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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화제55장 문을 여는 사람

· 43화 중 38화 · 3,819자 · 약 5분 · 무료

글자3 / 5

1999년 8월 28일 ~ 9월 5일 · 영변, 방사화학실험실 정문 및 제1공정

헬기 소리는 남쪽에서 왔다.

영변 38화 제55장 문을 여는 사람 — 헤더컷

한성철은 그 소리를 듣고 사무실에서 나왔다. 구내에 남아 있는 사람은 이백 명 남짓이었다. 대부분은 갈 데가 없어서 남았고, 몇은 여기 말고는 자기가 뭘 하는 사람인지 설명할 데가 없어서 남았다. 사찰관들은 지난주에 짐을 쌌다. 마지막 날 오스트리아 사람 하나가 그와 악수를 하고 갔다. 왼손을 내밀지 않게 조심하는 것이 그동안 몸에 배어 있었다.

경비대는 소총을 들고 정문 안쪽에 섰다. 열여섯 명이었다. 탄창을 끼운 사람이 몇인지 한성철은 세어 보지 않았다. 세어 봐야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헬기 두 대가 언덕 너머에 내렸고, 잠시 뒤 차량 넉 대가 진입로로 올라왔다. 앞차에서 내린 사람들은 방독면을 목에 걸고 있었다. 옷 색이 군복도 아니고 작업복도 아니었다.

강태봉은 없었다. 팔월 십사일에 평양에서 부르는 전화가 왔다고 하고 나갔고, 그 뒤로 소식이 없다. 실장 자리가 비면 그다음은 부실장인데 부실장은 재작년에 병으로 죽었다. 남은 사람 중에 제일 위가 한성철이었다. 아무도 그를 임명하지 않았다. 그냥 그렇게 되었다.

정문에서 두 무리가 마주 섰다. 스무 걸음쯤.

경비대장이 소리쳤다. 상대편에서 확성기로 뭐라고 했다. 한국말이었는데 억양이 남쪽이었다.

한성철은 두 무리 사이로 걸어 나갔다.

그가 든 것은 왼손이었다. 손톱이 없는 손가락 두 개가 아침 볕에 그대로 보였다. 손바닥을 펴서 어깨 높이로 들고, 그 자세로 열 걸음을 걸었다.

"여기 들어가면 안 됩니다."

확성기가 멈췄다. 통역이 뭐라고 옮기는 소리가 났다.

"저 건물은 사람이 들어가는 건물이 아닙니다. 오 년째 들어간 사람이 없습니다."

앞줄의 여자가 한 걸음 나왔다. 안경을 썼고 머리를 뒤로 묶었다. 그 여자가 통역을 통해 물었다. 왜 못 들어가느냐고.

한성철은 손을 내렸다.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뒤에서 경비대장이 뭐라고 불렀다. 한성철은 돌아보지 않았다. 열여섯 자루의 총이 어떻게 되는지는 그의 등 뒤에서 결정될 일이었다. 그가 열 걸음을 더 걷는 동안 총구가 내려가는 소리가 났다. 쇠붙이가 옷에 스치는 소리는 조용한 데서 잘 들린다.


수조 건물은 정전 상태였다.

손전등 빛이 물 위에서 흔들렸다. 물빛이 맑지 않았다. 표면에 얇게 뜬 것이 있었고, 벽 쪽으로 갈수록 바닥이 안 보였다.

한성철은 난간을 잡고 서서 손전등을 아래로 향했다.

강철 통에 든 것이 열 줄쯤 보였다. 그 뒤로는 통이 없었다. 미국 돈으로 하던 일이 삼 년 전에 멎었고, 통은 오다가 말았다. 나머지는 바스켓째 물속에 있었다.

빛이 닿는 데까지 보면, 바스켓 안에 든 것이 봉의 모양을 유지한 것도 있고 아닌 것도 있었다. 피복이 마그네슘 합금이다. 물에 담가 두면 삭는다. 수질을 관리하면 오래 버티고, 관리를 못 하면 못 버틴다. 1996년 겨울부터 이온교환 수지가 들어오지 않았다.

옆에 선 미국 남자가 통역을 통해 물었다. 몇 개입니까.

"팔천 개라고 합니다." 한성철이 말했다.

통역이 옮겼다. 남자가 다시 물었다. 실제로는 몇 개입니까.

한성철은 손전등을 껐다가 다시 켰다.

"칠천칠백 개쯤이었습니다. 오 년 전에는요." 그가 말했다. "지금 몇 개인지는 셀 수 없습니다."

남자가 다시 물었다. 왜 셀 수 없느냐고.

