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LLUSIONTOON

28화제40장 눈

· 43화 중 28화 · 3,638자 · 약 5분 · 무료

글자3 / 5

여관 방으로 돌아와 외투를 벗지 않고 앉았다.

수첩을 폈다. 뒤쪽 빈 장을 폈다. 앞쪽은 견적과 납기와 화물 번호로 채워져 있다. 이 수첩에 나는 사람 이름을 적은 적이 없다. 이름은 외운다. 적어 두면 남는다. 그것이 우리 쪽에서 배운 첫 번째 것이었다.

영변 28화 제40장 눈 — 헤더컷

썼다.

로은별.

쓰고 나서 그 옆에 나이 칸을 그었다. 그어 놓고 손이 멈췄다.

아홉 살이라고 들었고 열한 살이라고 들었다. 나는 두 번 다 대답을 들었고 두 번 다 고쳐 묻지 않았다. 고쳐 물었으면 셋 중 하나가 됐을 것이다. 아홉이거나 열하나거나, 아니면 아이가 세 번째 숫자를 댔거나.

그때 나는 알아서 뭐 하겠느냐고 생각했다. 그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지금 말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알았어도 나는 아무것도 안 했을 것이다. 다만 지금 이 칸을 채울 수는 있었을 것이다.

칸을 비워 뒀다.

그 아래에 날짜 칸을 하나 더 그었다. 보름 전인지 열흘 전인지 나는 모른다. 그 칸도 비워 뒀다.

이 이름은 어디에 적혀 있나.

회령 어느 인민반 명부에 있었을 것이다. 학교 출석부에 있었을 것이다. 그 종이들이 지금 있는지 없는지 나는 모른다. 중국 공안 조서에는 없을 것이다. 이름을 물어볼 사람이 없었으니까. 우리 쪽 어디에도 없다.

내가 아는 한, 이 세상에서 그 이름이 적힌 종이는 지금 내 앞에 있는 이것 하나다.

그리고 이 종이를 쓴 사람은 그 아이가 왜 회령에서 나왔는지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나는 그 설명을 이달 초에 해 보려다가 새벽 세 시에 태웠다.

수첩을 덮었다.

저고리 안주머니에 넣었다. 왼쪽이었다.


1997년 2월 12일 · 베이징 주재 한국 공관 / 서울 내곡동 / 평양

새벽에 눈이 조금 내렸고 여덟 시가 되기 전에 다 녹았다. 장 서기관은 정문 안쪽 초소에서 젖은 아스팔트를 내다보며 담배를 반쯤 피웠다. 석탄 때는 냄새가 안개에 섞여 낮게 깔려 있었다. 수요일이었고, 거리는 수요일치고 조용했다.

택시 한 대가 골목 어귀에 섰다. 미터기를 끄지 않은 채였다.

내린 사람은 둘이었다. 앞선 쪽이 노인이었다. 회색 외투에 목도리를 매지 않았고 장갑도 끼지 않았다. 뒤에 선 사람이 서류가방을 들고 있었는데, 가방이 가벼워 보였다.

노인이 초소 창구 앞에 서서 말했다.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비서 황장엽입니다."

장 서기관은 담배를 든 채로 되물었다. "예?"

노인은 같은 문장을 같은 속도로 다시 말했다. 억양이 평양 말이었고 발음이 하나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옆 사람이 덧붙였다. "려광무역총회사 사장 김덕홍입니다."

장 서기관은 담배를 발밑에 떨어뜨려 밟았다. 초소 안쪽 전화를 들었다가, 들고만 있다가, 도로 내려놓았다.

"들어오십시오."

문이 열리는 데 사 초, 두 사람이 들어오는 데 육 초, 다시 닫히는 데 사 초가 걸렸다. 골목에서는 아무도 그것을 보지 않았다. 택시는 미터기를 켠 채로 한참 서 있다가 그냥 갔다.

응접실에서 노인은 종이 석 장을 달라고 했다. 만년필은 자기 것을 꺼냈다. 김덕홍은 무릎에 손을 얹고 앉아 있었고, 손등의 힘줄이 가만있지 못했다.

"물을 좀 드릴까요."

"괜찮습니다."

노인은 첫 줄을 쓰고 잠깐 멈췄다가 계속 썼다. 글씨가 컸다. 다 쓰고 나서 종이를 돌려 놓고, 두 손을 무릎에 얹었다. 마치 강의를 마친 사람 같았다.

