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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화제53장 방송이 끊긴 날

· 43화 중 37화 · 3,834자 · 약 5분 · 무료

글자3 / 5

팔월 팔일 밤, 평양 서성구역에서 총성이 있었다.

인민보안성 부대 하나와 평양방어사령부 예하 부대 하나가 창고를 두고 마주 섰다가 벌어진 일이라고 했다. 사망자 수는 그날 밤에 세 가지로 보고되었고 사흘 뒤에 네 번째 숫자가 왔다.

영변 37화 제53장 방송이 끊긴 날 — 헤더컷

당 청사 회의실에는 열 몇이 앉았다. 조명록 차수는 도별 보고철을 손바닥으로 눌러 놓고 있었다. 함경북도 항목은 칠월 십일일에서 멈춰 있었다.

"량강도는."

"연결이 안 됩니다."

"자강도."

"강계는 됩니다. 어제까지는 됐습니다."

장성택이 서류를 넘기며 말했다. "도당 책임비서 넷이 자기 자리에 없습니다. 확인된 것만 넷입니다."

"전력은."

"평양 시내는 하루 세 시간입니다. 지방은 집계가 안 됩니다."

"집계가 안 된다는 게 없다는 소리요, 못 세겠다는 소리요."

"못 셉니다." 실무자가 말했다. "세는 사람이 없습니다."

아무도 그다음 질문을 하지 않았다. 그다음 질문을 하려면 이 방에서 누가 결정을 내릴 수 있는지를 먼저 물어야 하는데, 팔월 십이일 이후로 그 답이 방 안에 없었다.

그날 이후 최고사령관의 공개 활동 보도는 나오지 않았다. 강계 방면으로 갔다는 말이 있었고, 다른 말도 있었다. 회의실에서 그 말을 입 밖에 내는 사람은 없었다.

팔월 십오일 오전, 조선중앙방송은 애국가로 시작했다.

애국가가 끝났다. 그다음이 없었다. 잡음도 아니고 다른 음악도 아니었다. 반송파만 삼 분쯤 살아 있다가 그것도 끊겼다.


서울 내곡동, 국가정보원 청사 사층. 휴일이라 사람이 적었다.

최수경은 수신기 앞에 앉아 기록지에 시각을 적었다. 09:00 개시. 09:03 애국가 종료. 09:06 반송 소멸.

그녀는 그 아래 여백에 연필로 세 줄을 썼다. 규정상 여백 의견은 연필로 쓰게 되어 있다. 지울 수 있어야 하니까.

평양 제1·제2방송과 확인 가능한 지방 중계소가 동시에 멎었음. 설비 고장이나 정전으로는 설명되지 않음. 중계 계통이 한꺼번에 서는 경우는 상위 지시가 없을 때뿐이며, 그것은 지시를 내리는 자리가 비어 있다는 뜻임.

세 번째 줄을 쓰고 그녀는 연필을 놓았다. 지난 오 년 동안 그녀가 쓴 여백 의견 가운데 이렇게 짧은 것은 없었다.

오후에는 회의가 두 번 있었다. 첫 번째 회의에서는 방송 중단이 일시적일 가능성이 논의되었고, 두 번째 회의에서는 그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녀가 받은 질문은 하나였다. 언제 다시 나오겠느냐.

"그건 제가 대답할 수 있는 종류의 질문이 아닙니다." 그녀가 말했다. "다시 나온다면 누가 다시 켠 것이고, 그 사람이 누구냐가 전부입니다."

저녁에 퇴근길 시장 앞에서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라면 매대가 비었고 생수 매대가 비었다. 계산대 옆에서 어떤 아주머니가 스무 개들이 상자를 두 개 안고 있었다. 라디오에서 대통령의 목소리가 나왔다. 동요하지 마십시오, 정부가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습니다.

1994년 삼월에도 같은 매대가 비었다. 그때는 저쪽이 불바다라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이번에는 저쪽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워싱턴은 그때 새벽 두 시였다.

국가안보회의 상황실 당직 장교가 서울에서 온 전문을 프린터에서 뽑았다. 발신은 마이클 코널리. 본문은 여섯 줄이었다.

방송 중단. 지방 통신 두절 확대. 국경 방면 병력 이동 징후. 그리고 마지막 줄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영변 시설의 관리 주체가 현재 확인되지 않음.

당직 장교는 그 마지막 줄에 형광펜을 그었다. 이 건물에서 지난 오 년 동안 반복해서 훈련한 상황이 있다면 그것이었다. 나라가 없어질 때 제일 먼저 찾아야 하는 것은 정부가 아니라 물질이다.

