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LLUSIONTOON

14화제20장 기다림

· 43화 중 14화 · 3,421자 · 약 5분 · 무료

글자3 / 5

1994년 6월 18일~24일 · 베이징 동아상사 사무실 / 호텔 방

호텔 방의 텔레비전은 채널이 열두 개였고 그중 셋이 영어였다.

영변 14화 제20장 기다림 — 헤더컷

나는 그 주 내내 CNN을 켜 놓고 잤다. 자막이 한국어가 아니라서 오히려 잘 읽혔다. 한국말 뉴스는 앵커의 목소리 톤부터 나를 끌고 가려 든다. 영어 자막은 단어만 준다. FREEZE. RESUME. AGREED. 나는 그 단어들을 종이에 옮겨 적었다. 군에서 배운 버릇이다. 모르는 상황일수록 받아쓴다.

카터가 판문점으로 걸어 들어갔고, 김일성을 만났고, 배를 탔고, 서울로 내려왔다가 워싱턴으로 돌아갔다. 백악관 대변인이 성명을 읽었다. 재장전하지 않고, 방금 꺼낸 폐연료를 재처리하지 않으며, 사찰의 연속성을 유지한다.

재처리하지 않는다.

나는 그 문장에서 리모컨을 내려놓았다.

일주일 전까지 세상은 폭격 얘기를 했다. 지금은 회담 날짜를 얘기한다. 칠월 팔일에 제네바라고 했다. 좋은 소식이다. 전쟁이 안 난다는 뜻이니까. 나 같은 사람에게도 좋은 소식이어야 한다. 전쟁이 나면 내가 파는 물건이 있든 없든 아무 의미가 없어진다.

그런데 나는 침대에 앉아서 손바닥을 무릎에 문지르고 있었다.

물건은 이미 갔다. 유월 칠일 밤에 갔다. 그 뒤로 열하루가 지났다.

서울에서는 아무 말이 없었다.

이건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나는 스스로에게 설명했다. 지시를 받은 사람이 지시대로 했으면 그다음에 오는 것은 침묵이 정상이다. 잘했다는 전문이 오는 조직이 아니다. 열흘이든 한 달이든 조용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다음 것이 온다. 그게 이 일이다.

주말에 자막이 또 바뀌었다. 남북 정상회담. 날짜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고 실무접촉에서 잡는다고 했다. 나는 그 문장을 종이에 옮겨 적으면서, 한 달 뒤에 그 두 사람이 평양에서 악수를 하고 있으면 내가 유월 칠일 밤에 한 일은 대체 무엇이 되는가 하는 생각을 했다. 오래 하지는 않았다. 그런 생각은 오래 하면 손해다.


사무실은 조양구의 오래된 사무동 사층에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있었지만 나는 걸어 올라갔다. 계단이 마흔여덟 개다. 처음 계약할 때 세어 봤고, 그 뒤로도 가끔 세었다.

팩스가 조용했다.

그게 처음 있는 일은 아니다. 원래 화요일 오전은 조용하다. 그런데 이 주는 월요일도 조용했고 화요일도 조용했고 수요일도 조용했다. 홍콩 중개상 쪽에서 견적 회신이 두 건 왔을 뿐이다. 리광호 쪽에서는 아무것도 오지 않았다.

수요일 오후에 나는 회선을 점검했다. 수화기를 들어 발신음을 확인하고, 우리 번호로 테스트 송신을 걸어 보았다. 종이가 정상적으로 나왔다. 기계는 멀쩡했다.

멀쩡한 기계가 하루 종일 아무것도 뱉지 않는 소리가 어떤 것인지 나는 그 주에 처음 알았다. 팩스는 대기 상태에서 아주 낮게 웅웅거린다. 평소에는 들리지 않는다.

나는 리광호의 사무실로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열두 번 갔다. 다시 걸었다. 열두 번.

끊고 나서 나는 오세환에게 말했다. "다음 분기 발주 얘기를 하려고 그랬어."

