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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화제37장 값

· 43화 중 26화 · 3,727자 · 약 5분 · 무료

글자3 / 5

여관 방에서 장부를 폈다.

경리용으로 따로 쓰는 노트다. 왼쪽에 날짜, 가운데에 품목, 오른쪽에 금액. 1993년 6월 11일 첫 줄부터 올해 9월까지 빠짐없이 있다. 나는 이 노트를 세 권 썼다.

영변 26화 제37장 값 — 헤더컷

첫 줄은 진공펌프 여섯 대와 벨로우즈 밸브 마흔 개다. 그건 좋은 물건이었다. 지금도 좋은 물건이다. 어디서 돌아가고 있는지 나는 모르지만 돌아갈 것이다. 그런 물건은 십 년을 간다.

넘기다 보면 1994년 5월 30일 다롄이 나온다. 그 줄에는 품목이 두 개 적혀 있고 금액이 하나 적혀 있다. 그다음 줄이 6월 7일이다. 6월 7일 줄에는 금액이 없다. 그날 나는 물건을 판 게 아니라 서류를 만졌기 때문이다.

합계는 대충 안다. 삼 년 반 동안 우리 회사를 지나간 돈이 육백만 달러쯤 된다. 절반은 진짜 장사였고 마진이 남았고 세금도 냈다. 나머지 절반이 무엇이었는지는 나만 안다.

나는 가방에서 계산기를 꺼냈다. 내 것은 액정이 멀쩡했다.

육백만을 나눴다.

사백팔십으로 나누니 만 이천오백이 나왔다. 이백사십으로 나누니 이만 오천이 나왔다. 육백만 달러는 그 방의 값으로 치면 만 이천에서 이만 오천 사이였다.

이것은 아무 의미도 없는 나눗셈이다. 나는 사람을 산 적이 없다. 내가 판 것은 펌프고 밸브고 계기다. 두 숫자는 아무 관계가 없다.

그런데 나눗셈은 됐다.

계측기와 특수강에 시세가 있는 것처럼 저것에도 시세가 있고, 시세가 있다는 것은 같은 저울을 쓴다는 뜻이다. 나는 그 저울 위에서 십 년을 살았다. 다른 물건을 올려놓았을 뿐이다.

십 년 전에 나는 부대에서 탄약 수불을 맡은 적이 있다. 그때 상급자가 한 말이 있다. 숫자가 맞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무엇을 세고 있는지가 중요하다고. 나는 그 말을 잘하는 소리로만 알아들었고 그날 저녁에 잊었다.

나는 계산기의 씨 버튼을 눌렀다. 액정이 영으로 돌아갔다.

장부에는 한 글자도 적지 않았다. 적을 칸이 없었다. 이 노트에는 품목란과 금액란만 있다.


1996년 12월 29일 ~ 30일 · 베이징 조양구 / 판문점(뉴스로)

단파는 저녁에 잘 잡힌다.

나는 사무실 창가에 라디오를 놓고 안테나를 창틀에 걸쳐 놓는다. 오후에는 잡음뿐이고 해가 지면 소리가 선다. 십이월 이십구일 저녁 여덟 시가 조금 넘어서 평양 방송이 담화문을 읽었다.

읽는 속도가 평소와 달랐다. 그 방송의 낭독은 보통 못을 박듯이 한 마디씩 끊는데, 그날은 문장을 붙여서 흘려 읽었다. 빨리 끝내려는 사람의 속도였다.

나는 이면지를 꺼내 받아 적었다. 두 번 방송했고 두 번째에 빠진 데를 채웠다.

다 적고 나서 담배를 붙이고 처음부터 읽었다.

깊은 유감. 그 네 글자가 있었다.

없는 것을 찾는 데는 시간이 좀 걸렸다. 사죄가 없었다. 사과도 없었다. 잠수함이 왜 거기 있었는지에 대한 말이 없었다. 죽은 사람 열여덟에 대한 말도 없고, 숫자가 하나도 없었다. 스물여섯도 없고 마흔아홉도 없었다. 대신 재발 방지와 조선반도의 공고한 평화라는 말이 뒤에 붙어 있었다.

나는 삼 년 반 동안 저쪽에서 온 문서를 읽어 왔다. 계약서, 검수보고, 클레임 통보, 독촉장. 저 사람들이 쓰는 문장에는 규칙이 있다. 자기가 잘못했다는 말을 절대 먼저 쓰지 않고, 쓰게 되면 그 앞에 반드시 조건을 붙인다. 조건이 없이 유감을 말한 문서를 나는 본 적이 없었다.

이 담화에는 조건이 없었다.

조건 없이 유감을 말하는 문서는 두 가지 중 하나다. 여유가 아주 많거나, 시간이 아주 없거나.