그는 전문을 두 번 읽고 수화기를 들었다. 이 시각에 깨워도 되는 명단이 벽에 붙어 있다. 명단은 위에서부터 열한 개다.

그가 첫 번째 번호를 누르는 동안, 프린터가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번 전문은 여섯 줄이 아니었다.


1999년 8월 16일 ~ 25일 · 단둥, 압록강 중조우의교 인근

단둥이 먼저 알았다.

팔월 십육일 아침에 세관 앞 화물 대기선이 사라졌다. 물건이 없어서가 아니라 통관이 멈춰서였다. 열이렛날에는 강변 도로에 주차 금지 표지가 새로 붙었고, 열여드렛날에는 그 도로를 아예 막았다. 여관들이 방을 안 내주기 시작했다. 나는 왕더셩이 세를 든 건물 사층에 방 하나를 얻어 들어갔다. 창이 강 쪽이었다.

"강 사장, 짐 싸 놨소?"

"어디로 갑니까."

"아무 데도 안 가지." 그가 창틀에 팔을 얹었다. "짐은 안 가도 싸 두는 거야. 물류하는 놈은 군대보다 사흘 빨라. 왜냐면 우리는 기름을 대는 놈들하고 밥 먹으니까."

그는 지난주에 세 곳에서 경유 대량 발주를 받았다고 했다. 발주처는 민간 회사였고 인도지는 강 상류 세 지점이었다. 값을 안 깎았다고 했다. 값을 안 깎는 손님은 정부라고 그가 말했다.

"이번엔 얼마나 벌겠습니까."

"이런 때는 안 벌어." 그가 웃지 않았다. "이런 때는 안 잃는 게 버는 거야."

아래층에서 왕샤오밍이 전화기를 붙들고 있었다. 홍콩과 광저우에서 문의가 계속 들어왔다. 국경이 어떻게 되느냐, 물건이 언제 나가느냐. 그 아이는 컴퓨터 화면을 보면서 대답했고, 나는 계단참에서 그걸 듣고 있었다.

십팔일 밤에 강 상류 쪽에서 사람이 넘어왔다는 말이 돌았다. 한둘이 아니라고 했다. 파출소가 아니라 향(鄕)에서 사람을 풀어 밥을 먹여 돌려보냈다고 했다. 돌려보냈다는 대목을 왕더셩은 두 번 말했다.


영변 37화 제53장 방송이 끊긴 날 — 전환컷

이십일 새벽 세 시 사십분쯤, 소리가 먼저 왔다.

디젤 엔진 소리는 물 위로 온다. 강이 소리를 실어 나른다. 나는 자다가 깼고, 깬 이유가 무엇인지 알아내는 데 십 초쯤 걸렸다. 창을 열었더니 소리가 커졌다.

불빛은 그다음이었다. 등화관제를 하다가 다리 초입에서 켠 모양이었다. 헤드라이트가 두 줄로 늘어서서 철교 위로 올라갔다.

나는 창가에 의자를 당겨 앉아 세기 시작했다.

트럭. 트럭. 트럭. 견인차. 트럭. 유조차. 십 분에 스물몇 대. 처음에는 종류별로 나눠 적었다. 수첩이 없어서 담뱃갑 안쪽에 정(正) 자를 그었다.

한 시간쯤 지나서 정 자가 담뱃갑 안쪽을 다 채웠다. 나는 여관 벽지 귀퉁이를 조금 뜯어 거기에 이어 그었다.

두 시간이 되었을 때 손이 멈췄다.

멈춘 이유가 손이 아파서는 아니었다. 세어서 뭘 하려는지 몰라서였다. 나는 오 년 동안 무엇이든 세어 왔다. 드럼 마흔 개, 목록 마흔한 행, 신문에 난 이름 여섯 개. 세면 그다음에 할 일이 생겼다. 보고할 데가 있었고, 값을 매길 데가 있었고, 옮길 데가 있었다.

이 트럭은 셀 데가 없었다.

나는 연필을 내려놓고 벽지 조각을 손바닥으로 문질러 뭉갰다. 다리는 그 뒤로도 사흘 밤을 그렇게 건너갔다.

라디오를 켰다. 중국 방송에는 아무 말도 없었다. 주파수를 돌리니 남쪽 방송이 잡혔다. 아나운서가 국경 지역 정세라고 했고, 관계 당국이 예의주시하고 있다고 했다. 예의주시라는 말을 세 번 들었다.

