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LLUSIONTOON

38화제54장 아홉 시 십구 분

· 44화 중 38화 · 3,478자 · 약 5분 · 무료

글자3 / 5

새소리를 들은 건 열한 시가 좀 넘어서였다.

나는 오른쪽 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 있으면 소리가 어디서 오는지 대충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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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선 아래쪽이었다. 두 마리였다. 하나가 짧게 세 번 울고 하나가 그보다 길게 울었다. 그러고는 한참 없다가 또 그랬다.

나는 그 자리에 서서 그걸 들었다.

저 소리는 오늘 처음 나는 게 아닐 거다. 어제도 났을 거고 그저께도 났을 거다. 지난달에도 났을 거다. 나는 그게 나고 있는 줄을 몰랐다.

내 귀는 그동안 다른 걸 듣고 있었다. 그게 뭐였는지는 지금도 잘 설명을 못 하겠다. 소리가 아니라 소리가 날 자리 같은 거였다. 나는 그 자리를 계속 지키고 있었고, 지키느라 그 옆에 있는 건 하나도 안 들어왔다.

지금은 그 자리가 비었다. 비니까 다른 게 들어왔다.

한길이가 내 옆으로 왔다.

"뭐 있습니꺼."

"새."

"어디예."

"저기 아래."

한길이가 한참 듣더니 고개를 저었다.

"저는 안 들립니더."

"들리는데."

"오 병장님이 더 잘 들으시네예."

그놈은 그 말을 하고 나서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 알고 입을 다물었다. 나는 못 들은 척했다. 왼쪽으로 서 있어서 진짜로 못 들은 걸로 할 수 있었다.


고 이병이 운 건 그다음이었다.

포상 벽에 등을 대고 앉아 있었는데 소리가 안 났다. 어깨가 먼저 움직였고, 그다음에 손등으로 얼굴을 눌렀다. 헬멧을 안 벗고 그랬다.

아무도 그쪽을 안 봤다.

반장은 사격제원판을 지우고 있었다. 팔월 십일일 것이 그때까지 붙어 있었다. 그걸 헝겊으로 지웠는데 잘 안 지워져서 두 번 지웠다.

남 일병은 탄약 상자 줄을 맞추고 있었다. 이미 맞아 있었다.

한길이는 자기 신발을 봤다.

나는 무전기 쪽으로 갔다가 돌아왔다. 갈 일이 없었는데 갔다.

그 애가 다 울 때까지 우리는 각자 할 일이 있는 사람처럼 굴었다. 그러고 나서도 아무도 아무 말 안 했다. 밥때가 돼서 반합을 들고 줄을 섰는데 그 애가 맨 뒤에 섰고, 남 일병이 자리를 하나 비켜 줬다. 그게 그날 우리가 그 애한테 한 말 전부였다.


열두 시 조금 전에 건너편에서 사람이 나왔다.

능선 아래 길 쪽이었다. 처음엔 하나였다. 걸어 나와서 길 가운데에 섰다.

포상 안이 조용해졌다. 반장이 관측경을 잡았고 나는 그냥 눈으로 봤다. 멀어서 얼굴은 안 보였다. 색깔만 보였다.

"무기 있습니까." 남 일병이 물었다.

"없다." 반장이 말했다.

뒤에서 둘이 더 나왔다. 셋이 나란히 서지도 않고 그냥 각자 섰다. 하나는 쪼그려 앉았다.

우리 쪽에서도 사람들이 참호 밖으로 나왔다. 나가지 말라는 말은 없었고 나가라는 말도 없었다. 그냥 하나씩 나와서 흙둑 위에 섰다.

옆 포상에서도 나왔고 그 옆에서도 나왔다. 나중에 세어 보니 우리 쪽에 스무 명 넘게 서 있었다. 서로 말을 안 했다. 누가 뭐라고 하면 다 같이 그쪽을 봤다가 다시 앞을 봤다.

고 이병도 나와 있었다. 눈이 아직 부어 있었는데 그건 아무도 안 봤다.

아무도 총을 들지 않았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를 봤다. 시간이 얼마나 갔는지 모르겠다. 오래 갔다. 그 정도 거리에서는 서로 뭘 하고 있는지도 잘 안 보인다. 그냥 저기 사람이 있고 여기 사람이 있다는 것만 안다.

