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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화제43장 훑기

· 43화 중 30화 · 3,096자 · 약 4분 · 무료

글자3 / 5

전문은 이튿날 새벽에 보냈다. 세 줄이었다. 접촉선 두절, 감시 노출, 상대 기관의 라인 점검 정황. 마지막 줄에 철수 요청이라고 썼다가 지우고, 철수 판단 요청이라고 고쳐 썼다. 요청이라는 말과 판단이라는 말 중에 어느 쪽이 통할지 나는 알고 있었다.

보내 놓고 스물여덟 시간을 기다렸다.

영변 30화 제43장 훑기 — 헤더컷

기다리는 동안 홍콩 중개상 두 곳에 견적을 냈고, 창고 임대료를 이 개월치 미리 냈고, 사무실 창문 아래에서 자전거 벨 소리를 세었다. 오후 여섯 시에서 여섯 시 반 사이에 예순 번이 넘는다. 그 시간에 퇴근하는 사람이 많다는 뜻이지 다른 뜻은 없다.

답신이 왔다.

마침표 뒤에 칸을 두 번 띄우는 버릇이 있었다. 서울에서 이걸 두드리는 사람은 늘 같은 사람이다. 얼굴은 모른다. 목소리도 모른다. 나는 그 사람의 띄어쓰기만 안다.

본문은 한 줄이었다.

현 상태 유지.

다섯 글자다. 그 다섯 글자를 누가 어느 방에서 몇 분 만에 정했는지 나는 모른다. 회의가 있었는지, 아니면 누가 지나가면서 결재판에 서명만 했는지도 모른다. 내가 아는 것은 내가 그 방에 없었다는 것뿐이다.

군에 있을 때는 이런 것을 명령이라고 불렀고, 명령에는 부대와 날짜와 서명이 붙었다. 여기 오는 종이에는 아무것도 안 붙는다.

나는 그 종이를 손바닥으로 폈다가 접었다가 다시 폈다. 세 번 그러고 나서 재떨이에 놓고 성냥을 그었다. 이건 태워도 되는 종이였다.


1997년 3월 ~ 5월 · 단둥 왕더셩의 집 / 서울 내곡동

압록강 얼음은 삼월 중순에 풀렸다. 풀릴 때는 소리가 난다. 밤에 창을 닫아 놓아도 들린다. 왕더셩은 그 소리를 사십 년 넘게 들었고, 얼음이 풀리면 물건이 움직인다는 것도 그만큼 오래 알았다.

손님은 오후 네 시에 왔다. 회색 점퍼에 좋은 구두를 신은 사내였다. 자기를 소좌라고 하지 않고 그냥 김이라고 했다. 구두는 좋은데 뒤축에 진흙이 묻어 있었다. 택시를 안 탄 사람의 진흙이다.

"김 동무, 앉으시오."

거실 옆방에서 라디오 소리가 났다. 아들이 일본말 방송을 틀어 놓고 사전을 넘기고 있었다. 스물셋이면 무슨 말이든 배워 두는 게 남는 장사다.

왕더셩은 일어나 그 방 문을 닫았다. 닫고 나서 다시 앉았다.

"차 드시오. 좋은 건 아니오."

"괜찮습니다."

김이라는 사람은 찻잔을 받아 무릎 위에 놓았다. 손톱이 짧게 깎여 있었다. 그리고 본론까지 십오 분이 걸렸다. 급하지 않은 사람의 방식이었다. 그동안 날씨를 묻고 강이 언제 풀리는지를 물었고, 아무것도 받아 적지 않았다. 받아 적지 않는 사람이 더 잘 기억한다.

"왕 사장 아버님이 지원군이셨다지요."

"오십 년에 저 다리로 건너갔소. 돌아올 때 한쪽 귀가 없었고."

"고맙습니다."

"고맙단 말은 그때 들었으면 값이 나갔을 거요."

