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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화제49장 파일

· 43화 중 34화 · 3,327자 · 약 5분 · 무료

글자3 / 5

내곡동 로비의 유리문은 오전 열한 시에도 서늘했다.

출입증을 판독기에 댔다. 붉은 불. 카드를 뒤집어 다시 댔다. 붉은 불. 각도가 문제인가 싶어 손목을 세우고 한 번 더. 세 번째에도 붉은 불이었고, 그제야 나는 이것이 각도의 문제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영변 34화 제49장 파일 — 헤더컷

안내석 직원이 수화기를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성함이 어떻게 되신다고요?"

나는 명함을 내밀었다. 동아상사 대표 강 아무개. 직원이 그 종이를 오래 들여다보았다. 종이에는 베이징 주소와 팩스번호가 있었고, 이 건물과 관계있다는 표시는 한 글자도 없었다.

"연락 오면 다시 오시는 게 좋겠습니다."

"연락은 어디로 옵니까."

직원이 대답하지 않았다. 나도 더 묻지 않았다. 물어봐야 저 사람이 아는 것보다 내가 아는 게 많다.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 나와 담배를 한 대 피웠다. 건물이 나무 사이로 반쯤 보였다. 창을 세어 보다가 이 층에서 그만두었다. 5년 동안 저 안에 들어간 게 열두 번이다. 열두 번을 다 기억한다. 무슨 얘기를 들었고 어느 방이었고 커피가 나왔는지 안 나왔는지까지. 그런데 저 판독기는 나를 한 번도 기억한 적이 없었다.


사흘 뒤 정만호가 밖에서 보자고 했다. 양재동 뒷골목의 아귀찜집이었고 점심때가 지나 손님이 없었다.

"신문 봤나."

"여섯 명이더군요."

"열아홉이야." 그가 물수건으로 손을 닦았다. "나머지는 아직 안 나왔어. 나올 거고."

"실장님 이름도 있습니까."

"내 이름은 없지." 그가 웃지 않고 말했다. "나는 서류에서 나가는 사람이야. 신문은 그다음이고."

4월 9일이라고 했다. 파면. 징계 사유는 별개 건으로 붙는다고 했다. 그는 그 말을 예산 배정 이야기하듯 했다. 명령을 요청처럼 말하는 버릇이 그 사람한테는 마지막까지 남아 있었다.

"자네 계약은 오늘부로 해지될 거야. 위로금은 없어."

"있을 거라고 하신 적도 없습니다."

"그래." 그가 잔을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자네 기록은 내가 갖고 있어."

"제 기록이 어디 있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중요해." 처음으로 목소리가 조금 올라갔다. "1993년부터 5년이야. 그게 어디 있는지가 자네 인생이 어디 있는지야. 다른 데 있으면 자네한테 안 좋아."

"실장님." 나는 물컵을 돌려놓았다. "제가 판 물건 목록이 어디에 있습니까."

"왜."

"1993년 6월부터 작년까지 제가 넘긴 게 이백 건이 넘습니다. 그중에 좋은 물건이 대부분이었고요. 저는 그 목록을 손으로 베껴 본 적이 있습니다. 그게 어디 있는지는 알아야겠습니다."

정만호가 나를 보았다. 술도 안 마셨는데 눈이 붉었다.

"자네가 그걸 봐서 뭐 하려고."

"제가 뭘 했는지 알려고요."

"자네가 뭘 했는지는 자네가 알잖아." 그가 젓가락을 집었다. "화차 번호 두 개."

그 말 뒤에 뭔가가 더 있었다. 그 사람은 삼십 년을 이 일로 늙은 사람이라 문장을 어디서 끊어야 하는지 안다. 나는 그때 그 끊긴 자리를 캐묻지 않았다. 그때는 캐물어야 할 자리인 줄 몰랐다.

아귀찜이 나왔다. 그는 두 젓가락 먹고 젓가락을 놓았다.


서류에 도장을 찍은 사람은 윤성복이었다.