무엇 때문에 급한지는 세 가지쯤 짚인다. 중유가 있고, 경수로가 있고, 쌀이 있다. 가을 이후로 미국 의회에서 중유 예산 얘기가 나온다는 소리를 나는 홍콩 중개상한테 들었다. 잠수함이 얹힌 뒤로 그 소리가 커졌다는 것도 들었다. 저 담화는 그 소리를 향해 쓴 문장이다. 죽은 사람들을 향해 쓴 문장이 아니다.

이런 판단은 내 일이 아니다. 내 일은 물건을 파는 것이고, 판단은 서울에서 한다. 그런데 그날 저녁에는 판단을 서울로 보낼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나는 받아 적은 이면지를 접어 재떨이 옆에 두었다.


이튿날 오전에 옌징호텔로 갔다.

중국 방송으로는 그 그림이 안 나온다. 호텔 로비 옆 휴게실에 위성이 들어와서, 외국인 손님들이 거기서 홍콩 방송이나 일본 방송을 본다. 나는 커피를 시켜 놓고 두 시간을 앉아 있었다.

판문점이 나왔다.

남쪽에서 온 차량이 서고, 사람들이 관을 내려서 군사분계선 쪽으로 옮겼다. 저쪽에서 사람들이 나와 받았다. 받는 쪽 사람들은 모자를 벗지 않았다. 옮기는 동안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고, 화면에도 소리가 거의 없었다. 카메라가 관을 훑고 지나가는데 나무 색이 다 같았다.

화면에 그것이 몇 번 잡혔는지 세었다. 화면이 바뀌고 다시 잡히고 해서 정확하지가 않았다. 자막에 숫자가 나왔다. 스물넷.

스물여섯 중에 열셋이 사살되고 하나가 생포되고 하나는 못 찾았다고 했다. 열하나는 저희끼리 죽였다고 했다. 열셋에 열하나를 더하면 스물넷이다.

나는 그 뺄셈을 커피잔 받침에 손가락으로 그려 봤다. 맞았다. 맞으니까 더 이상했다. 사람 수가 딱 맞아떨어지는 일은 내 장사에서도 드물다.

옆자리 일본 사람 둘이 자기들 말로 뭐라고 하고는 웃었다. 웃을 만한 장면이 아니었는데, 그 사람들은 화면을 안 보고 있었다.

로비 신문대에 한국 신문이 며칠씩 지난 것으로 꽂혀 있었다. 십삼일 자 일면에 경제협력개발기구 가입 기사가 있었다. 선진국 클럽이라는 말이 제목에 들어가 있었다.


리광호가 전화를 한 것은 그날 저녁이었다.

석 달 만이었다. 없는 번호가 됐던 번호에서 걸려 왔다.

"강 사장, 오랜만입니다."

"연락이 안 되던데요."

"사정이 좀 있었습니다."

그는 안부를 이십 초쯤 하고 바로 물건으로 넘어갔다. 목록은 작년 겨울 것과 같은 계열이었다. 원격 세정 장치, 이온교환 흡착제, 고성능 여과기 사십 조, 그리고 덕트 교체용 강재. 다만 이번에는 규격이 붙어 있었다. 팩스로 넣겠다고 했다.

십 분 뒤에 종이가 나왔다. 세 장이었다.

규격을 쓴 사람은 아마추어가 아니었다. 여과기 효율을 소수점 아래 두 자리까지 못 박아 놓았고, 강재는 강종을 지정하면서 탄소 함량 상한을 따로 적어 넣었다. 그 상한을 적어 넣은 사람은 왜 그것을 적어야 하는지 아는 사람이다.

나는 그 종이를 읽으면서 손이 좀 찼다.

전화를 다시 걸었다.

"단가는 이쪽 견적대로 갑니까."

영변 26화 제37장 값 — 전환컷

"갑니다."

"작년에 부르신 값의 배가 넘습니다."

"압니다."

"리 선생, 한 번 더 확인합니다. 안 깎으시는 겁니까."

수화기 저쪽에서 종이 넘기는 소리가 났다.

"깎지 않습니다. 선금 삼 할을 먼저 보내겠습니다. 물건 도착 확인하면 나머지."

나는 삼 년 반 동안 이 사람과 거래하면서 값을 깎지 않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진공펌프 여섯 대를 살 때도 그는 나흘을 끌었다. 벨로우즈 밸브 마흔 개에 단가 이 달러를 놓고 사흘을 끌었다.

"선금을 먼저 보낸다고요."

"예."

"그쪽 사정이 어떻습니까."

"강 사장, 물건이나 준비해 주십시오."