낮에는 반대 방향이 보였다. 강 저쪽에서 사람들이 걸어서 다리 쪽으로 나왔다가 되돌아갔다. 다리 초입에 철조망 뭉치가 놓여 있었다. 그 앞에서 되돌아가는 사람들은 뛰지 않았다. 뛸 힘이 없거나, 뛰어 봐야 소용없다는 걸 알거나.


이십사일 오후에 그가 왔다.

여관 계단을 올라와 문을 두드리고, 들어와서 앉기 전에 명함을 먼저 내밀었다. 나는 그것을 받아 두 손으로 들었다. 이름 세 글자가 있었다. 저우젠궈(周建國). 그 아래에 성 이름과 부서 이름이 있었다. 무슨 부서인지는 나도 안다. 이 바닥에서 오 년을 살고 그걸 모르면 벌써 죽었어야 한다.

"이제야 드립니다."

"오래 걸리셨습니다."

"명함은 필요할 때 주는 겁니다." 그가 앉았다. "이제 필요해졌습니다."

그는 창밖을 보았다. 다리 위로 아직 차가 다니고 있었다.

"들어간 깊이는 사십에서 칠십 킬로입니다. 그 안쪽으로는 안 갑니다." 그가 말했다. "신의주, 초산, 혜산, 회령. 그쪽 사람들 먹이는 게 우리 일이 됐습니다."

"왜 저한테 그 말씀을 하십니까."

"곧 여기 사람 많아집니다. 서울 사람, 미국 사람, 기자. 강 선생은 여기 오래 계셨고 아는 게 많으니까 누가 묻습니다." 그가 말했다. "묻는 사람이 저였으면 해서요."

"영변은 어떻게 됩니까."

그가 처음으로 나를 똑바로 보았다.

"우리 구역 밖입니다. 우리는 국경에서 사십에서 칠십까지고, 거기는 더 아래입니다."

"그럼 누가 갑니까."

"미국 사람이 갈 겁니다." 그가 말했다. "우리는 그러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그걸 만지면 세상이 우리한테 물어볼 게 너무 많아집니다."

나는 잠깐 생각하다가 물었다. "리광호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1997년 봄에 불려 들어갔습니다."

"압니다."

"어떻게 됐는지 아십니까."

"그건 우리 소관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무릎에 손을 얹었다. "우리 소관이 아닌 일은 우리가 모릅니다. 모르는 걸 안다고 말해 드리면 강 선생이 저를 못 믿게 됩니다."

그 대답이 거짓말인지 아닌지 나는 판단하지 못했다. 오 년 동안 거짓말을 직업으로 한 사람이 판단하지 못하는 대답이 있다.


가기 전에 그가 문고리를 잡고 돌아섰다.

"1994년 유월에 저는 세관 삼호 창고에 있었습니다."

나는 앉은 채로 있었다.

"당신들은 하나를 넣었습니다. 우리는 셋을 봤습니다."

그게 다였다. 그는 설명하지 않았다. 무슨 뜻인지 묻는 것이 이 방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을, 그가 아니라 내가 먼저 알았다.

셋이라니.

내가 한 것은 하나다. 화차 번호 두 개를 맞바꾼 것. 사 분. 만년필 하나. 나머지 둘이 무엇인지 나는 모른다. 모른다는 사실을 저 사람은 알고 있고, 그래서 저 말을 하고 갔다.

문이 닫혔다. 계단에서 발소리가 내려갔다.

나는 창가로 가서 다리를 보았다. 오 년 동안 나는 그 일을 나하고 정만호하고 서울의 몇 사람만 아는 일이라고 믿으며 살았다. 저쪽에서 사람을 풀어 나를 훑던 해에도 나는 그렇게 믿었다. 그 믿음이 무거워서 잠을 못 잔 밤이 몇 번인지는 세지 않았다.

그런데 이쪽 편에서는, 그게 그냥 오래된 이야기였을지도 모른다. 창고에서 본 일. 그해 유월에 있었던 일. 서류에 적지도 않고 그냥 알고 있다가, 오 년쯤 지나서 지나가는 말로 꺼내도 되는 일.

그렇다면 나는 오 년을 무엇으로 산 것인가. 아무도 모르는 일을 혼자 지고 있다고 믿으면서 산 오 년과, 이미 남들이 알고 있는 일을 혼자 무겁게 들고 있던 오 년은 같은 무게인가.

다리 위에서 유조차 한 대가 섰다가 다시 움직였다. 뒤에 선 차들이 경적을 울리지 않았다. 군용 행렬은 경적을 울리지 않는다.

다리 위에서 유조차 한 대가 섰다가 다시 움직였다. 뒤에 선 차들이 경적을 울리지 않았다. 군용 행렬은 경적을 울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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