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변 제2부 8,000
7화제10장 사재기
1994년 3월 22일~25일 · 서울 마포 / 여의도 / 어머니 집
라면 매대는 위에서 세 칸이 비어 있었다.

마포 아파트 상가 지하의 슈퍼였다. 십 년 전에도 있던 가게고 주인 여자도 그대로였는데, 나를 알아보지는 못했다.
남은 것은 맨 아래 칸의 우동사발면 몇 개와 아무도 안 집어 가는 매운 볶음면 한 줄이었다. 나는 그 줄이 몇 개인지 세었다. 열한 개였다.
생수 쪽으로 갔다. 그쪽은 판이 드러나 있었다. 진열대 바닥에 물때 자국이 네모나게 남아 있었다.
"물은 언제 들어옵니까."
"모르죠. 어제 트럭이 안 왔어요." 주인 여자가 고개도 들지 않고 말했다. "아저씨도 사재기하러 왔어요?"
"담배 하나 주십시오. 88 라이트."
칠백 원을 냈다. 베이징에서는 이 담배가 두 배 값에 나간다. 나는 그런 것을 계산하는 버릇이 들어 있었다. 물건을 보면 값이 먼저 보이고, 값을 보면 어디까지 실어 나를 수 있는지가 보인다.
뒤에서 카트 소리가 났다. 아주머니 하나가 카트 두 대를 앞뒤로 밀며 들어와 라면 매대 앞에 섰다. 남은 열한 개를 다 담고, 우동사발면까지 담았다. 주인 여자가 계산대에서 그것을 보면서 나에게 말했다.
"그저께 밤부터 저래요. 텔레비전에 그 사람 나오고부터."
밖으로 나오니 아파트 앞 게시판에 반상회 공고가 붙어 있었다. 그 옆에 손으로 쓴 종이가 하나 더 있었다. 생수 공동구매를 한다는 내용이었고, 밑에 통장 번호와 삐삐 번호가 적혀 있었다.
나는 서울에 이틀 있을 예정이었다. 명목은 본사 보고였다. 그 본사에는 간판이 없고, 보고는 남산 밑 다방에서 사십 분 만에 끝났다. 남은 것이 이틀이었다.
어머니는 문을 열자마자 내 손부터 보았다.
무엇을 들고 왔는지 보는 게 아니라 손이 어떻게 됐는지 보는 것이었다. 나는 손을 바지에 문질렀다.
"밥은."
"먹었어요."
"먹었으면 또 먹어."
베란다에 라면 상자가 쌓여 있었다. 다섯 개들이 묶음이 네 개. 나는 그것을 세었다. 열아홉이 나왔다. 다시 세었다. 스물이었다. 세 번째에도 스물이었다.
"어머니, 이거 왜 이렇게 사 놓으셨어요."
"너 오면 주려고."
"저 중국에 있잖아요."
"중국에는 라면 없나." 어머니가 부엌에서 대답했다. "아래층 여자가 다섯 상자를 샀단다. 그 집은 애가 셋이라 그렇다 치고."
나는 베란다 문을 닫았다. 유리에 김이 서려 있었다.
"어머니, 아래층에 제 얘기 뭐라고 하셨어요."
물이 끓는 소리가 잠깐 커졌다가 줄었다.
"회사 옮겼다고 했다."
"...예."
"군대 얘기는 안 했어. 니가 싫어할까 봐." 어머니가 냄비를 들고 나왔다. "무역회사 다닌다고 했다. 그거 맞지?"
"맞아요."
"그럼 됐다."
나는 국수를 먹었다. 다 먹고 나서 국물까지 마셨다. 어머니는 내가 다 먹을 때까지 앞에 앉아 있었고,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설거지를 하는 등 뒤로 어머니가 한 번 더 말했다.
"아래층 여자가 그러더라. 요새 무역회사가 그렇게 좋다고. 중국 가면 다 부자 된다고."
"...예."
"니는 언제 부자 되노."
"곧 됩니다."
물소리가 났다. 나는 그릇을 엎어 놓고 손을 씻었다. 개수대 옆 선반에 아버지 사진이 액자도 없이 서 있었다. 십 년 넘은 사진인데 유리가 없으니 먼지가 그대로 앉아 있었다. 나는 그것을 닦지 않고 나왔다.
유치원은 아홉 시에 문을 열었다.
나는 여덟 시 사십 분부터 건너편 전봇대 옆에 서 있었다. 그렇게 서 있으면 안 되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했다.
서정인이 아이 손을 잡고 왔다. 나를 먼저 본 것은 그쪽이었다. 걸음이 반 박자 늦어졌다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유진이 고개를 들었다.