김이 안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내 무릎에 놓았다. 펴지는 않았다. 두 번 접은 자국이 깊어서 접힌 데가 하얗게 일어나 있었다.

"작년하고 재작년에 조선 쪽으로 넘어간 화물 중에 계측기하고 특수강이 있습니다. 발주 서류에 회사 이름은 여럿인데, 통관은 대부분 왕 사장 손을 거쳤더군요."

"통관은 내 밥이오. 나 아니면 누가 하오." 왕더셩은 엄지로 찻잔 테두리를 문질렀다. "이 바닥에 조선 물건 만지는 회사가 서른 몇 개요. 그 서른 몇 개가 다 내 사무실 앞을 지나가오."

"서른네 개입니다."

"세 봤소?"

"세는 게 제 일입니다."

"이름이 하나 필요합니다. 회사 말고 사람."

왕더셩은 찻물을 따랐다. 주전자가 비어서 반 잔밖에 안 나왔다.

"김 동무, 나는 장사꾼이오. 장사꾼한테 사람 이름을 물으면 값이 붙소."

"값을 물으러 온 게 아닙니다."

"알고 있소. 그러니까 내가 값을 안 부르는 거요."


영변 30화 제43장 훑기 — 전환컷

김이라는 사람이 가고 나서 왕더셩은 종이 한 장과 연필을 꺼냈다.

이름을 두 개 썼다.

하나는 리광호. 핵공업부 대외사업국, 베이징 주재. 사 년 동안 그에게서 나온 발주가 몇 건이고 그 몇 건에서 자기가 얼마를 챙겼는지는 장부를 안 봐도 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이미 끝났다. 소환장이라는 것은 도착하기 전에 냄새가 먼저 온다. 앞으로 이 이름에서 나올 돈은 영이다.

다른 하나는 강 사장. 동아상사. 이 사람은 지난 사 년에 자기한테 삼십이만 달러를 벌어다 주었다. 계산이 빠르고, 값을 깎되 약속한 날짜는 지키고, 신용장을 남보다 사흘 먼저 연다. 앞으로 이 이름에서 나올 돈은 아직 숫자가 있다.

그는 두 이름 옆에 연도를 적어 보았다. 구십삼, 구십사, 구십오, 구십육. 리광호 쪽은 구십육에서 줄이 끊기고 강 사장 쪽은 아직 안 끊긴다. 줄이 끊긴 이름을 지키는 것은 장사가 아니라 인정이고, 인정에는 값을 매기는 자리가 없다.

왕더셩은 지우개를 들었다. 아래쪽 이름을 지웠다. 종이가 얇아서 두 번 문지르니 지워졌다. 삼 초쯤 걸렸다.

지운 자리에 연필 자국이 희미하게 남았다. 그는 그 자리를 손톱으로 긁었다. 종이가 보풀었다.

그가 아들에게 늘 하던 농담이 있었다. 나는 물건을 두 번 판다. 한 번은 물건으로, 한 번은 물건 판 얘기로. 물건은 벌써 다 팔았다. 남은 것은 얘기다.

밤에 저우젠궈가 들렀다. 성청 사람이 저녁 여덟 시에 남의 집 대문을 두드리는 일은 흔치 않다.

"조선 사람이 낮에 왔다면서."

"차 마시고 갔소."

"차만 마셔라." 저우젠궈는 신발을 벗지 않고 문간에 서 있었다. "우리 땅에서 사람이 없어지면 서류가 는다. 나는 서류가 싫다."

"주임 동지, 나는 통관 서류로 먹고사는 사람이오."

"그건 네 서류고." 저우젠궈가 돌아섰다. "왕 사장, 강물 풀렸더라."

문을 닫다가 왕더셩은 대문 밖에 차가 없는 것을 보았다. 하루에 두 사람이 걸어서 왔다.


서울에서 그 문장이 온 것은 오월이었다.

