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전 제6부 세계
34화제48장 라디오
소대장님이 온 건 열 시가 좀 넘어서였다.
발소리가 났고, 한길이가 먼저 일어났다. 소대장님이 손을 저어서 앉으라고 했다. 그러고는 참호 턱에 앉았다. 천천히 앉았다.

담배를 꺼내서 나한테 하나 줬다. 나는 받았다. 불은 그가 붙여 줬다.
고 이병하고 남 일병이 슬금슬금 반대편으로 갔다. 눈치가 빠른 애들이다.
한동안 아무 말도 안 했다. 라디오는 켜 놓은 채였고, 그쪽에서는 어디 항구 이름이 나왔다가 말았다.
"오 병장."
"예."
"라디오 잘 들려?"
"오른쪽으로 들으면 들립니다."
"그렇구나."
그러고 또 조용했다. 그가 담배를 두 번 털었다. 재가 참호 바닥으로 떨어졌다.
"새로 온 애들은 어때."
"손이 빨라졌습니다."
"며칠 됐지."
"열이틀입니다."
"열이틀에 손이 빨라져?"
"빨라집니다." 나는 말했다. "안 빨라지면 안 되니까요."
소대장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지도 쪽을 봤다. 손전등이 아직 켜져 있어서 종이 위가 밝았다.
"그거 어디서 났어."
"위문품에 있었습니다."
"애들 거네."
"예."
멀리서 한 발 소리가 났다. 우리 쪽도 저쪽도 아니고 그냥 어디서 났다. 둘 다 고개를 안 돌렸다.
"저기." 소대장님이 말했다. "그날 말이야."
나는 담배를 든 채로 있었다.
"윤 이병 말인데."
거기서 그가 멈췄다.
멈춘 자리가 길었다. 나는 그다음 말을 기다렸는데, 기다리면서도 안 나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느 쪽인지 나도 모르겠다.
그가 담배를 바닥에 비벼 껐다. 두 번 비볐다. 한 번이면 됐을 텐데 두 번 비볐다.
"아니다."
"예."
"아니야. 됐어."
나는 아무것도 안 물었다. 물어야 하나 싶었는데, 물으면 그가 대답을 할 거고, 대답을 들으면 나는 그걸 계속 갖고 있어야 한다. 나는 아직 그걸 받을 준비가 안 됐다.
소대장님은 조금 더 앉아 있다가 일어났다. 일어날 때 흙벽을 손으로 짚었다.
"내일 여섯 시에 탄약 온다."
"예."
"몇 개 오는지는 나도 몰라."
그가 가고 나서 나는 라디오를 조금 더 들었다.
아나운서가 나라 이름을 세 개 더 읽었고, 그중에 아는 건 없었다. 지도는 다시 펴 보지 않고 그냥 접어서 탄통 위에 올려놨다. 접힌 자리가 또 한 번 하얘졌다.
한길이가 물었다.
"소대장님 뭐라 캅디까."
"내일 탄약 온단다."
"그거 말고예."
"그거뿐이다."
한길이는 더 안 물었다. 이 사람은 계속 말하는 사람인데, 안 물어야 할 때는 안 묻는다. 그것도 배운 거다.
열한 시에 스위치를 내렸다.
그런데 소리가 안 끊겼다. 오른쪽 귀 안에서 그 잡음이 계속 났다. 라디오는 꺼져 있는데 났다. 나는 손바닥으로 귀를 눌렀다가 뗐다. 그래도 났다.
한참 있다가 그게 옅어졌다. 옅어지면서 그 자리에 풀벌레 소리가 들어왔다. 그러니까 그 소리는 아까부터 나고 있었던 거다. 라디오가 켜져 있는 동안에도, 소대장님이 앉아 있는 동안에도 나고 있었을 거다.
나는 라디오를 탄통 옆에 눕혀 놓고 지도 위에 손을 얹었다. 종이가 밤이슬에 좀 눅눅했다.
2011년 7월 · 황해북도 신평 부근 진지
트럭은 여섯 시에 온다고 했는데 여덟 시에 왔다.
비 때문이다. 칠월 들어서 길이 죽었다. 자갈을 깔아 놓은 데는 그래도 견디는데 흙길은 바퀴가 한 번 들어가면 그대로 내려앉는다. 트럭이 섰을 때 바퀴집에 진흙이 한 뼘씩 붙어 있었다.