하나. 둘.
이 초였다. 두 번째에 아이의 눈이 커졌다.
"아빠."
나는 무릎을 굽혔다. 다섯 살이면 아직 안아 올릴 수 있는 무게다. 아이는 내 목에 팔을 두르고 나서, 곧 팔을 풀고 유치원 쪽을 보았다. 친구가 부르고 있었다.
"들어가." 서정인이 말했다. 아이가 들어갔다.
우리는 문이 닫힐 때까지 같이 서 있었다.
"언제 가."
"모레."
"애한테 다음에 언제 온다는 말은 하지 마." 서정인이 가방끈을 고쳐 멨다. "지키지도 못할 거."
"안 했어."
"알아. 그래서 하는 말이야."
그녀는 인사하지 않고 갔다. 나도 부르지 않았다. 유치원 담장 안에서 아이들이 노래를 시작했다.
여의도에서 박두철을 만난 것은 그날 밤이었다. 만나기로 한 게 아니라 그냥 마주쳤다.
증권가 뒷골목 순댓국집이었고, 그는 후배로 보이는 소령 둘과 앉아 있었다. 정복이 아니라 잠바 차림이었지만 등이 그대로였다.
"야, 이거 누구야."
후배들이 일어섰다. 나는 계급이 없어서 인사를 받지 못했다.
"먼저 가라." 박두철이 후배들을 보냈다. 그리고 내 앞에 앉았다. 소주를 시켰다.

"너 뭐 하고 사냐."
준비해 온 대답이 있었다. 나는 그것을 그대로 말했다. 베이징에서 무역을 한다, 화공약품하고 계측기 중개다, 재작년에 진 빚은 아직 반쯤 남았다, 물건은 남이 만들고 나는 붙여만 준다.
"돈은 되냐."
"안 됩니다."
"그럴 것 같더라." 그가 잔을 채웠다. "야, 그때 왜 그랬냐. 참았으면 중령은 달았을 거 아니야."
"그러게 말입니다."
"이혼은... 됐다."
우리는 한동안 순대를 먹었다. 텔레비전에서 패트리어트 얘기가 나왔다. 미군 방공포병 부대가 곧 들어온다는 것이었고, 자막에 부대 번호가 떴다.
"저거 진짜 옵니까."
"온다." 박두철이 화면을 보지 않고 말했다.
"그럼 진짜 무슨 일이 나는 겁니까."
"내가 그걸 어떻게 아냐." 그가 잔을 비웠다. "나는 종이 읽는 놈이야. 종이에 적힌 거는 다 지난주 거고."
옆 탁자에서 넥타이를 푼 남자들이 판문점 얘기를 하고 있었다. 그 여섯 초가 이제는 사흘째 돌아가는 중이었고, 사람들은 그 말을 자기 말처럼 흉내 내며 웃었다. 웃고 나서 하나가 물었다. 그런데 우리 집에 쌀 얼마나 있지.
"야, 너는 좋겠다." 박두철이 다시 말했다. "이런 때 딴 나라에 있어서."
나는 명함을 꺼냈다. 동아상사 대표. 그 위에 인쇄된 세 글자를 그는 보지 않고 잠바 주머니에 넣었다.
계산대에서 내가 지갑을 꺼내자 그가 팔을 눌렀다.
"됐어. 내가 낼게."
"두철아."
"됐다니까." 그가 웃었다. 나쁜 웃음이 아니었다. 그게 더 오래 갔다.
마포대교를 걸어서 건넜다. 택시비를 아끼려는 것도 아니었는데 그냥 걸었다.
어머니가 봉지에 라면 열 개를 싸서 들려 보낸 것을 나는 아직 들고 있었다. 다리 위에서 바람이 불 때마다 봉지가 종아리를 쳤다.
난간에 기대 서서 강을 내려다보았다. 밑에는 검은 물이 있었고, 그 위에 다리 조명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나는 속으로 한 문장을 말해 보았다. 이 사람들 때문에 하는 일이다.
말이 되지 않았다. 문장은 입천장 어디에 걸려서 내려가지도 올라오지도 않았다. 나는 봉지를 반대편 손으로 옮겨 들고 다시 걸었다.
1994년 5월 8일~19일 · 평안북도 영변, 5MWe 원자로 건물 및 저장수조
소리는 위에서 났다.
원자로 상부 홀은 천장이 높아서, 인출기가 한 번 물릴 때마다 그 소리가 벽을 두 번 치고 돌아왔다. 쇠가 쇠에 앉는 소리, 잠깐의 정적, 그리고 감아올리는 소리.
