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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제14장 판단 보류

· 43화 중 10화 · 3,468자 · 약 5분 · 무료

글자3 / 5

이튿날 아침, 그는 셋째 장에 손을 댔다.

첫 항목 옆에 승인이라고 썼다. 글자 두 자였다.

영변 10화 제14장 판단 보류 — 헤더컷

둘째와 셋째 옆에는 판단 보류라고 썼다. 넉 자씩 두 번, 여덟 자였다. 쓰고 나서 잉크가 번지지 않게 손등으로 바람을 부치지 않고 그냥 두었다.

인주는 마른 편이었다. 그는 도장에 두 번 눌러 습기를 먹인 다음 결재란 아래쪽에 찍었다. 종이가 얇아서 밑장에 자국이 배었다.

동작은 한 번이었다. 손목이 내려갔다 올라오는 시간을 재면 일 초가 안 된다.

그는 그것을 서류철에 넣고 옆으로 밀어 놓은 뒤, 아침에 받아 둔 다른 서류를 폈다. 그쪽은 요원 두 사람의 여비 정산이었고, 항목이 열아홉 개였다. 그것을 다 맞추는 데 사십 분이 걸렸다.


복도에서 부장과 마주친 것은 열한 시쯤이었다.

김덕은 비서관 하나를 데리고 반대편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손에 든 것은 서류가 아니라 학술지 같은 것이었고, 걸음이 빠르지 않았다.

"부장님."

"어, 정 실장."

부장이 고개를 조금 끄덕였다. 정만호도 끄덕였다. 두 사람이 지나가는 데 걸린 시간은 이 초쯤이었다.

정만호는 계단 쪽으로 걸어가면서 방금 지나간 이 초를 생각했다. 저 사람의 기억 속에 오늘 나는 복도에서 인사한 사람으로 남는다. 그리고 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이상으로는 남지 않는다.

그것이 오늘 이 건물에서 일어난 일 중에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6월 5일 일요일 밤, 그는 안가에 혼자 있었다.

이 집은 원래 사람이 사는 집이었다가 열두 해 전에 정리된 것이다. 방이 셋인데 하나만 쓴다. 냉장고에는 소주 두 병과 오이가 있었다.

그는 불을 켜지 않고 마루에 앉아 있었다. 창밖으로 아래쪽 골목의 가로등이 하나 보였다.

랑군에서 들것을 들었을 때 앞을 든 사람은 그가 아니었다. 뒤를 들었다. 뒤를 드는 쪽이 무겁고 얼굴이 안 보인다. 병원 마당에서 내려놓을 때까지 그는 그 사람의 신발만 보고 걸었다.

그 사람은 서울로 옮겨진 뒤 보름을 더 살았고, 그래서 열일곱에 들어가지 못했다.

정만호는 손바닥을 폈다. 오른손 검지로 왼손바닥에 글씨를 썼다. 세 글자였다. 획을 다 그으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데도 그는 천천히 썼다.

강. 만. 식.

다 쓰고 나서 손바닥을 쥐었다 폈다.

그가 그 친구를 고른 것은 재작년 겨울이 아니라 십 년 전이다. 사람을 고른 게 아니라 자리를 하나 오래 비워 두었고, 거기 맞는 사람이 나타나기를 기다렸을 뿐이다. 그것을 골랐다고 부르는지 아닌지는 그도 아직 정하지 못했다.

그는 일어나서 냉장고를 열고 소주 한 병을 꺼냈다가, 마개를 따지 않고 도로 넣었다. 그러고는 안방에 들어가 금고를 열고 낮에 결재한 서류철이 제자리에 있는지 확인했다. 있었다.

문을 닫고, 손잡이를 돌려 잠그고, 두 번 흔들어 보았다.


1994년 6월 7일 밤 · 단둥 세관 제3호 창고

3호 창고의 전등은 열두 개 중에 다섯 개가 나가 있었다.

밤 열 시 사십 분. 하역은 두 시간 전에 끝났고, 화차 편성은 새벽 두 시로 잡혀 있었다. 그 사이가 비어 있었다. 이 바닥의 모든 일은 그렇게 비어 있는 시간에 일어난다.

인입선 위에 화차 세 량이 붙어 있었다. 앞의 한 량에는 회색 드럼 열두 개와 나무 상자 두 개가 실려 있었다. 상자에는 관다발이 들어 있고 그건 내 물건이 아니다. 뒤의 두 량에는 파란 드럼이 마흔 개씩 실려 있었다.

