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변 제8부 셈(算)
42화제60장 같은 계산
2006년 4월, 최종본이 왔다.
결론부의 첫 문단은 그녀가 고른 인용으로 시작했다. 열두 해 전 오월에 어떤 사람이 안전보장이사회에 써 보낸 문장이었다.
인출이 같은 속도로 계속된다면, 기준에 따라 연료봉을 선별·격리·확보해 후일 계측할 기회는 며칠 내로 상실된다.
그때 잃은 것은 계측 기회였다. 이제 잃는 것은 기록이었다. 폐기물은 삭고 사람은 죽고 서류는 태워졌고, 그 셋은 다시 생기지 않는다.
규정상 본문에는 확정된 것만 쓴다. 확정되지 않은 개인 의견은 여백에 연필로 단다. 그녀는 열여덟 해 동안 그 규정을 지켰다.
그녀는 연필을 깎아서 결론부 옆 여백에 두 줄을 썼다.
이 보고서의 구간은 방법의 한계가 아니라 자료의 한계다. 자료는 앞으로 늘지 않는다.
지우개로 두 번째 줄의 마침표를 지우고 다시 찍었다. 그러고는 연필을 책상 오른쪽 첫 번째 서랍에 넣고 닫았다.
2008년 3월 ~ 11월 · 서울 · 경기도 광주 · 벽제
유진이 서류를 식탁에 펴 놓고 있었다.
교내 장학금 신청서였다. 성적 기준은 넘었고 소득 기준이 애매하다고 했다. 나는 된장찌개를 데우고 있었다. 그 애는 볼펜을 돌리다가 물었다.
"아빠, 부모 직업란에 뭐라고 써?"
"현재는 없다고 써."
"그럼 예전 건? 여기 최종 직업 쓰는 데가 있는데."
나는 물컵을 들었다.
삼 년 전부터 준비한 대답이 있었다. 무역업. 화공약품하고 계측기기. 베이징에 사무실이 있었고 1998년에 접었다. 여기까지는 사실이고, 사실이니까 말해도 된다. 나는 그 문장을 자동차 안에서도 연습했고 지하철에서도 연습했다.
컵이 입에 닿기 전에 멈췄다.
그 애가 다음에 물을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회사 이름이 뭐였는데. 그러면 나는 동아상사라고 대답하고, 그 애는 그 자리에서 검색을 할 것이다. 1993년 4월에 베이징 조양구에 등기된 그 회사는 어느 나라 어느 대장에도 남아 있지 않다. 폐업 기록조차 없다. 없는 회사를 다녔다고 대답한 아버지가 되는 것과, 대답하지 않는 아버지가 되는 것 중에 어느 쪽이 더 나쁜지 나는 그날 저녁에 처음 계산해 봤다.
"자영업이라고 써." 내가 말했다.
"무슨 자영업?"
"그냥 자영업."
유진은 나를 한 번 보고 그렇게 썼다. 그 애가 네 살 때 내 군복 단추를 세어 보던 손이었다. 그때 여섯 개까지 세고 일곱 번째에서 자꾸 처음으로 돌아갔다.
그날 밤에 서정인한테서 전화가 왔다.
"유진이가 서류 때문에 물어보던데."
"자영업이라고 쓰라 했어."
"당신 그때 사업자 등록도 없었잖아."
"없었지."
"그럼 그것도 거짓말이네."
전화기를 든 채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사람은 1993년 이월에 그것이 만들어진 일이라는 걸 알면서 이혼조정을 신청했고, 그 뒤로 십오 년 동안 한 번도 그 얘기를 먼저 꺼내지 않았다. 꺼내지 않는 것이 그 서류의 값이었다.
"애 등록금은 내가 낼게." 그 사람이 말하고 끊었다.
어머니 산소는 벽제에 있다.
비석에 이름을 셋 새겼다. 어머니 이름, 아버지 이름, 그리고 아들 강도현. 자식 이름은 원래 넣는 것이라고 석재상이 그랬다. 비석에는 직업을 쓰는 칸이 없다. 아무도 그런 걸 새기지 않는다. 나는 그날 그 앞에 서서 그게 다행이라고 생각했고, 그렇게 생각한 나를 나중에 여러 번 다시 생각했다.
어머니는 2001년 11월에 갔다. 마지막 이 년 동안 이웃들한테 아들이 회사를 옮겼다고 말하고 다녔다. 큰 데로 옮겼다, 중국 쪽 일이라 자주 못 온다. 장례식에 온 사람들 중에 내 직업을 물은 사람은 없었다. 상주가 사업하다 잘 안 됐다는 것은 다들 알고 있었고, 그런 건 묻지 않는 것이 예의였다.