오세환이 "예" 하고 대답했다. 아무도 묻지 않은 말에 대답하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목요일에는 단둥으로 걸었다. 왕더셩은 두 번째 신호에 받았다.

"강 사장! 살아 있었소?"

"바쁘셨습니까."

"바쁘긴 뭐이 바빠. 요새 환율 때문에 다들 정신이 없지." 그쪽에서 뭔가를 씹는 소리가 났다. "일 달러에 팔 원 칠 각이야. 작년 이맘때 오 원 팔 각이었는데. 물건값은 그대론데 내 손에 남는 게 줄었단 말이오. 이게 무슨 조화야."

"삼사분기 견적을 좀 받아 두려고 합니다."

"삼사분기." 그가 되뇌었다. "강 사장은 성질이 급해. 조선 사람은 다 급하지. 우리 아버지가 그러셨소, 밥은 익어야 먹는 거라고."

"주문이 들어와야 견적을 내지요."

"들어오지, 들어와. 저쪽이 물건을 안 사고 배기나." 웃음소리가 났다. "이번 여름은 다들 조용할 게요. 위에서 큰 사람들이 만나고 어쩌고 하면 밑에는 한참 아무 소리도 안 나. 늘 그래. 기다리시오."

기다리라는 말을 그날 두 번째로 들었다. 앞의 하나는 텔레비전이 한 말이었다.


유월 이십이일 밤에 나는 서류철을 꺼냈다.

꺼낼 이유가 없었다. 나는 거래가 끝난 서류를 다시 보지 않는다. 다시 보면 고치고 싶어지고, 고치고 싶어지면 언젠가 진짜로 고치게 된다. 그날 밤에는 그냥 손이 갔다.

다롄에서 받은 시험성적서가 맨 앞에 있었다. 방향족 0.7퍼센트. 올레핀 0.3. 인화점 81도. 좋은 숫자다. 규격이 방향족 1.0 이하니까 여유가 있다.

성적서 오른쪽 위에 로트 번호가 찍혀 있었다.

나는 수첩을 꺼냈다. 단둥 창고에서 드럼 옆면을 읽고 적어 둔 번호가 거기 있었다. 그날 밤 나는 그것을 소리 내지 않고 읽었다. 조명이 나빠서 두 번 읽었다.

두 번호를 나란히 놓았다.

앞의 네 자리가 달랐다. 뒤의 두 자리는 통 번호였다.

성적서는 샘플 로트의 것이고 드럼은 벌크 로트다. 그건 이 바닥에서 이상한 일이 아니다. 샘플로 시험하고 벌크로 출하한다. 다들 그렇게 한다. 규격이 같은 생산 배치면 문제가 없다.

영변 14화 제20장 기다림 — 전환컷

나는 볼펜으로 두 번호 사이에 선을 그었다. 그리고 그 선을 지우려다가 그만두었다.

앞의 네 자리를 다시 짚었다. 왼쪽에서 한 번, 오른쪽에서 한 번. 두 번 다 달랐다. 숫자를 세는 데는 이유가 있어야 하는데 그날은 이유가 없었고, 이유 없이 세는 사람이 어떤 상태인지 나는 알고 있었다.

내가 그날 밤에 실제로 한 일은 그것뿐이다. 나는 아무 데도 전화하지 않았고, 아무것도 확인하지 않았고, 아무에게도 묻지 않았다. 물건은 이미 압록강을 건너간 지 보름이 되어 갔다. 확인해서 나올 수 있는 답은 두 가지뿐이었고, 둘 중 하나는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답이 아니었다.

나는 서류철을 닫고 서랍에 넣었다. 그리고 담배를 사러 나갔다. 밤 열한 시였고 골목의 가게가 아직 열려 있었다.


목요일 아침에 오세환이 사무실 문을 열면서 물었다.

"사장님, 요새 왜 그러십니까."

"뭐가."

"이번 주에 계단으로만 올라오시고요. 담배도 하루에 두 갑 태우시고요." 그가 서류가방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아까부터 팩스 쪽을 보고 계셨습니다. 십 분 동안."