가운데 있던 사람이 팔을 들었다.

인사인지 뭘 가리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 사람은 팔을 들고 잠깐 있다가 내렸다.

내 오른손이 올라갔다.

허리께까지 갔을 때 나는 명령서에 있던 줄이 생각났다. 표지나 신호를 보내지 말 것. 접촉하지 말 것.

손이 거기서 멈췄다.


2011년 9월 23일 · 평안남도 순천 부근 / 서울 합동참모본부

삽이 모자랐다.

중대에 삽이 열아홉 자루 있었고 사람은 백 명이 넘었다. 그래서 반씩 돌아가며 했다. 한 시간 파고 한 시간 앉아 있었다. 앉아 있는 쪽은 갓돌에 줄지어 앉아서 파는 쪽을 봤다.

왕레이는 파는 쪽이었다.

접수 목록은 지난달에 끝났다. 마지막 장을 넘기고 나서 그는 붓펜을 상자에 넣고 뚜껑을 닫았다. 그다음 날부터 그는 다른 사람들과 같은 일을 했다. 상위가 그를 다시 부르는 일은 없었다.

삽자루가 손에 익는 데 사흘 걸렸다. 붓을 오래 잡은 손은 삽을 잡을 때 힘 주는 자리가 다르다. 그는 그것을 물집 세 개로 배웠다.

날이 좋았다. 9월 하순이었고 하늘이 높았고 바람이 서쪽에서 왔다.

길은 나흘 전부터 조용했다. 위에서 무슨 시각이 정해졌다는 이야기가 내려왔고, 그 시각이 지났고, 그 뒤로 아무 일도 없었다. 중대원들은 그것을 크게 이야기하지 않았다. 이야기해도 달라지는 게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헬멧을 벗고 일하는 사람이 늘었다.

쑨웨이 상위는 아침마다 같은 말을 했다.

"갓길에서 벗어나지 마라. 공병이 아직 다 훑지 않았다."

"어디까지 훑었습니까." 누가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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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른다. 그러니까 벗어나지 마라."

쉬는 시간에 옆에 앉은 사람이 물었다. 같은 반의 열아홉 살짜리였다. 그는 후난 사람이라 겨울 내내 발가락을 앓았다.

"서기 노릇 안 하니까 어때."

"팔이 아프다."

"그거 말고."

왕레이는 잠깐 생각했다.

"이름을 안 물어봐도 된다."

"뭐?"

"쓸 때는 물어봐야 되잖아. 이름이 뭐냐, 어디냐, 몇 년생이냐. 그걸 하루에 백 번씩 물어보는 거다."

"그게 뭐 어때서."

"어떻지는 않다." 그가 말했다. "그냥 안 물어보니까 편하다는 거다."

열아홉 살짜리는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한 얼굴을 하고 물통을 들었다. 왕레이도 더 설명하지 않았다. 설명할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정오 무렵에 왕레이는 웅덩이 앞에 섰다.

길 가운데가 파여서 물이 고여 있었다. 깊지는 않았다. 발목도 안 되고 손바닥 두께쯤이었다. 물이 흐리지 않고 맑았다. 사흘 비가 안 왔는데도 마르지 않은 것을 보면 아래에서 뭐가 나오는 자리였다.

그는 그 물을 잠깐 봤다.

이월에 압록강에 손을 넣었을 때 손이 자기 손이 아니게 됐던 것이 생각났다. 그때 저우 중사가 옆에 있었다. 저우 중사는 오월에 청천강 남쪽에서 죽었고, 그의 이름은 왕레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명부에서 지웠다. 그때 왕레이는 다른 일을 하고 있었다.

물을 퍼내려면 흙을 먼저 옆으로 밀어야 한다. 서서 하면 삽이 안 들어간다. 발을 낮은 데 놓고 각도를 만들어야 한다.

그는 갓길 쪽으로 한 걸음 옮겼다.

한 걸음이었다. 흙이 무른 데였고, 발이 삼사 센티 들어갔다.


소리는 짧았다.

포탄 소리가 아니었다. 그것보다 훨씬 작고 마른 소리였다. 누가 손뼉을 한 번 크게 친 것에 가까웠다. 갓돌에 앉아 있던 사람들 중 몇은 처음에 고개를 안 들었다.

그다음이 조용했다.

삽 한 자루가 진흙에 꽂힌 채 서 있었다.

