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변 제4부 행군(行軍)
20화제28장 팔백칠십칠
팔월 스무날에 단천역에 나갔다.
려행증은 유월에 받은 것이고 팔월 말까지다. 사회안전성 도장이 찍혀 있고 붉은 대각선이 그어져 있다. 종이는 멀쩡했다.

역 대합실 바닥에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벽에 붙어서 앉고, 기둥에 기대서 앉고, 짐 위에 앉았다. 개찰구는 열려 있는데 아무도 그쪽을 보지 않았다.
리향미는 매표구에 가서 물었다. 안에 앉은 역무원이 고개를 들지 않고 말했다. "선로가 나갔습니다."
"어디가 나갔습니까."
"고원 아래로 여러 군데."
"언제 붙습니까."
역무원이 그때 처음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시 숙였다.
리향미는 돌아서서 대합실을 다시 봤다. 사람이 마흔 명쯤 있었다. 그중에 기차 얘기를 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짐을 베고 자는 사람, 아이 머리를 손질해 주는 사람, 신발 끈을 고쳐 매는 사람. 여기 온 지 하루 이틀이 아닌 사람들의 자세였다.
이 사람들은 기차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 기차가 없는 데 익숙해진 것이다.
밖으로 나오는데 역 앞 마당에서 여자 둘이 보자기를 펴 놓고 있었다. 하나는 성냥, 하나는 담배 몇 갑, 하나는 삶은 감자. 리향미는 그 앞을 두 번 지나갔다.
두 번째 지나가면서 값을 물었다.
1995년 11월 ~ 12월 · 베이징 조양구, 동아상사 사무실
노크를 두 번 하는 사람은 리광호밖에 없었다.
일 년 반 만이었다. 문이 열리기 전에 나는 이미 그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고, 알고 나서도 일어서지 못했다.
들어온 사람은 코트를 입고 있었다. 재작년 겨울에 입던 그 회색 코트인데, 어깨가 남고 소매가 남았다. 옷은 같고 사람이 줄었다. 그가 코트를 벗어 의자 등받이에 걸고 앉았다. 앉는 자세도 달라져 있었다. 예전에는 등을 붙이지 않고 앉았다.
"강 사장." 그가 말했다. "오래간만입니다."
"연락이 없으셔서 저는 리 선생이 다른 데로 가신 줄 알았습니다."
"조직 사정이 좀 있었습니다."
오세환이 차를 내왔다. 리광호는 그것을 두 모금에 다 마셨다. 그리고 빈 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사무실은 난방이 들어와 있었다.
"시간이 없어서 바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가 안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냈다. 접은 자국이 여러 번 난 종이였다. "이걸 구할 수 있는지 봐 주십시오."
열아홉 행이었다.
나는 그것을 세 번 세었다. 세는 동안 손이 차가워지는 것을 느꼈는데, 사무실은 난방이 들어와 있었다.
원격 세정 장치 일식. 이온교환 흡착제, 제올라이트계, 톤 단위. 고성능 미립자 여과기, 등급과 규격이 붙어 있었다. 스테인리스 강재, 규격이 두 줄에 걸쳐 적혀 있고 용도란에 배기 덕트라고 씌어 있었다. 납판. 원격 조작기 부속. 그리고 열넷째 줄에 선량계가 있었는데, 옆에 괄호를 치고 이렇게 적어 놓았다. 측정 상한이 높은 것.
나는 그 괄호를 두 번 읽었다.
여섯째 줄 용도란에 두 글자가 있었다. 제염.
"리 선생." 나는 종이를 내려놓았다. "이거 어디 쓰는 겁니까."
"시설 보수입니다."
"보수에 흡착제를 톤으로 씁니까."
리광호가 나를 봤다. 재작년이었으면 웃으면서 다른 말로 넘어갔을 것이다. 그는 웃지 않았고 다른 말도 하지 않았다. 몇 초 동안 그냥 앉아 있다가 잔을 내려놓았다.
"강 사장. 값을 알려 주시면 됩니다."