공사가 내려왔을 때 그가 물은 것은 딱 하나였다.

"이 건물 안에서는 우리가 안전합니까."

"안전합니다."

"바깥은 중국 땅이지요."

"그렇습니다."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고 더 묻지 않았다.

장 서기관은 이층으로 올라가 캐비닛에서 북한 인명자료집을 꺼냈다. 한 해에 한 번 갱신되는 물건이고, 대개는 아무도 펴 보지 않는다. 황 자 항목은 세 페이지째에 있었다. 흑백 사진 속 얼굴이 지금 아래층에 앉아 있는 얼굴보다 살이 조금 더 있었다.

그가 자료집을 들고 내려가려는데 공사가 손을 저었다.

"확인하지 마. 물어봐서 확인되는 사람이면 여기 안 왔어."

전문은 열두 시 전에 나갔다. 여덟 줄이었다. 그 여덟 줄을 쓰는 데 세 사람이 붙었고, 세 번 고쳐 썼다. 마지막에 지운 것은 '추정'이라는 두 글자였다.

정문은 그날 정오까지 다시 열리지 않았다. 오후에는 사복 차림의 중국 공안 두 명이 골목 맞은편 담배 가게 앞에 서 있었다. 저녁에는 네 명이 되었다.


내곡동에는 그날 오후에 들어왔다. 여덟 줄짜리 전문이었고, 그다음에 팩스로 이력서 한 장이 왔다.

가져온 사람은 통신과의 차은희였다. 그녀는 전문 사본을 책상 모서리에 놓으면서 한 번 더 읽었다.

"이거 진짜예요?"

"진짜인지 아닌지는 이 종이로는 몰라요."

영변 28화 제40장 눈 — 전환컷

"그럼 뭘 봐요."

"이 사람이 앞으로 무슨 말을 하는지를 봐요. 그리고 그 말이 우리가 이미 아는 것과 어디서 어긋나는지를."

최수경은 그것을 책상 위에 반듯하게 놓고 위에서부터 읽었다. 1923년 평안남도 강동군. 평양고보. 일본 주오대 법학부 중퇴. 김일성종합대학 정치경제학. 모스크바대학 철학박사. 김일성종합대학 총장. 최고인민회의 의장. 조선로동당 비서.

연필을 들었다. 밑줄을 그은 것은 그 어느 것도 아니었다.

여백에 썼다. 국제담당 비서는 어느 회의에 배석하는가. 1994년 6월에서 7월 사이, 그가 앉았던 방의 목록.

복도에서 부국장이 서류철을 옆구리에 끼고 지나가다 멈췄다.

"최 분석관, 자네 국은 뭘 뽑을 건가."

"회의 목록입니다."

"그 사람 사상가야. 논문 쓰던 사람이라고. 나사 하나 못 돌려."

"나사는 안 돌려도 됩니다. 저는 그 사람이 어느 방에서 누구 옆에 앉았는지만 알면 됩니다. 방 안에서 나온 말은 기술이 아니라 정치니까요."

부국장이 웃었다. "정치는 다 하지."

"그렇습니다. 그래서 다들 기억합니다."

그날 저녁까지 위층에서는 세 개의 다른 목록이 만들어졌다. 대공수사국은 남쪽 지하조직 명단을 원했고, 작전국은 그 사람이 김정일의 건강에 대해 무엇을 아는지를 원했다. 부장실에는 열한 시가 넘어서까지 불이 켜져 있었다. 권영해는 그날 밤 두 번, 베이징과의 통화 기록을 직접 받아 읽었다고 한다.

최수경은 이력서 아래쪽 빈 곳에 날짜 하나를 적어 두었다. 표시는 하지 않았다. 1994년 6월 26일.


평양의 회의실은 형광등 두 개 중 하나만 들어왔다. 무연탄 난로가 방 가운데 있었고 연통에서 나는 소리 때문에 앞사람 말이 잘 들리지 않았다. 외투를 벗은 사람이 없었다.

상좌가 명단을 불렀다. 받아 적는 것은 반탐과 소좌 김철령이었다.

"려광무역총회사."

"예."

"그 회사와 삼 년 안에 거래한 회사 전부. 베이징, 단둥, 선양. 조선 사람 회사만 말고 되놈 회사도, 조선족 회사도."