"세려면 건져야 합니다. 건지려면 통이 있어야 하고, 통을 만들려면 강판이 있어야 하고, 강판을 사려면 돈이 있어야 합니다." 한성철은 난간에서 손을 뗐다. "그리고 봉의 모양이 남아 있어야 셉니다. 모양이 없어진 것은 세는 단위가 개가 아닙니다."


엘런 그레이브스는 그 문장을 수첩에 영어로 옮겨 적고 밑에 줄을 그었다.

셀 수 없다. 로스앨러모스에서 이십 년 동안 그녀가 배운 것은 세는 방법이었다. 무엇이든 세는 방법이 있고, 없으면 만들면 된다. 이 나라에 들어온 지 나흘 만에 그녀는 세는 방법이 없는 물건을 보았다.

구월 이일 오전, 그들은 방사화학실험실 조작 복도에 들어갔다.

건물은 멀쩡했다. 그것이 제일 이상했다. 창문 하나 깨지지 않았고, 벽에 그을음도 없고, 콘크리트에 금도 없었다. 위성사진에서 오 년 동안 아무 일도 없어 보였던 이유를 그녀는 복도에 들어서고 나서 이해했다.

선량계가 울기 시작한 것은 셀 문에서 십 미터쯤 떨어진 지점부터였다.

중앙에서 시간당 사십 밀리시버트. 벽을 따라가면 올라갔다. 원격조작기 관통부 아래, 바닥에서 무릎 높이의 한 지점에서 계기가 멈추듯 서더니 숫자가 올라갔다.

시간당 일점일 시버트.

그레이브스는 그 숫자를 읽었다. 그리고 계기를 얼굴 앞으로 들어 한 번 더 읽었다. 판이 잘못 읽힌 것이 아니었다.

"여기서 뭐가 나왔습니까." 그녀가 통역에게 말했다.

한성철이 관통부를 가리켰다. 왼손이 아니라 오른손이었다.

"1994년 유월 이십육일 새벽 세 시 사십칠 분에, 저기로 용액이 나왔습니다."


닷새째 되는 날, 한성철이 서류철을 들고 왔다.

조종실 옆방 캐비닛에서 꺼낸 것이었다. 자물쇠를 열쇠로 여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 오 년 동안 아무도 열라고 하지 않은 자물쇠는 뻑뻑해진다.

그가 종이 한 장을 뽑아 그레이브스 앞에 놓았다.

영변 38화 제55장 문을 여는 사람 — 전환컷

등사한 양식지였다. 왼쪽 위에 날짜가 있었다. 1994년 6월 21일. 제목은 계기 이중확인 요청. 본문은 다섯 줄이고, 증발기 온도전송기 열두 대에 대해 별도 기준기로 고온역 확인을 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신청인 칸에 이름이 있었다.

오른쪽 아래에 붉은 도장이 있었다. 반려. 그 옆에 사유가 손글씨로 적혀 있었다.

통역이 읽었다. "공정 지연 우려."

그레이브스는 종이에서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 "다시 읽어 주세요."

"공정 지연 우려."

여섯 글자였다. 그녀는 그것을 소리 나는 대로 수첩에 적고, 그 아래에 영어로 옮겨 적었다.

"이걸 왜 저한테 주십니까."

한성철은 잠깐 생각했다. 통역이 옮기기를 기다리는 동안 그의 얼굴은 변하지 않았다.

"저는 제1공정 기술과장이었습니다." 그가 말했다. "이 계통을 아는 사람이 여기 저뿐입니다. 아는 사람은 설명을 해야 합니다."

"그날 사람이 다쳤습니까."

그가 대답하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다.

"셋이 죽었습니다. 그해에 둘, 나중에 하나."

"이름을 알 수 있습니까."

"적어 드리겠습니다." 그가 말했다. "여기 서류에는 없습니다. 그 사고는 서류에 없습니다."

그레이브스는 수첩을 덮었다가 다시 폈다.

"처음부터 설명해 주실 수 있습니까.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한성철은 서류철을 닫고 두 손으로 들어 책상 한쪽에 놓았다. 그리고 벽 쪽으로 가서, 거기 붙어 있는 오래된 계통도 앞에 섰다. 종이가 누레져서 선이 잘 안 보였다. 그는 오른손 검지로 왼쪽 끝을 짚었다.

"여기가 용해조입니다. 여기서 나온 것이 이쪽으로 갑니다."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지도, 빠지지도 않았다. 자랑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었고 사과하는 사람의 목소리도 아니었다. 열한 해 동안 이 도면을 아래 직원들에게 설명해 온 사람의 목소리였고, 그 설명을 처음으로 바깥 사람에게 하고 있었다.