조서 요약본 열두 장 중에 여덟 장째, 아래에서 네 번째 줄이었다. 진술자는 조선로동당 국제담당 비서를 지낸 사람이고, 기술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다고 스스로 먼저 말했다고 조서에 적혀 있었다. 앞뒤로는 사람 이름과 부서 이름뿐이었다. 그 네 번째 줄만 결이 달랐다.

영변은 3년 전에 죽었습니다. 우리는 없는 것을 팔고 있었습니다.

최수경은 그 두 문장을 세 번 읽었다. 연필을 들지 않고 읽었다.

질문자가 이어서 물은 것도 적혀 있었다. 몇 년 몇 월입니까. 모른다고 했다. 어느 회의에서 들었습니까. 그 대답 자리는 두 줄이 비어 있었다.

그러고 나서 캐비닛 아래 칸에서 서류철 하나를 꺼냈다. 1994년 7월이라고 적혀 있고, 그 위에 먼지가 얇게 앉아 있었다. 손끝으로 쓸었더니 표지 색이 두 가지가 되었다.

그래프였다. 세로축은 방출량, 가로축은 유월 이십구일부터 칠월 오일까지. 봉우리 하나가 솟았다가 뚝 끊긴다. 그때 그녀가 여백에 연필로 적어 둔 숫자가 그대로 있었다. 1.4~1.8톤.

사십팔 톤을 처리하는 데는 넉 달이 든다. 넉 달짜리 일을 시작해서 사흘 만에 끊은 것이다. 성공한 작업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

그녀는 종이 귀퉁이에 나눗셈을 했다. 채널 하나에 오십구 킬로그램. 일 점 오 톤이면 스물다섯 채널. 봉으로 옮기면 이백사십 개 남짓이다. 칠천칠백 개 중에 이백사십 개. 거기서 손을 멈춘 것이다.

그때 그녀가 쓴 결론은 한 줄이었고, 그 한 줄은 그해 칠월에 아무도 읽지 않았다. 김일성이 죽은 주일이었으니까.

국장실 문은 열려 있었다. 홍기택은 책장을 비우는 중이었다. 상자가 세 개 나와 있었다.

"국장님."

"자네 그거 들고 왔구만." 그는 돌아보지도 않았다. "삼 년 됐지."

"이 년 십 개월입니다."

"그때 그거 올렸으면 어떻게 됐을 것 같나. 팔월에 우리가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자네도 알잖아. 재처리했다, 폭탄 두 발이다. 거기다 대고 자네가 뭐랬을 건데. 사고 났을 겁니다? 무슨 사고요? 모릅니다?"

"모른다는 것도 정보입니다."

"모른다는 건 정보가 아니라 사표야." 홍기택이 책 한 권을 상자에 넣었다. "나는 유월에 나가."

"예."

그가 책등을 손바닥으로 눌러 상자 안에서 줄을 맞췄다. 틀리지 않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쓰지 않는 것이다. 그 손이 사십 년 동안 배운 것이 그것이었다.

"이번엔 내 결재란 비워 놓고 올려. 나 지나가면 늦어."

최수경은 보고서를 그날 저녁에 올렸다. 결론부에 확률 구간을 적었다. 사십에서 팔십. 그 구간을 좁히지 못하는 이유를 열한 줄로 썼다.

여백에는 연필로 한 줄을 달았다. 규정이 그렇다. 새 시료 없이 이 구간은 좁혀지지 않음.

요약 한 장은 사흘 뒤 연락 채널로 미국 쪽에도 넘어갔다. 그것을 받은 사람은 서울지부 부지부장 마이클 코널리였고, 그는 그 문서를 누가 썼는지 끝내 알지 못했다.

요약 한 장은 사흘 뒤 연락 채널로 미국 쪽에도 넘어갔다. 그것을 받은 사람은 서울지부 부지부장 마이클 코널리였고, 그는 그 문서를 누가 썼는지 끝내 알지 못…

남은 13화 · 약 47,158자 · 약 6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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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변전 43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