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변 제2부 8,000
9화제13장 드럼 마흔 개
1994년 5월 30일 · 다롄항 제3부두 창고
드럼은 파란색이었다.

창고 안은 어두웠고 문 쪽에서만 빛이 들어와서, 안쪽으로 갈수록 파란색이 검은색이 되었다. 네 줄로 서 있었다. 나는 문간에 서서 줄마다 세었다.
열. 열. 열. 열.
마흔이었다. 그 옆에 작은 드럼 열두 개가 따로 서 있었다. 그쪽은 회색이었고 뚜껑에 봉인이 감겨 있었다.
"강 사장, 뭘 세고 있어." 왕더셩이 뒤에서 말했다. "송장에 다 적혀 있는데."
"습관입니다."
"군대 습관이지." 그가 웃었다. "군대는 사람도 세고 밥도 세고. 장사는 돈만 세면 돼."
오세환이 손전등을 켜고 안쪽 줄로 들어갔다. 드럼 옆면의 로트 번호를 하나씩 비춰 보는 것이 그의 일이었다. 나는 그렇게 하라고 시킨 적이 없는데 그는 언제부턴가 그렇게 하고 있었다.
화공수출입공사에서 나온 직원은 아직 스물 몇으로 보이는 남자였는데, 창고 안이 춥다고 계속 손을 비볐다.
"쉰두 통, 맞습니까?" 그가 물었다.
"쉰둘입니다."
"그럼 서명을."
안쪽에서 오세환의 목소리가 났다. 로트 번호를 하나씩 읽는 소리였다. 나는 수첩을 펴고 그것을 받아 적었다. 앞 네 자리는 다 같았고 뒤 두 자리만 달랐다.
"사장님, 이거 다 한 로트입니다. 뒷자리만 통 번호예요."
"적어 놔."
"이걸 왜 적습니까."
"나중에 누가 물으면 대답하려고."
그 애가 뭐라고 대꾸하려다 말았다. 손전등이 다음 줄로 넘어갔다.
성적서는 한 장이었다.
A4 크기에 회사 도장이 두 개 찍혀 있었다. 항목은 여섯 줄이었고, 내가 보는 줄은 두 개였다.
방향족 0.7퍼센트. 인화점 81도.
계약서에 적힌 규격은 방향족 1.0퍼센트 이하, 인화점 77도 이상이었다. 숫자는 안쪽으로 들어와 있었다. 좋은 물건이라는 뜻이다.
"이거 이번 물건 것 맞습니까."
직원이 손을 비비다 말았다. "그건 샘플 로트 성적서입니다."
"그럼 이 마흔 통은."
"출하 로트 성적서는 선적할 때 같이 갑니다. 원래 그렇게 합니다."
"원래 그렇게 하는군요."
"공장에서 다 그렇게 합니다." 그가 조금 웃었다. "샘플이랑 본품이 다르면 그게 공장입니까."
옳은 말이었다. 이 바닥에서 그 말은 언제나 옳다. 나는 성적서를 접어 안주머니에 넣었다. 접는 자리가 한 번 더 생겼다.
작년 겨울에 리광호가 넘긴 목록의 서른몇 번째 줄이 이것이었다. 나는 그때 화학식을 한 자씩 옮겨 적으면서 그게 뭔지 몰랐다. 지금은 대충 안다. 물건에 값을 매기려면 그게 어디에 쓰이는지를 알아야 하고, 알고 나면 모르던 때로 돌아갈 수 없다.
기름이다. 그런데 태우는 기름이 아니라 무엇을 녹여 내는 기름이다.
회색 드럼 열두 개는 값이 파란 것 마흔 개보다 비쌌다. 봉인이 감긴 뚜껑에 프랑스어가 인쇄되어 있었고, 그 위에 홍콩 중개상의 스티커가 덧붙어 있었다. 나는 그 스티커를 손톱으로 눌러 보았다. 잘 붙어 있었다.
이 회색과 저 파란색이 섞여야 뭔가가 된다는 것까지가 내가 아는 전부였다. 어떤 비율로 섞는지, 섞은 다음에 무엇을 넣는지는 내가 알 일이 아니었고, 물어본 적도 없었다.
계약서는 왕더셩의 회사 이름으로 나갔다.
서류상 최종 수요처는 흥남비료연합기업소였다. 비료공장에 인화점 81도짜리 세척유가 8천 리터 들어가는 것이 이상하냐고 물으면, 이상하지 않다고 대답할 사람이 세 나라에 걸쳐 스무 명은 된다.
