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변 제7부 붕괴(崩壞)
35화제50장 대포동
의사당 별관 삼층, 상원 보좌관 하나가 예산안 초안을 무릎에 놓고 형광펜을 굴리고 있었다.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 이행 지원. 중유 구매분. 금액과 회계연도가 붙은 한 줄이었다.

그는 선을 긋고, 여백에 삭제 부호를 쓰고, 옆 칸에 이니셜을 적었다. 걸린 시간은 삼십 초쯤이었다. 그다음 줄로 넘어가는 데 더 오래 걸렸다. 그 줄은 아이다호주 관개시설 예산이었다.
"이거 지우면 그쪽은 겨울에 아무것도 안 들어갑니다." 인턴이 물었다.
"굶는 건 우리 소관이 아니야." 보좌관이 형광펜 뚜껑을 닫았다. "굶으면서 쏘는 건 우리 소관이고."
"작년에도 반으로 깎았잖습니까."
"작년에는 깎을 이유를 만들어야 했지. 올해는 저쪽이 만들어 줬어." 그는 초안을 무릎에서 책상으로 옮겼다. "그리고 일본이 분담 서명을 보류했어. 돈 낼 사람이 하나 빠졌는데 우리가 왜 채워."
인턴이 더 묻지 않았다. 그 줄은 회기 안에 그대로 지워졌고, 지워진 자리는 아무것도 아닌 여백이 되었다.
십일월에 백악관은 스탠퍼드에 있는 사람을 불러 앉혔다. 국방장관을 지낸 그는 대북정책조정관이라는 새 직함을 받고, 이 나라가 저 나라를 상대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처음부터 다시 세기 시작했다.
평양방송위원회 청사의 제2녹음실은 그 주 내내 자체 발전기로 돌아갔다.
기사 로철수는 경유 드럼을 셌다. 넉 대분이 남아 있었다. 하루 두 시간 송출로 계산하면 열흘, 아껴 쓰면 보름이었다. 그는 그 숫자를 수첩에 적고 밑에 줄을 그었다.
아나운서가 원고를 받아 들었다. 종이가 얇아서 뒷장 글자가 비쳤다.
우리 나라에서 첫 인공지구위성 광명성 1호가 성과적으로 발사되었다.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위성은 궤도를 돌면서 27메가헤르츠로 노래 두 곡과 부호를 송신하고 있다고 했다. 아나운서는 그 대목에서 잠깐 숨을 골랐다. 원고에 그렇게 표시되어 있었다.
방송이 끝나고 편집 담당이 들어와 종이 한 장을 붙이고 갔다. 이달부터 정규방송 시간을 다시 줄인다는 통지였다. 위성이 궤도를 돈다는 방송이 나간 날에 붙은 종이였다. 아무도 그 두 가지를 나란히 말하지 않았다.
그날 녹음실 인원에게는 옥수수국수가 한 그릇씩 나왔다. 아나운서는 절반을 남겨 손수건에 쌌다. 로철수는 국물까지 마셨다. 그릇을 반납하면서 그는 이런 날이 올해 세 번이었다는 것을 셈했다.
녹음실 밖 복도는 캄캄했다. 로철수는 손전등을 켜고 계단을 내려갔다. 창밖으로 보이는 시가지에도 불이 없었다. 방송은 나가는데 받을 데가 없다.
그는 자기 집을 생각했다. 지난달에 전기가 들어온 날이 나흘이었다. 라디오를 켜자면 전기가 있어야 하고, 이 방송을 들으려면 라디오가 켜져야 한다.
로켓에 무엇이 얼마나 들어갔는지 그는 모른다. 알 방법이 없고 물어볼 데도 없다. 그가 아는 숫자는 손에 쥔 것뿐이다.
경유 드럼 넉 대. 하루 두 시간. 열흘.
계단참에서 그는 멈춰 서서 그 셈을 한 번 더 했다. 아껴 쓰면 보름. 보름 뒤에 오는 것은 시월이다.
1998년 9월 ~ 12월 · 베이징 / 단둥
사무실을 접는 데 사흘이 걸렸다.
버릴 것이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팩스기는 팔았고 복사기는 세를 놓은 회사가 도로 가져갔다. 서류철 예순두 권 중 쉰아홉 권을 태웠다. 아래층 관리인이 마당에서 태우면 안 된다고 해서 드럼통을 하나 사서 뒷골목에 놓고 태웠다. 종이는 잘 안 탄다. 한 권씩 펴서 넣어야 한다.