나는 창고 문 쪽에서 그 두 량을 보았다.

같은 색, 같은 크기, 같은 개수. 한 량은 영변으로 가고 한 량은 흥남으로 간다. 실려 있는 물건이 어느 쪽이 좋은 것인지는 옆면의 로트 번호로만 구분된다.

나는 걸어 들어가서 소리 내지 않고 그것을 읽었다. 왼쪽 화차, 앞 네 자리가 지난달 다롄에서 내가 세었던 것과 같았다. 오른쪽 화차, 앞 네 자리가 달랐다. 어제 오후에 들어온 로트다. 어디서 왔는지 나는 묻지 않았고, 아무도 말해 주지 않았다.

성적서는 두 장 다 창고 사무실 서류함에 있었다. 두 장 다 방향족 0.7퍼센트, 인화점 81도라고 적혀 있었다. 한 장은 그 로트의 것이고, 한 장은 그 로트의 것이 아니다.

이런 것은 이 바닥에서 매일 일어난다. 공장이 샘플 성적서를 붙여 보내고, 중개상이 그것을 그대로 넘기고, 받는 쪽은 뚜껑을 안 열어 본다. 열어 봐도 눈으로는 모른다. 냄새로도 모른다. 나는 지난달에 냄새를 맡아 봤으니까 안다.

창고 안은 기름 냄새가 났다. 파란 드럼에서 나는 냄새인지 바닥에 밴 냄새인지는 구분이 안 됐다.


전문은 그저께 왔다.

두 줄이었다. 인수증상의 차량번호를 상호 교체할 것. 목표는 납기 지연 및 공정 불량 유발.

읽고 나서 나는 그 종이를 세면대에서 태웠다. 재를 물로 내리면서 두 줄을 속으로 다시 읽었다. 지연. 불량. 그것뿐이었다. 그 두 단어에는 사람이 들어 있지 않았고, 나는 그때 그것을 안심으로 받아들였다.

세관 사무실 문이 열리고 야간조 직원이 나왔다. 마흔쯤 된 남자였는데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안쪽에서 라디오 소리가 났다. 중국말 뉴스였다가, 채널을 돌리자 조선말이 나왔다. 빈에서 이사회가 어쩌고 하는 얘기였다.

"강 선생, 서류 두고 갈 거요?"

"확인만 하고 갑니다."

"오래 안 걸리지?"

"오 분이면 됩니다."

그는 담배를 물고 밖으로 나갔다. 창고 저쪽 끝에서 왕더셩이 세관 사람 둘하고 서서 웃고 있었다. 종이컵을 들고 있었고, 술이었다. 그쪽은 여기서 마흔 걸음쯤 떨어져 있었고, 등을 지고 있었다.

오세환은 문 옆 파렛트에 앉아 있었다.


영변 10화 제14장 판단 보류 — 전환컷

인수증은 두 장이었다.

각각 화차 한 량에 대한 것이다. 발송인, 수하인, 품명, 수량, 그리고 차량번호. 나머지는 다 인쇄되어 있고 차량번호만 손으로 적는다.

왼쪽 것은 2114736.
오른쪽 것은 2114836.

일곱 자리 중에 여섯 자리가 같았다. 다섯 번째 자리만 7과 8이다.

나는 그것을 두 번 확인했다. 그러고 나서 시계를 보았다. 열 시 오십사 분이었다.

만년필을 꺼냈다. 지난주에 이 창고에서 쓰는 잉크를 확인해 두었다. 청람색이다. 내 것도 청람색이다. 값이 싼 잉크는 마르고 나면 색이 조금 뜬다. 그래서 나는 값이 싼 잉크를 넣고 다녔다.

7의 아래 획을 조금 늘리고, 가운데를 이어서 8로 만들었다. 획 하나를 더한 것이지 지운 것이 아니다. 지운 자리는 남지만 더한 자리는 남지 않는다.

옆 서류로 갔다. 8은 7로 만들 수 없다. 8은 지워야 한다.

나는 서류함에서 백지 인수증 한 장을 꺼냈다. 인쇄된 부분은 같으니 손으로 쓴 칸만 옮겨 적으면 된다. 발송인, 수하인, 품명, 수량. 다 옮기고 마지막에 2114736을 썼다. 여덟 줄이었다. 글씨체는 앞 장을 보면서 맞췄다.