나는 서명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한 번도 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하지 않을 것이었다. 내 이름이 종이에 닿는 순간 나는 상인이 아니라 증거가 된다.
"값은 왜 이래." 왕더셩이 계산기를 두드리며 투덜거렸다. "작년 이맘때면 이거 육천 위안이었어. 지금은 만이야."
"위안이 내려갔지 값이 오른 게 아닙니다."
"내려간 놈이나 오른 놈이나 내 주머니에서 나가는 건 똑같아." 그가 계산기를 흔들었다. "정월 초하루에 나라가 환율을 하나로 만들어 놓으니까 하룻밤에 삼 할이 날아갔어. 강 사장, 자네는 달러로 받으니까 몰라."
"그러니까 제가 사흘 빨리 드리지 않습니까."
그가 웃었다. 이 사람은 돈 얘기를 할 때만 진짜로 웃는다.
"납기는." 내가 물었다.
"이달 안에 받아야 한다고 저쪽에서 그러더군." 왕더셩이 계산기를 주머니에 넣었다. "리 선생이 지난주에 두 번 전화했어. 두 번 하는 사람이 아니야."
"이달 안이면 촉박한데요."
"촉박하면 값이 올라가지."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다롄에서 배로 단둥까지 올리고, 세관 삼호 창고에서 화차 붙이고, 우의교 넘기면 끝이야. 서류만 깨끗하면 사흘이면 돼. 서류가 지저분하면 삼 주야."
"제 서류는 깨끗합니다."
"그러니까 자네하고 하는 거지."
일이 끝난 줄 알았는데 그가 서류를 한 장 더 내밀었다.
"이것도 같이 실어."
"이게 뭡니까."
"열교환기 관다발. 두 조."
나는 그 종이를 읽었다. 강종 표기가 있었고 수량이 있었고 단가는 비어 있었다.
"이건 우리 계약에 없는데요."
"내 거야." 왕더셩이 종이를 내 손에서 도로 가져가 계약서 뒤에 끼워 넣었다. "덤으로 넣는 거지. 저쪽에서 봄부터 달라고 했던 건데 내가 물건을 이제 잡았어."
"어디서 잡았습니까."
"어디긴 어디야, 물건 있는 데서 잡았지." 그가 나를 보았다. 웃는 얼굴이었는데 눈은 아니었다. "강 사장. 이건 내 장사야. 자네 몫은 없어."

나는 손을 들었다. 알겠다는 뜻이었다.
"우리 아버지가 그랬어." 왕더셩이 서류를 접으며 말했다. "물건은 사람을 안 속인다. 사람이 사람을 속이지. 나는 그 말이 반은 틀렸다고 봐."
"어느 반이."
"물건도 속여."
그는 그 말을 하고 나서 자기가 한 말이 재미있다는 듯이 한참 웃었다.
밖으로 나오니 바다 냄새가 났다. 다롄의 5월 말은 서울보다 이 주쯤 늦어서 아직 바람이 찼다.
오세환이 목록을 들고 따라 나왔다.
"사장님, 관다발은 우리 서류에 안 올리는 겁니까."
"우리 게 아니니까."
"그런데 같은 화차에 실릴 거 아닙니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오세환은 더 묻지 않았다. 그 애는 언제나 딱 한 번만 묻는다.
부두에서는 짐배 한 척이 밤 물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크레인이 멈춰 있었고, 그 아래 그늘에서 인부 대여섯이 등을 대고 앉아 담배를 나눠 피우고 있었다. 저 배가 아니면 다음 배일 것이고, 단둥에 닿으면 거기서부터는 바퀴가 하는 일이었다.
창고 문이 닫히기 전에 나는 다시 들어갔다. 첫 줄 세 번째 드럼 앞에 쪼그려 앉아서 마개를 반 바퀴만 돌렸다.
숨을 들이켰다.
등유 냄새 같았다. 그런데 등유보다 묽고, 어딘가 단내가 섞여 있었다. 손끝에 조금 묻혀 비볐더니 미끄럽지 않고 금방 말랐다.
나는 마개를 도로 잠갔다. 손가락은 창고 밖에 나와서도 한참 동안 그 냄새가 났고, 그날 저녁 호텔에서 두 번 씻고 나서야 없어졌다.
1994년 6월 2일~5일 · 서울 남산, 안기부 해외공작실 203실 / 안가
기안은 세 장이었다.
윤성복이 그것을 책상에 올려놓은 것은 6월 2일 저녁 여섯 시가 조금 지나서였다. 라디오에서는 워싱턴 쪽 이야기가 되풀이되고 있었다. 미국이 유엔 안보리에서 제재를 추진하겠다는 것이었고, 아나운서는 제재라는 단어를 세 번 말했다.