내린 건 열다섯 발이었다.
팔레트로 오지 않고 낱개로 왔다. 그게 나는 좀 이상했다. 팔레트는 여덟씩이다. 여덟이 안 되니까 낱개로 오는 거다.
다섯 문에 열다섯 발. 한 문에 세 발이다.
"오 병장, 사인." 군수 담당관이 서류판을 내밀었다.
"몇 발입니까."
"거기 적힌 대로."
"열다섯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그럼 열다섯이야."
나는 사인을 했다. 볼펜이 젖어서 두 번 그었다.
"내일은 몇 발 옵니까."
"나도 몰라."
"지난주엔 스물넷 왔습니다."
"지난주는 지난주고." 상사가 서류판을 겨드랑이에 끼웠다. "배가 안 온단다. 나한테 묻지 마라. 위에서도 모른다."
꺼내는 데도 순서가 있다.
띠를 끊고, 덮개를 걷고, 안에 넣어 둔 나무받침을 뺀다. 탄체를 두 사람이 든다. 혼자 들 수 있는데 혼자 들면 안 된다. 그건 규정이 아니라 그냥 그렇게 하는 거다. 내려놓고 나서 도색을 본다. 벗겨진 데가 있으면 표시를 해 둔다. 그다음에 탄띠 자리를 손바닥으로 훑는다. 여기가 매끄러워야 한다.
열다섯 발을 다 훑는 데 이십 분쯤 걸렸다. 아침마다 하는 일이고 이십 분이면 끝난다. 예전에는 이걸 세 시간 했다.
장약은 남아 있다. 탄이 없는 거지 장약이 없는 게 아니다. 창고 뒤에 장약통이 아직 서른 몇 개 쌓여 있고 그건 아무도 안 세어 본다. 나만 안다. 나는 그것도 세고 있다.

신관은 따로 왔다. 상자에서 꺼내서 하나씩 닦았다. 습기가 올라오면 나사산에 녹이 슨다. 고 이병한테 헝겊을 주고 방향을 잡아 줬다. 그 애는 아직 왼손을 못 쓴다. 쓰면 되는데 안 쓴다.
반장은 우리 반에 온 지 두 달 된 하사다. 나보다 두 살 어리고 나한테 존대를 한다. 그게 서로 불편해서 우리는 웬만하면 말을 안 섞는다. 아침에 그가 물었다.
"오늘 것도 세 발입니까."
"예."
"어제도 세 발이었는데요."
"예."
그는 그러고 자기 포로 갔다. 물어볼 걸 다 물어본 사람 걸음이 아니었는데, 더 물어봐야 나올 게 없다는 것도 아는 걸음이었다.
열한 시쯤 소대장님이 왔다.
"오 병장. 몇 발 남았어."
"열다섯 있습니다."
"오늘 온 거 말고."
"오늘 온 게 열다섯입니다. 어제 거는 어제 다 나갔습니다."
소대장님이 수첩을 폈다. 좌표를 불러 줬고 나는 그걸 받아 적었다. 손이 먼저 움직였다. 적고 나서야 이게 사격 요청이라는 걸 알았다.
"뭐가 있답니까."
"사람." 소대장님이 말했다. "열댓 명."
"차량은요."
"없대."
"무기는요."
"안 보인대."
나는 수첩을 봤다. 숫자가 여덟 자리다. 그 여덟 자리 안에 열댓 명이 있다.
"관측관이 뭐랬는데요."
소대장님이 잠깐 있다가 말했다.
"솥을 들고 있다더라."
나는 아무 말도 안 했다. 소대장님도 안 했다. 우리는 포상 옆에 서서 앞을 봤다. 앞은 능선이고 그 뒤는 안 보인다.
"네 생각은."
"…지금 쏘면 밤에 없습니다."
"밤에 뭐가 온다는 보장도 없잖아."
"없습니다."
그러고 우리 둘 다 쏘자는 말을 안 했다. 안 쏘자는 말도 안 했다. 소대장님은 전화하러 갔고 나는 신관을 마저 닦았다.
한 시쯤에 그 좌표 얘기가 없어졌다. 없어졌다고 누가 말해 준 게 아니라 그냥 그 뒤로 안 나왔다.
오후에 앞쪽 미군 무전이 우리 쪽으로 새어 들어왔다.