김철령은 볼펜을 두 번 흔들어 잉크를 내렸다. 이름이 계속 나왔다. 무역회사라는 것은 이름만 봐서는 무엇을 파는지 알 수 없게 지어져 있었다. 광명, 동방, 대성, 삼흥. 열네 번째쯤에서 상좌가 서류를 넘기느라 잠깐 끊겼고, 스물두 번째에 동아상사가 나왔다.

김철령은 그 이름을 적고 다음으로 넘어갔다. 서른네 개 중에 스물두 번째였다. 명단은 가나다순도 아니고 규모순도 아니었다. 누가 먼저 생각났는가의 순서였다.

"소좌 동무는 무엇부터 하겠소."

"돈이 어디서 나와 어디로 갔는지부터 보겠습니다. 사람은 거짓말을 하지만 신용장은 안 합니다."

"그건 되놈 은행 서류요."

"그러니까 은행에 있는 조선 사람부터 보겠습니다."

상좌가 잠시 그를 보았다. 난로 연통이 한 번 울렸다.

"소좌 동무, 이 일이 무슨 일인지는 알고 있소."

"당 비서 동지 한 분이 안 돌아오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렇게 말하지 마시오."

"예."

"그 사람이 무엇을 아는가는 우리가 정할 수 없소. 우리가 정할 수 있는 건 그 사람이 알던 것들이 지금 어디 있는가요. 사람은 옮길 수 있소. 회사는 못 옮기고."

김철령은 그 말을 받아 적지 않았다. 적을 문장이 아니었다.

"베이징으로 가라. 려권은 내일 아침에 나온다. 가서 이름 하나를 가져와라. 회사 말고 이름."

명단이 끝났을 때 김철령은 처음부터 다시 세었다. 서른네 개. 한 번 더 세었다. 서른네 개.

그는 일어서서 명단을 반으로 접고, 다시 반으로 접었다. 종이가 두꺼워서 안주머니에 넣자 외투 왼쪽이 조금 들렸다. 그는 그것을 손바닥으로 두어 번 눌러 폈다.


1997년 2월 15일 21시 52분 ~ 2월 25일 21시 03분 ·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서현동

토요일 밤 아홉 시가 넘으면 그 아파트의 복도에는 텔레비전 소리가 층층이 겹쳐 들렸다. 문이 두꺼운 집도 있고 얇은 집도 있어서, 어느 집 소리인지는 알 수 없고 소리가 있다는 것만 안다.

1404호 여자는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물소리 때문에 처음 것은 못 들었다고 나중에 진술했다. 두 번째 소리는 들었다. 짧고 마른 소리였다.

그녀는 수도를 잠갔다. 잠그고 나서 삼십 초쯤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틀었다.

같은 층 다른 집에서는 그것을 문 닫는 소리로 들었다. 아래층에서는 아무도 못 들었다. 열네 층은 높은 층이고, 2월의 서현동에는 창문을 열어 둔 집이 없었다.

복도에 사람이 나온 것은 세 시간이 아니라 삼 분 뒤였다. 삼 분은 짧다. 물을 올려놓으면 아직 끓지 않는다.

먼저 나온 사람은 1409호 남자였다. 슬리퍼를 신고 나왔다고 했다. 승강기 앞에 사람이 누워 있었다. 남자는 그 자리에서 한 걸음 물러섰다가, 도로 다가가 몸을 굽혔다.

누워 있는 사람은 눈을 뜨고 있었다.

남자는 자기 집으로 뛰어 들어가 전화를 걸었다. 걸면서 번호를 한 번 잘못 눌렀다고 했다. 그 사이에 1404호 여자가 문을 열고 복도를 내다보았고, 그다음에 두 집이 더 열렸다.

시범단지는 분당에서 사람이 가장 먼저 들어와 산 곳이다. 오 년쯤 되면 아파트도 사람 사는 냄새가 밴다. 복도에 자전거를 세워 둔 집이 있고, 김칫독을 내놓은 집이 있고, 신문이 아침마다 같은 자리에 떨어진다.

그날 밤 그 건물에서 나가는 사람을 본 사람은 없었다. 계단으로 내려갔는지 승강기를 탔는지도 나오지 않았다. 승강기는 두 대였고, 두 대 다 그 시간대에 몇 번씩 오르내렸다.

그날 밤 그 건물에서 나가는 사람을 본 사람은 없었다. 계단으로 내려갔는지 승강기를 탔는지도 나오지 않았다. 승강기는 두 대였고, 두 대 다 그 시간대에 몇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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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변전 43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