만남은 삼십 분도 안 걸렸다. 그가 표지를 넘기고, 확인란을 짚고, 인주에 도장을 두 번 눌렀다. 계약 해지 확인. 자료 반납 확인. 비밀 준수 서약 재확인.

반납할 자료가 없었다. 나는 이 나라의 물건을 하나도 가진 적이 없다. 출입증은 오늘 아침에 이미 죽어 있었고, 그것도 내 소유는 아니었다.

"확인란에 서명하십시오."

나는 이름을 썼다. 진짜 이름으로 쓴 게 몇 해 만인지 세어 보려다가 말았다. 윤성복이 서류를 반으로 접어 서랍에 넣었다. 열쇠를 돌리는 소리가 작게 났다.

"강 사장님 신분은 원래 없던 겁니다. 없던 걸 없앨 때는 절차가 간단합니다."

그는 규정 이야기를 할 때 목소리가 편안해지는 사람이었다. 나는 봉투 하나 받지 않고 그 방을 나왔다.

"미안합니다."

문고리를 잡았을 때 윤성복이 그렇게 말했다. 그는 나를 5년 동안 싫어했다. 그 말이 형식이라는 걸 그도 알고 나도 알았다. 그래서 나는 고맙다고 했다. 그것도 형식이었다.


영변 34화 제49장 파일 — 전환컷

여의도에 볼일이 있었던 건 아니다. 그냥 버스가 그쪽으로 갔다.

증권가 뒷길에 넥타이를 맨 사람들이 평일 두 시에 앉아 있었다. 계단에도 앉고 화단 턱에도 앉았다. 어떤 사람은 서류가방을 무릎에 얹은 채였고 어떤 사람은 빈손이었다. 신문에는 매일 부도난 회사 이름이 실렸다. 이름이 실리는 건 회사도 사람하고 똑같다.

라디오 소리가 어느 가게에서 흘러나왔다. 국민의 정부가 어쩌고 하는 목소리, 금 모으기 창구 앞의 줄, 그리고 전직 부장이 검찰에서 어떻게 되었다는 이야기. 이 봄에는 그 이름이 하루에 몇 번씩 나왔다. 조사받다가 몸을 상하게 했다더라, 수감됐다더라.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하면서 걸었다. 반년 전만 해도 그 이름을 입에 올리는 사람이 없었다.

공중전화 부스가 비어 있어서 들어갔다. 동전을 넣고 베이징 사무실 번호를 눌렀다. 신호가 여섯 번 갔다. 아무도 받지 않았다. 받을 사람이 없다는 걸 알면서 걸었다. 나는 수화기 너머에서 내 책상 위 전화기가 울리는 소리를 듣고 있었던 셈이다. 동전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고 나는 부스에서 나왔다.

나는 그 사람들 사이를 걸었다. 걷다 보니 나도 그중 하나였다. 다른 점이 하나 있다면 저 사람들은 어제까지 다니던 회사가 있었다는 것이다. 회사가 없어지면 이름이 신문에 난다.

한강 쪽에서 바람이 올라왔다. 접어 넣은 신문 세 부가 주머니에서 부스럭거렸다. 버스에 올라 앉아 1면을 다시 폈다. 처음부터 이름을 세었다. 여섯이었다. 아침과 같았다. 내릴 정류장을 두 개 지나쳤다.


1998년 8월 31일 · 도쿄 / 워싱턴 국방부 / 평양 조선중앙방송

방위청 지하 중앙지휘소에는 창이 없어서, 사토 2등공좌는 그날이 흐렸다는 것을 나중에 밖에 나가서 알았다.

낮 열두 시 십 분경, 화면 왼쪽 위에 표적 하나가 붙었다. 미확인. 방위구역 밖. 속도가 항공기의 것이 아니었다.

"이건 항적이 아닙니다."

옆자리 하사관이 그렇게 말했고 사토는 대답 대신 수화기를 들었다. 그다음은 순서였다. 지휘소에서 막료감부로, 막료감부에서 장관실로, 장관실에서 관저로, 그리고 요코타의 미군으로. 순서는 문서에 적혀 있고 문서는 매년 갱신된다.