서랍 맨 아래 칸에 두 권이 남았다.
하나는 1993년 12월에 손으로 베낀 목록이다. 마흔한 행. 계측기, 특수강, 인산트리부틸, 희석제. 그때 나는 이걸 세 번 세었다. 지금 세어도 마흔한 행이다.
다른 하나는 내 장부다. 1993년 6월부터 작년 봄까지 내가 넘긴 물건이 품목별로 적혀 있다. 진공펌프 여섯 대로 시작해서 이백열아홉 건. 그중 대부분은 좋은 물건이었다. 정말로 잘 돌아가는 물건이었다. 그렇게 해야 신뢰가 생기니까.
태우려고 두 권을 들었다가 도로 넣었다. 5년 전 이 방에 처음 들어왔을 때도 나는 이걸 태우지 않았다.
그해 가을 조양구 사무실 골목에서 문 닫은 회사가 우리 말고 넷이었다. 다 저쪽 물건을 만지던 데다. 이유는 하나다. 저쪽이 돈을 못 낸다. 1993년에는 신용장이 왔고, 1996년에는 절반이 물물교환이었고, 1998년에는 아무것도 안 왔다. 물건을 안 산다는 뜻이 아니다. 사겠다는 말은 여전히 온다. 값을 치를 데가 없을 뿐이다.
홍콩 중개상 하나가 전화를 걸어와 미결제분을 물었다. 나는 회사가 정리 중이라고 했다. 그쪽이 잠깐 말이 없다가, 그럼 당신 개인 채무로 돌리면 되겠냐고 물었다. 나는 그러라고 했다. 어차피 내 이름에는 1993년부터 붙어 있는 것이 있다. 신용정보원 조회 결과지. 그 종이 하나로 나는 오 년을 먹고살았다.
세 번째 서랍에서 오세환의 것이 하나 나왔다. 이름을 적어 놓은 서류철이었다. 안은 비어 있었다. 나는 그것만 따로 가방에 넣었다.
단둥에서 왕더셩은 창고에 있었다. 지게차 소리가 나서 두 번씩 말해야 했다.
"강 사장, 서울 돈 끊겼지."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내 눈에 안 보이는 게 두 가지야. 안 온 돈하고 죽은 사람." 그가 장갑을 벗었다. "돈이 안 오면 티가 나. 얼굴이 아니라 신용장에 나."
"회사는 굴러갑니다."

"굴러가지. 밑에 바퀴가 없어서 그렇지." 그가 웃었다. "내가 하나 하자우."
지분을 사겠다는 게 아니었다. 상호를 사겠다는 것도 아니었다. 동아상사 간판은 그대로 두고, 자본은 자기가 대고, 나는 고문이라는 자리에 앉는다. 월 얼마. 성사되면 몇 프로.
"조건이 뭡니까."
"조건 없어. 조건 있으면 종이 써야 되고, 종이 쓰면 언젠가 누가 그걸 보게 돼." 그가 손가락 두 개를 폈다. "나는 물건을 두 번 판다고 했지? 이제 세 번째가 있어. 사람 머릿속에 든 걸 파는 거야. 강 사장 머리에는 오 년 치가 들어 있어. 누가 뭘 샀고, 어디로 갔고, 얼마 줬고. 그거는 서울에 팔 수도 없고 저쪽에 팔 수도 없어. 나한테만 팔려."
"뭘 알고 싶으신데요."
"급할 거 없어." 그가 손을 저었다. "우선은 명단. 1993년부터 물건 만진 사람들, 살아 있는 사람 죽은 사람. 자리 옮긴 사람. 그거만 있어도 나는 삼 년 먹어."
"저쪽 사람들 이름 말입니까."
"양쪽 다." 그가 나를 보았다. "강 사장, 나는 사람을 미워하지 않아. 미워하면 값을 못 매겨."
지게차가 지나가고 창고가 잠깐 조용해졌다. 이 창고는 4년 전보다 두 배가 됐다. 나는 그동안 회사 하나가 없어졌고 이 사람은 창고가 하나 더 늘었다.
"나쁜 값은 아니지 않소."