말끝이 조금 올라갔다. 부탁하는 사람의 말끝이었다. 이 사람은 삼 년 반 동안 나에게 부탁을 한 적이 없다. 발주를 했고 검수를 했고 클레임을 걸었다.

"납기는 언제로 봅니까."

"빠를수록 좋습니다."

"리 선생, 그건 답이 아닙니다."

잠깐 조용했다.

"삼월 안으로 첫 물량이 들어가야 합니다. 삼월 안입니다."

이달 안이라거나 삼월 안이라거나, 저쪽에서 오는 날짜에는 늘 그 자리에 사람이 없다. 누가 그렇게 정했는지가 빠져 있다.


밤에 단둥으로 전화를 걸었다.

왕더셩은 자다가 받았는지 목소리가 잠겨 있었다.

"아이고, 강 사장. 이 시간에."

"제염 물건 얘기 들었소?"

"들었지. 나한테도 왔어."

"저쪽 지금 돈이 있소?"

수화기 저쪽에서 물 마시는 소리가 났다. 그러고는 웃는 소리.

"강 사장, 쟤네 돈이 없어. 작년에 밀린 대금도 아직 못 준 게 있어. 무연탄으로 갚겠다는 걸 내가 안 받았다구. 근데 말이야."

"말해 보쇼."

"근데 저건 사. 돈이 없는데 저건 사."

나는 수화기를 든 채로 창밖을 봤다. 조양구 쪽은 저녁에도 공사판 불이 켜져 있었다.

"그게 무슨 뜻이오."

"뜻이 어디 있어. 장사가 다 그렇지. 밥 못 먹는 집이 약을 사면 그건 약이 급한 거야. 나는 그런 집한테 약을 팔지, 밥을 팔지 않아. 값을 안 깎으니까."

"밥은 안 파쇼?"

"밥은 강 사장이 팔지 않소. 작년에 쌀 했잖아."

그가 자기 농담에 자기가 웃었다. 나는 웃지 않았고 그는 내가 웃지 않는 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

전화를 끊고 나는 서랍을 열었다.

1993년 십이월에 손으로 베낀 종이가 있고, 그 옆에 1995년 십일월의 목록이 있다. 나는 오늘 온 팩스 세 장을 그 옆에 놓았다. 세 뭉치가 나란해졌다.

서랍을 닫으려다가 다시 열어서, 첫 번째 것을 맨 위로 올려놓았다. 그 종이의 마흔한 줄을 나는 세 번 세었었다.


1997년 1월 초 · 베이징 조양구, 동아상사 사무실

밤 열한 시에 난방이 끊겼다.

이 건물은 열한 시에 중앙난방을 내린다. 그때부터 라디에이터가 식으면서 배관이 두 번 운다. 한 번은 크게, 십 분쯤 뒤에 한 번 작게. 나는 그 두 번을 다 듣고 나서 외투를 입었다.

책상 위에 A4 한 장을 놓았다. 자를 대고 가운데에 세로줄을 그었다.

왼쪽 맨 위에 날짜를 썼다.

1994년 6월 7일.

그 아래로 적어 내려갔다. 단둥 세관 3호 창고. 화차 두 량. 인수증 두 장. 차량번호 두 개. 걸린 시간 사 분. 만년필 한 자루.

그리고 물건. 드럼 마흔 개. 팔천 리터. 계약 규격은 방향족 일 퍼센트 이하였고, 그쪽으로 간 것은 그 규격에 못 미치는 로트였다. 몇 퍼센트짜리였는지는 나에게 알려 주지 않았다.

왼쪽은 여덟 줄에서 끝났다. 더 쓸 게 없었다. 삼 년 반을 한 일이 여덟 줄이면 적은 것 같지만, 나머지는 다 진짜 장사였다.

그날 밤 창고는 추웠고 전등이 하나만 들어와 있었다. 나는 서류철을 무릎에 놓고 앉아서 두 장의 인수증에서 차량번호 칸만 손댔다. 한 장은 획을 하나 더해 칠을 팔로 만들었고, 다른 한 장은 백지 양식에 옮겨 썼다. 지운 자리는 남지만 더한 자리는 남지 않는다.

사 분이라고 적은 것은 시계를 봤기 때문이다. 들어갈 때 열 시 오십사 분이었고 나올 때 오십팔 분이었다. 나는 그때 그것을 기록으로 남길 생각이 없었는데도 봤다. 그런 걸 보는 버릇이 있다.

사 분이라고 적은 것은 시계를 봤기 때문이다. 들어갈 때 열 시 오십사 분이었고 나올 때 오십팔 분이었다. 나는 그때 그것을 기록으로 남길 생각이 없었는데도 …

남은 17화 · 약 61,303자 · 약 8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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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변전 43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