주파수가 가까워서 그렇다고 했다. 알아듣는 사람이 없어서 다들 그냥 켜 놓고 산다. 그런데 한길이가 한 단어씩은 잡는다.
"에어. 저거 에어 아입니꺼."
"그래서."
"노 에어라 캅니다."
"어제도 그랬다."
"그저께도 그랬지예."
사흘이다. 앞에 있는 미군 중대가 사흘째 하늘에서 아무것도 못 받고 있다. 왜 안 오는지는 저쪽 무전에서도 안 나온다. 안 온다는 말만 나온다.
나는 봄에 본 그 미군 보급 병장 생각이 났다. 배가 나오고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 손바닥만 한 기계가 고장 났는데 부품이 없다고, 어디에도 없다고 했다. 노 파츠 애니웨어.
그때는 그게 기계 얘긴 줄 알았다.
"오 병장님." 남 일병이 물었다. "저기 저 사람들은 우째 삽니까."
"어디."
"저 앞에예. 우리가 안 쏘면 저 사람들은 하루 종일 뭐 합니까."
나는 대답을 못 했다. 우리도 하루 종일 뭐 하는지 모르겠다.
해 지기 전에 나는 관측소에 한 번 올라갔다.
올라갈 일이 있어서 올라간 게 아니라 배터리를 갖다 주러 갔다. 관측관이 관측경을 잠깐 비켜 줬다.
능선 너머가 평지고 그 가운데에 길이 하나 있다. 길 옆에 사람들이 있었다.
세어 보니 열하나였다. 열댓이라고 한 게 아침이니까 몇은 어디로 갔거나 앉아서 안 보이는 거다. 걷는 게 느렸다. 한 사람이 앞서고 나머지가 줄도 아니고 무리도 아닌 모양으로 따라갔다. 군복은 군복인데 색이 다 달랐다.
총을 든 사람은 없었다.
"무기는 어디 뒀답니까." 내가 물었다.
"버렸겠지." 관측관이 말했다. "저러고 다니는 게 저기만 있는 게 아니야. 사흘 전에는 스무 명쯤 되는 게 남쪽으로 내려갔어. 우리 쪽으로."
"어떻게 됐습니까."
"헌병이 받았어."
나는 관측경에서 눈을 뗐다. 저게 부대냐고 물으려다가 안 물었다. 부대는 아니다. 그런데 부대가 아니면 뭔지도 모르겠다. 저 사람들은 어디에도 안 속해 있는데 아직 저기에 있다.
"솥 든 사람은 어느 겁니까."
"아까 그 사람은 갔어."
저녁에 비가 그쳤다.
그치니까 서쪽이 오래 밝았다. 참호 물을 퍼내는데 남 일병이 깡통을 놓쳐서 물이 도로 들어갔다. 아무도 뭐라 안 했다. 다시 퍼면 된다.
열다섯 발은 그대로 있었다.
한 문에 세 발씩, 포상마다 상자 옆에 세워 놓은 그대로다. 아침에 내가 세운 각도 그대로다. 나는 다섯 개 포상을 다 돌았다. 세, 세, 세, 세, 세. 열다섯.
3번포 앞에서 나는 상자 앞에 쪼그려 앉았다.
이걸 오늘 안 쏘면 내일은 이게 있는 거다. 내일 열다섯이 또 오면 서른이 된다. 그런데 내일 안 오면 그냥 열다섯이다. 오늘 열다섯을 다 쓰고 내일 안 오면 영이다.
아껴 두면 필요할 때 없고, 쓰면 다음이 없다.
이런 걸 누가 가르쳐 주지도 않았고 어디 적혀 있지도 않다. 나는 이걸 아침마다 혼자 정한다. 정해 놓고 하루 종일 그게 맞았나 생각한다. 저녁이 되면 맞았는지 틀렸는지 알 수가 없다. 아무 일도 안 일어나면 맞은 건지 틀린 건지 알 방법이 없다.
뚜껑을 닫았다.
걸쇠가 잘 안 걸려서 손바닥으로 눌렀다. 눌러도 안 걸리길래 한 번 더 눌렀다. 그러고는 그 위에 손을 얹은 채로 있었다.
나무가 젖어 있어서 차가웠다. 손을 떼면 손자국이 남을 것 같았다.
나무가 젖어 있어서 차가웠다. 손을 떼면 손자국이 남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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