나쁜 값이 아니었다. 그게 문제였다. 시장에서 값이 하나뿐인 물건은 그 값이 진짜 값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악수를 했고 계약서는 없었다.
며칠 뒤 왕샤오밍이 상자 두 개를 들고 사무실로 왔다. 왕더셩의 아들이다. 스물넷.
그가 책상 위에 컴퓨터를 놓고 전선을 뒤로 넘겼다. 본체가 무거워서 얼굴이 벌게졌다.
"강 선생님, 전자우편 쓰실 줄 아십니까."
"팩스가 있잖나."
"팩스는 종이가 남습니다." 그가 아무 뜻 없이 말했다. "이건 안 남고요."
나는 그 말을 오래 생각했다. 스물넷짜리가 자기 아버지가 무엇으로 먹고살았는지 모르는 채로 그런 말을 한다. 그는 화면에 회사 이름을 알파벳으로 쳐 넣고, 이제 홍콩 쪽하고는 이걸로 하면 이틀이 하루가 된다고 했다.
내가 5년 동안 판 것 중에 제일 강한 무기가 사흘이었다. 남보다 사흘 빠른 신용장. 이 아이는 그 사흘을 하루로 줄이는 물건을 지고 사층까지 걸어 올라왔다.
"아버님 회사에서 배웠나."
"아니요, 학교에서요. 아버지는 이런 거 안 쓰십니다." 그가 웃었다. "아버지는 아직도 주판을 놓으십니다."
그건 사실이었다. 왕더셩은 계산기가 있어도 주판을 꺼낸다. 나는 그 사람이 주판알을 튕겨서 톤당 차액을 뽑는 걸 여러 번 보았다. 그때는 그게 근면해 보였다.
십이월 초, 압록강 둑에 서 있었다.
강이 얼기 시작하고 있었다. 가장자리부터 하얗게 붙고 가운데는 아직 검게 흘렀다. 철교 위로 화차가 지나갔다. 예전에는 하루에 몇 번 지나가는지 세어 보곤 했는데 요새는 셀 것도 없다.
저쪽 신의주에는 불이 서너 점 있었고 나머지는 검었다. 단둥 쪽은 밝았다. 밝은 쪽에 서서 어두운 쪽을 보면 눈이 아프다. 강폭이 여기서는 오백 미터가 안 된다. 오백 미터 사이에 전기가 있는 나라와 없는 나라가 있다.
옆에 사람이 하나 섰다. 회색 외투에 목도리를 안 했다. 재작년 선양 화장장 마당에서 본 얼굴이었다.
"추운데 서 계십니다."
"강 구경합니다." 내가 말했다.
그는 강을 보았다. 담배를 물었다가 불을 안 붙였다.
"1994년에 화차 두 량이 있었지요."
바람이 강을 따라 불었고 나는 강만 보았다. 얼굴을 돌리지 않는 데 힘이 들어갔다.
"그해 유월에 세관 삼호 창고 물건이 이틀 밀렸습니다. 서류가 안 맞아서요." 그가 담배를 도로 갑에 넣었다. "그런 게 가끔 있습니다. 오래된 일이고요."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해도 대답이 되고, 대답은 확인이 된다. 그건 오 년 동안 매일 하던 계산이라 몸이 먼저 안다.
"이 강은 해마다 이맘때 업니까." 내가 물었다. 뭐라도 물어야 할 것 같았다.
"작년에는 열흘 늦었습니다. 올해는 빠릅니다."
"얼면 어떻게 됩니까."
"건너오는 사람이 늡니다." 그가 강 가운데를 보았다. "녹으면 줄고요. 그래서 우리는 겨울에 사람이 많아집니다." 그러고는 갔다. 이름도, 명함도, 다음에 보자는 말도 없었다.
나는 그 자리에 한참 더 서 있었다. 손에 남은 것은 서랍에서 꺼내 온 두 권과, 아무한테도 못 파는 오 년 치와, 그것을 사겠다는 사람 하나였다. 강 건너에서 불빛 하나가 꺼졌다. 서너 점이 두어 점이 되었다.
나는 그 자리에 한참 더 서 있었다. 손에 남은 것은 서랍에서 꺼내 온 두 권과, 아무한테도 못 파는 오 년 치와, 그것을 사겠다는 사람 하나였다. 강 건너에…
남은 8화 · 약 30,012자 · 약 4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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