정만호는 라디오를 끄지 않았다. 소리가 있는 편이 종이를 읽기에 나았다.
첫 장은 표지였다. 제목은 「대상시설 공정지연 유도 방안」이었고, 그 아래 작은 글씨로 사업명과 대상선이 적혀 있었다. 대상선은 베이징-단둥이었고, 운용요원 표시는 영문 두 자와 숫자 하나였다.
둘째 장에 세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추출용 희석제였다. 계약 규격에 못 미치는 로트를 확보해 두었고, 물량은 사십 드럼, 규격 미달의 성질은 방향족과 올레핀 함량이 각각 상한을 넘는다는 것이었다. 예상 결과는 두 줄로 적혀 있었다. 공정 효율 저하, 재작업 및 납기 지연.
둘은 온도 계측기 계열이었다. 확보 가능하다는 표시가 있었고, 옆에 물음표가 하나 붙어 있었다.
셋은 열교환기 관다발의 강종이었다. 이쪽에는 "제3자 경로 확인 중"이라고만 되어 있었다.
셋째 장은 결재란이었다. 칸이 두 개뿐이었다. 부실장과 실장. 그 위로 올라가는 칸은 애초에 인쇄되어 있지 않았다.
벽에는 작년 봄부터 붙어 있는 도표가 있었다. 저쪽이 사는 물건들이 제조사에서 홍콩으로, 홍콩에서 베이징으로, 베이징에서 단둥으로 이어지는 화살표였다. 처음 붙였을 때는 화살표가 여섯 개였고 지금은 열한 개다. 열한 개 중 셋이 한군데를 지난다. 그 한군데에 회사 이름이 적혀 있고, 그 이름은 작년 사월에 이 방에서 정했다.
정만호는 그 도표를 보면서 종이를 넘겼다. 종이 넘기는 소리가 라디오보다 컸다.
"실장님."
윤성복은 문 앞에 서 있었다. 그는 앉으라고 하기 전에는 앉지 않는 사람이었고, 앉으라고 해도 등을 붙이지 않았다.
"둘째하고 셋째는 왜 물음표야."
"확실치 않아서 붙였습니다. 계기 쪽은 물건이 어디 것인지 저희가 못 봅니다. 관다발은 저쪽 중개인이 자기 장사로 하는 겁니다."
"그럼 우리가 하는 게 아니잖아."
"저희가 하는 게 아닌데 같은 화차에 실립니다." 윤성복이 서류철을 고쳐 잡았다. "그래서 올렸습니다. 알고 있었느냐 몰랐느냐가 나중에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규정에는 뭐라고 돼 있나."
"저희가 인지한 사항은 기록하게 돼 있습니다."
"기록했군."
"기록했습니다."
정만호는 둘째 장을 한 번 더 보았다. 물음표 두 개가 나란히 있었다.
"그 친구는." 그가 물었다. "이걸 어디까지 아나."
"아무것도 모릅니다. 지시는 화물 인수 단계에서만 내려갑니다."
"모르는 편이 낫지."
"저는 그 친구가 못 미덥습니다, 실장님." 윤성복이 처음으로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그 사람은 저쪽 사람들하고 밥을 너무 자주 먹습니다. 보고서에 상대 이름이 나올 때마다 씨자를 붙입니다."
"장사꾼이 장사꾼한테 씨자를 붙이지 그럼 뭐라고 하나."
"공작원입니다."
"그래서 붙이는 거야." 정만호가 서류를 덮었다. "자네는 저 친구를 안 믿어도 돼. 나도 안 믿어. 믿는 게 아니라 쓰는 거니까."
"실장님." 윤성복이 말했다. "하나 여쭙겠습니다."
"해."
"이거 지연입니까, 파괴입니까."
방 안이 조용해졌다. 라디오에서는 이제 다른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어디선가 비가 온다는 예보였다.
"지연이야."
정만호는 자기가 그 말을 하는 것을 들었다. 목소리가 평소보다 반음 낮았다. 그는 그것을 알아차렸고, 알아차렸다는 것을 윤성복이 알아차리지 못했기를 바랐다.
"알겠습니다."
"윤 부실장."
"예."
"기안에 목표를 적을 때 말이야. 납기 지연 및 공정 불량 유발. 그렇게 적어."
"이미 그렇게 적혀 있습니다."
"그럼 됐어."
'이미 그렇게 적혀 있습니다.'
남은 34화 · 약 121,985자 · 약 2시간 54분
좋아요와 책갈피는 이 기기에 저장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