. 이제 그것도 안 물어보고 한다.
발판 옆에 앉았다. 앉을 때 무릎에 손을 얹었다.
"안 잤어?"
"예."
"나도."
우리는 한동안 아무 말도 안 했다. 동쪽이 조금씩 밝아졌다. 밝아지는 건 색이 오는 게 아니라 검은 게 옅어지는 거다.
"오 병장, 전역이 언제지."
"십일월입니다."
"그러네."
또 조용해졌다. 어디선가 물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참호 덮개에 밤이슬이 맺혔다가 떨어지는 소리였다.
"나 규정집 다 외웠거든." 소대장님이 말했다.
"압니다."
"거기에 이런 건 없더라."
"뭐가 없습니까."
"멈추라는 말 다음에 뭘 하라는 게."
능선 윤곽이 나왔다. 어제까지 저기는 그냥 검은 덩어리였는데 지금은 나무가 한 그루씩 보였다.
나는 그때까지 헝겊을 손에 들고 있었다.
밝아지니까 그게 보였다. 원래 흰 거였는데 지금은 아니었다. 가운데가 시커멓고 가장자리로 갈수록 옅어졌다가, 끝에 가서 붉은 기가 도는 자리가 있었다. 녹이 묻은 자리다.
나는 그걸 손가락 사이에서 폈다 접었다. 손끝에 기름이 남아서 종이처럼 안 접혔다.
2011년 9월 19일 09시 ~ 12시 · 황해북도 신평
시계를 맞춘 건 전날 밤이었다.
소대장님이 대대 시계에 맞춰서 우리 것을 하나씩 맞췄다. 내 것은 삼십 초쯤 빨랐고 반장 것은 일 분 넘게 느렸다. 고 이병 것은 아예 죽어 있어서 배터리를 갈았다.
아홉 시부터 다들 손목을 봤다.
포상 안에 다 들어가 있었다. 그건 명령이었다. 방호태세 유지라고 되어 있으니까 우리는 아무 데도 안 가고 자리에 있어야 했다. 헬멧을 쓰고, 방탄복을 입고, 포 옆에 서서, 손목을 봤다.
아홉 시 십오 분.
아홉 시 십칠 분.
숨소리가 들렸다. 옆에 있는 사람 숨소리가 들릴 만큼 조용했는데, 사실은 그저께도 조용했고 지난주에도 조용했다. 요즘은 원래 아무 소리도 안 난다. 그래서 이게 표시가 안 난다. 뭐가 멈추려면 뭔가 나고 있어야 하는데 나고 있는 게 없었다.
십팔 분.
내 시계가 먼저 갔다. 초침이 열두 시를 지났다.
십구 분.
아무 일도 안 일어났다.
정확히 말하면 아무 소리도 안 났다. 그런데 그 전에도 안 났으니까 달라진 게 없었다. 나는 내 시계를 보고, 반장을 보고, 반장 시계를 봤다. 반장 시계는 아직 십팔 분이었다.
우리는 그렇게 사십 초쯤 더 서 있었다.
반장 시계가 십구 분이 됐을 때 그가 고개를 들었다. 나하고 눈이 마주쳤다. 둘 다 아무 말도 안 했다.
남 일병이 물었다.
"…지금입니까?"
"지금이다."
"근데 왜 아무것도 안 합니까."
나는 그 질문에 대답할 게 없었다. 뭘 해야 되는지 나도 모른다.
우리는 그 자리에 계속 서 있었다.
십 분쯤 지나서 소대장님이 무전으로 뭐라고 했고, 아무도 자리를 뜨지 말라는 얘기였다. 그래서 안 떴다. 삼십 분이 지났다. 헬멧 턱끈 자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열 시 사십 분에 소리가 났다.
멀리서 쿵 하고 한 번 났다. 그 순간 열몇 명이 동시에 몸을 낮췄다. 나는 3번포 방렬 다리 옆에 붙었고 손이 이미 장전 손잡이 쪽으로 가 있었다. 생각하고 간 게 아니다.
아무 일도 안 일어났다.
한참 있다가 무전이 왔다. 뒤쪽에서 공병이 뭘 무너뜨린 거라고 했다. 다리 하나를 치우는 중이라고 했다.
반장이 헬멧을 벗었다가 도로 썼다. 남 일병 얼굴이 하얬다.
그러고 나서 아무도 그 얘기를 안 했다.
열한 시까지 나는 세 번 무전기를 확인했다. 켜져 있는데도 확인했다. 옆 포반 애가 두 번 왔다 갔다. 무슨 일로 온 게 아니라 그냥 왔다가 갔다.
소대장님이 포상을 돌기 시작한 게 그때쯤이다.
한 포상에 삼사 분씩 있다가 다음으로 갔다. 우리 쪽에 왔을 때 남 일병이 물었다.
"소대장님, 이거 진짜 끝난 겁니까."
"명령대로 됐다."
"그러니까 끝난 겁니까."
소대장님이 잠깐 말을 안 했다.
"끝났다는 말은 아직 아무 데도 없다."
"그럼 뭡니까."
"오늘 아홉 시 십구 분부로 안 쏜다는 거다. 그것까지가 지금 있는 거다."
남 일병이 더 안 물었다. 나는 그 대답이 정직하다고 생각했다. 정직한데 아무한테도 도움이 안 되는 대답이었다.
애들은 그날 오후까지 이걸 안 믿었다. 믿는 것처럼 말은 하는데 몸이 안 믿었다. 밥 먹으러 갈 때도 헬멧을 안 벗었고, 참호 밖으로 나갈 때 두 번씩 주위를 봤고, 무전기 볼륨을 아무도 안 줄였다. 나도 그랬다. 나는 그날 하루 종일 3번포에서 스무 걸음 밖으로 안 나갔다.
애들은 그날 오후까지 이걸 안 믿었다. 믿는 것처럼 말은 하는데 몸이 안 믿었다. 밥 먹으러 갈 때도 헬멧을 안 벗었고, 참호 밖으로 나갈 때 두 번씩 주위를…
남은 7화 · 약 23,945자 · 약 3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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