"결제는요."
"현물로 하거나, 아니면 좀 미뤄 주셔야 합니다."
재작년에 이 사람은 현금 다발을 가방째 들고 왔었다. 나는 그때 세는 척만 하고 세지 않았다.
"리 선생, 하나만 여쭙겠습니다." 나는 종이를 다시 집었다. "재작년 유월에 제가 넣어 드린 진공펌프 여섯 대는 잘 돕니까."
그의 얼굴을 무슨 표정이 아주 잠깐 지나갔다.
"펌프는 잘 돕니다." 그가 말했다.
"다른 건요."
"강 사장." 그가 코트를 집으면서 일어섰다. "값만 알려 주십시오."
문 앞에서 그가 한 번 돌아섰다. 구두 뒤축이 한쪽만 닳아 있었다.
"작년 유월에 연락을 못 드린 거는." 거기까지 말하고 멈췄다. "미안합니다."
그 사람이 나한테 미안하다고 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가 가고 나서 사전을 꺼냈다.
책장 아래 칸에 삼 년 된 국어사전이 있었다. 나는 그 단어를 알고 있었다. 알면서도 찾았다. 제염. 방사성 물질에 의한 오염을 없앰.

그 뜻을 소리 내지 않고 읽고, 사전을 덮고, 다시 펴서 한 번 더 읽었다.
저녁에 왕더셩한테서 전화가 왔다. 단둥은 벌써 강이 얼기 시작했다고 했다.
"강 사장, 그 목록 받았소?"
"선생님도 받으셨습니까."
"열흘 전에. 여과기 값을 세 배로 불렀는데 안 깎더군." 수화기 저쪽에서 그가 뭘 마시는 소리가 났다. "장사 삼십 년에 값을 안 깎는 손님은 두 종류요. 돈이 아주 많거나, 시간이 아주 없거나."
"저쪽은 어느 쪽입니까."
"돈이 있으면 외상을 말하겠소?"
전화를 끊고 나는 한참 앉아 있었다. 오세환이 서류를 정리하다 말고 물었다.
"사장님, 이거 견적 넣습니까."
"넣어."
"이게 무슨 설빈지 저는 잘—"
"넣으라니까."
그는 더 묻지 않았다. 그때 그가 한 번 더 물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나는 나중에 여러 번 했다.
그날 밤에 나는 사무실에 남아서 카탈로그를 뒤졌다. 일본 회사 것 두 권, 독일 회사 것 한 권. 이온교환 흡착제 항목에 용도가 적혀 있었다. 폐수 처리, 도금 공정, 그리고 원자력 시설의 액체 폐기물. 톤 단위로 쓰는 곳은 세 번째뿐이었다.
여과기 쪽 페이지에는 등급표가 있었다. 리광호가 적어 온 등급은 표에서 제일 아래 줄이었다. 그 줄 옆에 작은 글씨로 이렇게 씌어 있었다. 방사성 에어로졸.
십이월 첫 주에 나는 서울에 올릴 보고를 썼다.
전문 형식은 정해져 있다. 일자, 접촉자, 요구 품목, 판단. 나는 판단란까지 다 채웠다. 열아홉 행을 그대로 옮겨 적고, 여섯째 줄 용도란의 두 글자도 적었다. 마지막 줄에 이렇게 썼다. 시설에 사고가 있었을 가능성 있음.
그리고 그 종이를 접어서 재떨이에 넣고 불을 붙였다.
왜 그랬는지 나는 그때도 설명하지 못했다.
내가 대 본 이유는 여러 개다. 확인되지 않은 추측을 올리는 것은 규정에 어긋난다. 흡착제 톤수만 가지고는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한다. 서울이 이것을 읽으면 라인 자체를 정리하라고 할 것이고 그러면 리광호가 죽는다. 전부 말이 되는 이유고 전부 그날 밤에 지어낸 것이다.
진짜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나는 그것을 보고서에 적는 순간 그게 사실이 된다고 생각했다. 적지 않으면 아직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닌 상태로 조금 더 있고 싶었다.