1999년 9월 ~ 12월 · 서울 내곡동 / 판문점 근처 전방

구월에 다시 불려 나갔다.

이유는 간단했다. 1993년부터 1998년까지 그 조달 라인을 직접 만진 사람이 나 말고 살아 있지 않았다. 오세환은 죽었고, 리광호는 없고, 왕더셩은 중국 사람이다.

신분은 계약직 자문이었다. 넉 달짜리. 출입증에 내 사진이 붙어 있었는데 이름은 영문 이니셜이었다. 판독기에 대니까 파란 불이 들어왔다. 작년 봄에 세 번 대 보고 돌아섰던 그 판독기다.

서류를 가져다준 사람은 차은희였다. 통신과 시절에 내 전문을 타이핑하던 사람이다. 오 년 동안 내 문장을 나보다 많이 읽은 사람이고, 나는 그 사람 얼굴을 그때 세 번째로 보았다.

"두 권입니다. 원문하고 번역본. 번역은 급하게 한 거라 거칠 겁니다."

"고맙습니다."

"이십사 일까지 반납이십니다." 그러고는 조금 있다가 덧붙였다. "천천히 읽으셔도 됩니다."

그 사람은 책을 내려놓을 때 표지를 내 쪽으로 돌려놓았다. 남이 읽을 것을 하루 종일 옮겨 적어 온 사람의 손버릇이었다.


미국 에너지부 핵비상지원팀 예비보고서. 표지에 날짜와 분류 표시가 있고, 본문은 백 쪽이 조금 넘었다.

세 번째 장에서 나는 사전을 꺼냈다.

red oil. 사전에는 없었다. 화학 용어집에도 없었다. 번역본에는 '적유(赤油)'라고 되어 있고 괄호 안에 원어가 병기되어 있었다. 그 아래 각주가 다섯 줄이었다. 인산트리부틸이 질산과 만나 만드는 착물이 일정 온도를 넘으면 스스로 열을 내며 분해된다는 것. 1993년 사월에 러시아 톰스크에서 같은 일이 있었다는 것.

나는 그 각주를 세 번 읽었다. 톰스크 쪽에는 사람이 몇 명 다쳤는지가 적혀 있지 않았다. 대신 오염된 면적이 제곱킬로미터로 적혀 있었다.

번역은 급하게 한 것이 맞았다. 같은 낱말이 앞뒤로 다르게 옮겨진 데가 세 군데였다. 그 뒤로 나는 자꾸 원문 쪽으로 손이 갔다. 영어를 잘해서가 아니라 숫자는 옮길 것이 없어서였다.

본문 제4절의 제목은 기여 요인이었다. 세 개가 번호를 달고 있었다.

하나. 추출공정 희석제의 방향족 및 올레핀 함량이 규격을 크게 초과함. 분석 결과 방향족 4.3퍼센트, 올레핀 1.8퍼센트.

둘. 증발기 온도전송기 열두 대가 고온역에서 음의 편향을 보임. 최대 마이너스 십구 도. 해당 기기는 신품이 아니며, 교정성적서는 원 소유자의 것이 전용된 것으로 판단됨.

셋. 냉각 열교환기 관다발의 재질이 계약 규격과 다름. 질산급 초저탄소강이 아닌 일반 304강이며 용접부 예민화가 관찰됨.

세 항목은 활자 크기가 같았다. 번호도 같은 굵기였다. 어느 것이 더 나쁜지 그 종이는 말하지 않았다.

나는 종이를 넘기다 말고 손을 무릎에 놓았다.

하나는 내가 넣었다. 1994년 유월 칠일 밤, 단둥 세관 삼호 창고. 화차 번호 두 개. 사 분.

둘과 셋은 내가 넣지 않았다.

결론부는 짧았다. 세 개의 기여 요인이 확인되나, 상대적 기여도는 현재의 접근 조건에서 규명 불가. 문제의 기기와 관다발은 셀 내부에 있으며 회수 불가능.

뒤에 붙은 부속 문서에 우리 쪽 판단이 하나 있었다. 작성자 표시는 없고 계열 부호만 있었다. 여백에 연필 글씨가 있었다.

납품 로트가 사고의 필요조건이었을 확률 40~80퍼센트. 구간을 좁힐 수 없음.

연필 자국이 종이 뒤로 눌려 있었다. 힘을 주어 쓴 글씨였다.

연필 자국이 종이 뒤로 눌려 있었다. 힘을 주어 쓴 글씨였다.

남은 5화 · 약 18,875자 · 약 2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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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변전 43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