사람들이 뛰었다. 앉아 있던 쪽이 먼저 일어났고 파던 쪽이 그다음이었다. 스무 명쯤이 한꺼번에 뛰어서 길이 좁아졌다.

맨 앞에 온 것은 같은 반의 열아홉 살짜리였다. 그는 무릎을 꿇으면서 손을 뻗다가, 뻗은 손을 어디에 놓아야 할지 몰라서 공중에 잠깐 두었다. 그 손이 떨렸다.

그 뒤에 쑨웨이 상위가 왔다. 상위는 오는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도착해서도 하지 않았다. 그의 얼굴은 위생병을 부르라고 소리치는 사람의 얼굴이 아니라, 이미 무엇을 본 사람의 얼굴이었다. 그는 그 얼굴을 삼 초쯤 하고 있다가 고쳤다. 고치고 나서 소리쳤다.

"둘씩만 들어와! 나머지 물러서!"

물웅덩이의 물이 한 번 흔들렸다가 다시 잔잔해졌다.

나중에 공병이 와서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알아냈다. 미제 집속탄에서 나오는 자탄이었다. 어느 날 하늘에서 어미탄이 열렸고, 안에 든 것들이 흩어졌고, 그중 얼마는 터지지 않았다. 그런 것이 이 나라 땅에 얼마나 남아 있는지 세어 본 사람은 없었다. 그 무기를 금지하는 협약이 있었지만 여기서 싸운 나라들은 어느 쪽도 거기 들어가 있지 않았다.

스물한 살이었다.

명부는 세 부가 있다. 하나는 중대가 갖고, 하나는 사단이 갖고, 하나는 단둥에 있다. 단둥에 있는 것은 돌아올 때 맞춰 보려고 남겨 둔 것이다. 그의 이름은 그가 직접 정서한 것이었고, 획이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서울은 그날 흐렸다.

한지환은 판문점에서 닷새 만에 돌아와 있었다. 책상 위 결재함에 서류가 열 몇 건 쌓여 있었고 그는 위에서부터 순서대로 처리했다.

아래에서 세 번째가 8월 손실 보고였다.

그는 그것을 꺼내 놓고 다른 것을 먼저 다 끝냈다. 마지막에 그것만 남았다. 창밖이 어두워지고 있었고 방에는 그 혼자였다.

철을 열었다.

부대별로 되어 있었다. 육군 1사단은 네 번째였다. 8월 11일 자 표가 한 장이었고, 표에는 계급, 성명, 군번, 발생 일자, 발생 지역, 구분이 있었다.

그는 손가락을 종이에 대고 내려갔다.

일곱 번째 줄이었다.

그는 그 줄을 소리 내어 읽었다.

"일병 한도영."

방에 아무도 없었다. 그는 한 번 더 읽었다.

"일병, 한도영. 이천십일년 팔월 십일일. 황해북도 신평 부근. 전사."

그는 그 줄을 손가락으로 짚은 채 한동안 있었다.

8월 중순에 통보를 받았다. 그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알고 있는 것과 이 종이에 적혀 있는 것이 왜 다른지는 설명할 수 없었다. 이 종이에서 그의 아들은 그의 아들이 아니고 부대의 손실이었다. 손실은 숫자로도 적히고 이름으로도 적힌다. 이 표는 이름으로 적는 표였다.

그는 그 장을 접지 않았다. 철을 덮지도 않았다. 펴 놓은 채로 두고 일어섰다.

문 앞에서 당직 부관과 마주쳤다.

"중령님, 야근 명단에 올릴까요."

"오늘은 안 올려도 됩니다."

"예?"

"정시에 나가겠습니다."

부관이 잠깐 그를 봤다. 그 말을 이 방에서 들은 것이 언제였는지 부관도 기억나지 않는 얼굴이었다. 한지환 자신도 기억나지 않았다. 작년 십일월 이십삼일 이후로 그가 정시라는 단어를 쓴 적이 있는지 그는 생각해 보았고, 생각이 나지 않았다.

부관이 잠깐 그를 봤다. 그 말을 이 방에서 들은 것이 언제였는지 부관도 기억나지 않는 얼굴이었다. 한지환 자신도 기억나지 않았다. 작년 십일월 이십삼일 이후…

남은 6화 · 약 20,467자 · 약 2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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