재가 다 식은 다음에 재떨이를 비웠다.
그 주에 견적서는 넣었다. 여과기하고 흡착제하고 강재. 값은 왕더셩이 부른 것보다 조금 낮게 잡았고, 신용장은 사흘 앞당겨 열었다. 재작년부터 내가 이겨 온 방식이 그것이고 그해 겨울에도 같았다. 팔지 않기로 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나는 말하지 않기로 했을 뿐이다.
책상 왼쪽 두 번째 서랍에 서류철이 하나 있다.
재작년 십이월에 리광호가 넘긴 목록을 내가 손으로 베낀 종이가 거기 들어 있다. 마흔한 행짜리다. 계측기, 질산급 특수강, 인산트리부틸, 희석제. 그 목록은 무엇을 짓는 데 쓰는 물건들이었다.
나는 열아홉 행짜리를 그 옆에 넣었다.
두 장을 나란히 놓으면 위쪽 종이는 잉크가 번져 있고 아래쪽 종이는 접은 자국이 깊다. 마흔하나와 열아홉. 앞엣것은 짓는 목록이고 뒤엣것은 지우는 목록인데, 사는 사람은 같고 파는 사람도 같다.
재작년에 그 마흔한 행을 베낄 때는 만년필을 두 번 놓쳤다. 이번에는 놓치지 않았다.
밖에 눈이 오기 시작했다. 조양로 가로수에 눈이 붙었다 떨어졌다 했다.
서랍을 닫고 열쇠를 돌렸다. 그 서랍 열쇠는 그때까지 한 번도 잠근 적이 없는 것이었다.
1996년 1월 ~ 3월 · 평양시 락랑구역 통일거리 32호동
삼십이호동 삼층 계단참에는 스물여덟 세대가 다 들어가지지 않는다.
그래서 인민반 회의는 계단 아래위로 늘어서서 한다. 정월 초닷새 저녁이었고 계단에는 불이 하나 켜져 있었다. 세대주가 못 오는 집은 여자가 나왔다. 스물여덟 집 중에 스무 집이 여자였다.
인민반장 최옥분이 종이를 폈다. 종이 펴는 소리가 계단에서 크게 울렸다.
"신년 공동사설입니다."
그는 읽었다. 고난의 행군 정신으로 어려움을 뚫고 나가자. 가는 길 험난해도 웃으며 가자.
읽는 동안 아무도 소리를 내지 않았다. 리향미는 앞사람 뒤통수를 봤고, 앞사람은 그 앞사람의 어깨를 봤다. 스물여덟 세대가 다 조금씩 다른 데를 보고 있어서 누구와도 눈이 마주치지 않았다.
"식량 문제와 관련해서," 최옥분이 종이를 넘겼다. "당에서 일시적 애로를 극복하기 위한 대책이 내려왔습니다. 하루 두 끼 먹기 운동입니다. 아침을 든든히 하고 점심은 걸러도 저녁은 국을 하면 됩니다."
이층에서 누가 물었다. "반장동지, 공급은 언제 나옵니까."
"공급은 나옵니다."
"언제 나옵니까."
최옥분이 종이를 접었다. "나오는 대로 알려 드리겠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합니다."
흩어지기 전에 최옥분이 종이를 한 장 더 폈다. 도에서 내려온 요령이라고 했다. 죽을 쑬 때 물을 넉넉히 잡고 오래 끓이면 같은 낟알로 배가 더 부르다고 씌어 있었다. 나물을 섞으라고도 씌어 있었다. 무슨 나물인지는 씌어 있지 않았다.
굶는다는 말은 그 종이에 없었다. 그 말은 회의에서 쓰지 않는다. 대신 식량 문제가 있고 일시적 애로가 있고 두 끼가 있었다.
사람들이 흩어지는 데 시간이 걸렸다. 계단이 좁고 다들 천천히 걸었다.
사람들이 흩어지는 데 시간이 걸렸다. 계단이 좁고 다들 천천히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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