물체는 혼슈 북부 상공을 지나 태평양으로 사라졌다. 화면에 잡혀 있던 시간은 십이 분이 채 안 됐다.

사토가 그 십이 분 동안 마음에 걸린 것은 표적이 아니라 통보의 방향이었다. 처음 신호를 준 것은 자기네 레이더가 아니었다. 미군 조기경보 계통에서 먼저 왔다. 우리 상공을 지나가는 물건을 우리가 두 번째로 알았다는 것을, 그는 보고서에 그렇게 쓸 수 없다는 것도 알았다.

전화는 그날 밤 열한 시까지 이어졌다. 관저는 밤 여덟 시에 성명을 냈고, 그날 안에 대북 지원 예산과 기구 분담 협정 서명이 보류되었다. 사토는 밖에 나와서야 비가 그친 것을 알았다. 오후 내내 같은 문장을 서른 번쯤 말했다는 것도 그제야 알았다. 아직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국방부 회의실에는 열넷이 앉았고, 마이클 코널리는 그중 유일하게 서울에서 온 사람이었다. 연례 협의 때문에 마침 워싱턴에 있었다.

그는 수첩 여백에 작대기를 그었다.

우리는 몰랐다 — 한 번. 예상 못 했다 — 두 번. 그런 평가를 받은 적이 없다 — 세 번. 회의 사십 분 만에 작대기가 열한 개가 됐다.

놀란 것은 사거리가 아니었다. 1,500이든 2,000이든, 그 정도는 이미 종이에 적혀 있었다.

"삼 단입니다." 국방정보국에서 온 남자가 같은 말을 세 번째 했다. "일 단에서 이 단이 떨어져 나갔고, 이 단에서 또 떨어져 나갔습니다. 그걸 해냈다는 게 문제입니다."

"위성은요."

"우주사령부는 궤도에 아무것도 없다고 합니다."

"그럼 실패한 거 아닙니까."

"떼어내는 데 성공하고 올리는 데 실패한 겁니다. 우리한테 중요한 건 앞쪽입니다."

누군가 서류를 넘기다 말했다. "우리 보고서에는 저 나라가 굶고 있다고 되어 있는데."

"굶고 있는 게 맞습니다." 코널리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두 가지가 같이 참일 수 있습니다."

"영변은 어떻습니까." 끝자리에서 누가 물었다.

"동결입니다. 사찰관이 상주하고 있고, 봉은 수조에 있습니다."

"그 건물은요. 재처리 쪽."

국방정보국 남자가 서류를 뒤졌다. "방사화학실험실. 안전상 이유로 접근이 계속 거부되고 있습니다. 사 년째입니다."

"안전상 이유가 뭡니까."

"저쪽이 그렇게 말합니다. 그 이상은 없습니다."

방 안이 잠깐 조용했다. 코널리는 작대기 옆에 열두 번째를 긋지 않았다.

회의가 파한 뒤 그는 복도에서 커피를 뽑으며 넉 해 전 여름을 생각했다. 서울에서 올라온 분석 하나가 있었다. 크립톤 방출량을 역산해서, 저쪽이 시작했다가 멈췄다고 쓴 종이였다. 출처는 끝내 알려주지 않았고 그는 묻지 않았다. 그 종이는 그해 칠월에 아무도 읽지 않았다. 김일성이 죽었기 때문이다.

넉 해가 지났고, 그 나라는 삼 단 로켓을 쏘았다. 그는 종이컵을 들고 서서 두 가지 사실을 나란히 놓아 보았다. 둘은 서로를 설명해 주지 않았다.

넉 해가 지났고, 그 나라는 삼 단 로켓을 쏘았다. 그는 종이컵을 들고 서서 두 가지 사실을 나란히 놓아 보았다. 둘은 서로를 설명해 주지 않았다.

남은 9화 · 약 33,557자 · 약 4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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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변전 43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