원본은 접어서 안주머니에 넣었다. 태워야 할 물건이었다. 태울 데가 없었다.

쓰는 동안 손은 떨리지 않았다. 그것이 조금 이상했다. 나는 사격장에서도 손이 떨리는 사람이었다. 표적지 앞에서는 떨리고 서류 앞에서는 안 떨린다면 그건 몸이 이 일을 일로 인정했다는 뜻이다.

사무실 문 쪽에서 슬리퍼 끄는 소리가 한 번 났다. 나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소리는 다시 멀어졌다.

잉크가 마르기를 기다렸다. 종이에 입김을 불면 번진다. 손으로 부치면 먼지가 앉는다. 그냥 기다리는 것이 제일 낫다.

기다리는 동안 나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잘 되지 않았다. 어머니 베란다에 쌓여 있던 라면 상자가 떠올랐다. 스물, 하고 세 번째에 나온 숫자.

잉크가 말랐다. 나는 두 장을 서류함 원래 자리에 도로 꽂았다.

시계를 보았다. 열 시 오십팔 분.

사 분이었다.


"사장님."

오세환이 파렛트에서 일어나 있었다. 언제부터 서 있었는지 모르겠다.

"이거 우리 물건 맞습니까?"

창고 저쪽에서 왕더셩이 웃는 소리가 났다. 세관 사람이 뭐라고 하고, 또 웃었다.

나는 담뱃갑을 꺼내 한 개비를 뽑아서 오세환에게 내밀었다.

그 애는 담배를 안 피운다. 그걸 알면서 내밀었다. 오세환은 잠깐 내 손을 보다가 그것을 받았다. 받아서 귀에 꽂지도 않고 주머니에 넣었다.

"나가서 바람 쐬자."

"예."

그 애는 나를 따라 나오면서 한 번 뒤를 돌아보았다. 창고 안에서 왕더셩이 우리 쪽을 보고 종이컵을 들어 보였다. 나는 손을 들었다.

"사장님, 저 사람은 저기서 뭘 합니까."

"자기 장사."

"우리 장사는 뭡니까."

"우리도 자기 장사지."


밖은 강 쪽에서 바람이 올라왔다.

압록강 위로 철교가 어둡게 걸려 있었고, 건너편에는 불빛이 몇 개 없었다. 나는 그것을 세는 버릇이 있는데 그날은 세지 않았다.

세관 마당 한쪽에 트럭 두 대가 서 있었고, 운전석에서 사람이 자고 있었다. 어디선가 개가 짖다가 그쳤다.

작년 유월에 이 강가 식당에서 왕더셩과 처음 계약을 했다. 그때 넣은 것은 진공펌프 여섯 대였고, 좋은 물건이었다. 값을 후려치지 않고 제값에 넣었다. 그렇게 일 년을 했다. 사람들이 나를 믿게 만드는 데 일 년이 걸렸고, 그 일 년의 값이 오늘 밤 사 분이다.

나는 그 계산이 어느 쪽으로 맞는 계산인지 알 수 없었다.

새벽 두 시 십 분에 편성이 시작되었다. 기관차가 붙고, 연결기가 물리는 소리가 세 번 났다. 화차 세 량이 조금씩 밀리다가 멈추고, 다시 밀렸다.

앞의 한 량과 뒤의 두 량. 그중 한 량은 흥남으로 가고 한 량은 다른 데로 간다. 나는 어느 쪽이 어디로 가는지 알고 있었다. 그 안에 든 것이 무엇이 될지는 몰랐고, 그것은 내가 알 수 있는 종류의 일이 아니었다.

오세환이 옆에서 물었다. "저거 며칠 걸립니까."

"사흘."

"빠르네요."

"빠른 게 우리 장사야."

화차가 다리 쪽으로 사라지고 나서도 우리는 한동안 서 있었다. 나는 주머니 속에서 접어 넣은 종이를 손가락으로 만져 보았다. 종이 한 장의 두께였다.

화차가 다리 쪽으로 사라지고 나서도 우리는 한동안 서 있었다. 나는 주머니 속에서 접어 넣은 종이를 손가락으로 만져 보았다. 종이 한 장의 두께였다.

남은 33화 · 약 118,517자 · 약 2시간 4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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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변전 43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