나는 그쪽을 보지 않았다고 말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이 친구는 눈치가 없지 눈이 나쁘지는 않다.

"세환아."

"예."

"물건이 잘 갔는지 안 갔는지는, 사는 쪽이 조용하면 잘 간 거다."

"그렇습니까."

"그래." 나는 창문을 열었다. 사층이라 매미 소리가 그대로 올라왔다. "그런데 조용한 게 두 종류다. 잘 받아서 조용한 거하고—"

거기서 말을 멈춘 것은 뒤의 말을 고르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고르면 그 말이 진짜가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오세환은 다음 문장을 기다리다가, 기다리는 게 실례가 되는 지점을 지나자 주전자에 물을 올렸다.


1994년 6월 20일~25일 · 영변, 방사화학실험실 제1공정

강태봉은 종이를 들고 오지 않았다.

한성철은 실장이 조종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그것을 보았다. 손이 비어 있었다. 지난 이 년 동안 이 방에 내려온 명령은 전부 종이로 왔다. 결재란과 대장 번호가 있고, 번호가 있으면 나중에 찾을 수 있다.

"제1공정 오늘부터 장입 올린다." 강태봉이 말했다. "이달 안에 끝내라. 위에서 그렇게 말했다."

"위라면 어디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총국이지."

"몇 톤을 이달 안에 말입니까."

"많이는 아니야. 한 톤 반. 이십오 개 채널 분량이다." 강태봉이 조작반 앞을 지나가며 계기판을 훑었다. 그는 계기를 읽을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읽을 줄 아는 사람처럼 보이는 법만 알았다. "협상은 물건을 가진 사람이 하는 거다. 위에서 그렇게 말했다."

"한 기사, 저 밖에서는 우리가 팔천 개를 쥐고 있다고들 하더라." 강태봉이 창 쪽으로 턱을 들었다. "팔천 개면 큰 물건이야."

"칠천칠백입니다."

"뭐?"

"봉이 칠천칠백 개 조금 넘습니다. 채널이 팔백열두 개고, 우라늄으로 마흔여덟 톤입니다." 한성철은 숫자를 말할 때 목소리를 낮추지 않았다. "팔천은 어림수입니다. 밖에서 그렇게 부르는 겁니다."

"어림수든 뭐든 물건은 물건이지."

"실장 동지." 한성철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설계 장입은 하루 백팔십입니다. 이달 안에 한 톤 반이면 하루 삼백입니다."

"그러니까 서두르라는 거 아니야."

"연료가 노에서 나온 지 열 주밖에 안 됐습니다. 설계는 여섯 달 이상 식힌 걸 전제로 돼 있습니다."

강태봉이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처음으로 한성철을 똑바로 보았다.

"한 기사, 나도 아네."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런데 나는 종이 없이 왔어. 무슨 뜻인지 알겠나."

한성철은 알았다. 종이가 없다는 것은 이 명령에 이름을 붙일 사람이 없다는 뜻이다. 잘되면 위의 이름이 붙고, 잘못되면 이 방의 이름이 붙는다.

그는 그것을 알고도 반대하지 않았다. 이 건물을 팔 년 동안 지었다. 소련이 없어진 뒤로 부품 하나를 구하려면 사람 다섯을 거쳐야 했고, 그렇게 구해다 붙인 계통이 지금 돌아가고 있다. 나라가 이 건물 하나로 협상 탁자에 앉아 있다면, 그 탁자를 지탱하는 다리가 자기 손끝에 있는 것이다. 그는 그 사실을 자랑스러워했고, 자랑스러워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장입 올리겠습니다." 그가 말했다. "다만 계기 확인은 따로 올리겠습니다."

"그건 자네 마음대로 하게." 강태봉이 문을 열었다. "종이로 올리든지."

'그건 자네 마음대로 하게.' 강태봉이 문을 열었다. '종이로 올리든지.'

남은 29화 · 약 104,967자 · 약 2시간 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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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변전 43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