한성철은 방사화학실험실에서 걸어 올라왔다. 그의 직장은 여기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 주일째 아침마다 여기로 왔다.
최영준이 난간 옆에 서서 위를 보고 있었다. 스물여덟 살, 용해공정 조작공. 그는 눈으로 보지 않고 소리로 세는 습관이 있었다.
"오늘 몇 개까지 갔어."
"아직 열아홉입니다, 과장동지." 최영준이 손목시계를 보지 않고 말했다. "어제는 이 시간에 열둘이었습니다."
"소리만 듣고 아나."
"물리는 소리가 다릅니다. 채널 가장자리 것은 한 번에 안 잡혀서 두 번 물립니다."
노는 멈춰 있었다. 멈춘 노 위에서 인출기가 돌아가는 소리는 가동 중일 때와 다르다. 송풍기 소리가 없으니 쇠 소리가 그대로 들린다. 한성철은 이 건물이 이렇게 조용한 것을 팔 년 동안 몇 번밖에 보지 못했다.
인출기는 올봄에 들어온 것이었다. 어디서 왔는지는 묻지 않는 것이 규칙이었고, 도색이 새것이라는 것만 누구나 알았다.
위에서 다시 소리가 났다. 최영준이 손가락을 하나 폈다.
"스물."
한성철은 수첩을 꺼냈다. 812. 노심의 채널 수다. 그는 그 아래에 오늘 날짜를 쓰고 20을 적었다. 이런 속도라면 두 달이 아니라 한 달이다. 계산은 걸어 내려오는 동안 끝났고, 계산이 끝나자 다른 것이 남았다.
두 달이면 자기 계통을 맞출 수 있었다. 한 달이면 못 맞춘다.
저장수조 건물은 조명이 절반만 켜져 있었다.
물은 맑았다. 깊이 아래에서 푸른빛이 났다. 처음 이 빛을 봤을 때 한성철은 스물다섯 살이었고, 그때는 이것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이 빛이 세다는 것과 옅다는 것을 구분한다. 오늘 것은 셌다.
바스켓 하나에 봉 마흔 개가 들어간다. 채널 네 개분이다.
로성근이 수조 난간에서 서류판을 들고 있었다. 계기공인데 요새는 기록을 맡고 있었다. 사람이 모자랐다.
"과장동지, 이거 좀 봐 주십시오."
그가 내민 것은 일본 글자가 찍힌 성적서였다. 지난겨울에 들어온 온도전송기 열두 대의 것이었다.
"나 일본말 모른다."
"저도 모릅니다. 그런데 숫자는 숫자 아닙니까." 로성근이 우리말 서식을 같이 내밀었다. "여기 표에 있는 걸 저쪽 칸에 옮겨 적었습니다. 오차 영점오도. 다 맞습니다."
"검사는 했나."
"어제 조종실에서 물 끓여 놓고 담가 봤습니다. 백도까지는 딱 맞습니다."
"그 위는."
"백도 위로는 끓는 물로 못 합니다." 로성근이 서류판을 옆구리에 끼었다. "성적서가 있는데 뭘 더 합니까."
한성철은 서명란을 보았다. 로성근의 이름이 이미 적혀 있었다. 그는 자기 도장을 찍지 않고 돌려주었다. 나중에 보자고 했고, 로성근은 알겠다고 했다.
량현식이 걸레를 들고 지나가다 난간 앞에 멈춰 섰다. 물속을 들여다보는 얼굴이 아이 같았다.
"뜨겁습니까?"
"만지면 죽는다." 로성근이 대꾸했다. "물이 다 막아 준다. 물이 없어지면 그때 죽는 거고."
"물이 왜 없어집니까."
"없어질 일이 없지." 로성근이 서류판으로 량현식의 어깨를 툭 쳤다. "일 봐라."
수조 쪽에서 새 바스켓이 내려가는 소리가 났다. 물이 잠깐 흔들렸다가 가라앉았다.
봉 마흔 개. 한성철은 속으로 나누어 보았다. 칠천칠백을 마흔으로 나누면 백구십 몇이다. 백구십 몇 개의 바스켓이 이 물속에 차례로 들어온다는 뜻이었다.
봉 마흔 개. 한성철은 속으로 나누어 보았다. 칠천칠백을 마흔으로 나누면 백구십 몇이다. 백구십 몇 개의 바스켓이 이 물속에 차례로 들어온다는 뜻이었다.
남은 36화 · 약 129,530자 · 약 3시간 5분
좋아요와 책갈피는 이 기기에 저장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