방을 치울 때 싱크대 위칸에서 라면이 나왔다. 아홉 봉지였다. 1994년 삼월에 스무 봉지를 사 놓고 열 개를 내 손에 들려 보냈으니 남은 것이 열 개다. 그중 하나가 줄어 있었다. 유통기한은 1994년 9월까지였다. 칠 년을 그 자리에 뒀다는 뜻이다. 나는 그것을 세 번 세고 버렸다.
산소에서 내려오는 길에 석재상 앞을 지났다. 마당에 미리 깎아 둔 비석이 열댓 개 서 있었다. 이름 자리가 다 비어 있었다. 파는 물건이니까 그렇게 만드는 것인데, 나는 걸음을 멈추고 한참 봤다.
정만호는 경기도 광주의 요양병원에 있었다.
2007년 가을에 들어갔다고 했다. 예순이었다. 면회실이 아니라 병실에서 봤는데, 창가 침대였고 창밖에 축구장이 보였다.
그는 나를 보고 웃었다. 웃는 것은 예전에도 잘했다.
"오셨습니까."
"실장님."
"이 사람이 자꾸 문을 안 닫아요." 그가 창문을 가리켰다. 창문은 닫혀 있었다. "바람이 들어와요."
간병인이 이불을 올려 주었다. 그는 삼십 분 동안 다른 사람들 이야기를 했다. 이름 몇 개가 나왔는데 절반은 내가 모르는 이름이었고, 절반은 죽은 사람 이름이었다.
말투는 그대로였다. 명령을 부탁처럼 하는 말투. 물 좀 주시면 좋겠는데요, 저 사람 좀 나가라고 해 주시면 좋겠는데요. 1994년 유월에 남산 안가에서 그는 그 말투로 나에게 화차 얘기를 했다. 해 주시면 좋겠는데요, 라고.
그러다 나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그건 강도현이한테 물어보면 알아요. 걔가 그쪽을 잘 알아."
나는 그렇습니까, 하고 대답했다.
2000년 6월에 그가 203실 공작기록을 전량 폐기했다는 얘기는 나중에 들었다. 소각이 아니라 파쇄였고, 입회자가 두 명이었고, 폐기 확인서는 남지 않았다고 했다. 폐기 확인서를 남기지 않는 것이 폐기의 완성이다.
돌아가려고 일어섰을 때 그가 내 손목을 잡았다. 힘이 셌다.
"1983년에 자네 아버지 장례식에 내가 갔었네."
또렷했다. 조사 하나 틀리지 않았다.
"삼주 뒤였지. 그래서 그 열일곱에 못 들어갔어."
그러고는 다시 창밖을 봤다. 축구장에서 애들이 뛰고 있었다. 내가 뭐라고 물었는데 그는 대답하지 않았고, 그다음 주에 다시 갔을 때는 그 문장도 없었다.
박두철은 그해 십일월에 전화를 했다.
작년에 소장으로 나왔다고 했다. 종로에서 만났다. 그는 소주를 시키고 나는 맥주를 시켰다. 육사 동기 얘기를 한참 하다가 그가 잔을 놓았다.
"1999년에 알았다."
"뭘."
"네가 뭐 했는지."
그는 잔을 다시 들었다가 안 마시고 놓았다.
"십 년을 별렀는데 막상 말이 안 나오더라. 야, 미안하다. 내가 몰라서."
"뭘 안다고 그러냐."
"내가 너한테 뭐라고 했는지 다 기억난다. 애 엄마 생각은 해 봤냐고 했지. 어머니 생각은 해 봤냐고 했지."
"했지."
"그때 너 아무 말도 안 했잖아."
"할 말이 없었지."
"할 말이 없었던 게 아니라 못 한 거잖아." 그가 목소리를 낮췄다. "그게 다르잖아, 그게."
다르다. 그런데 그 다름을 증명할 서류가 2000년 6월에 파쇄되었다. 나는 그 말을 하지 않았다. 했으면 그가 더 미안해했을 것이고, 그게 그날 그 자리에서 내가 피하고 싶은 유일한 것이었다.
십오 년 동안 나는 그가 나를 빚 때문에 군복 벗고 중국 가서 장사하다 말아먹은 놈으로 알고 있다고 믿었다. 그렇게 알도록 만든 것이 내 일이었다. 그런데 그 위장은 십오 년이 아니라 여섯 해만 작동했고, 나머지 아홉 해는 나 혼자 그것이 작동하는 줄 알고 산 것이다. 나는 그 계산을 하다가 웃었다.
박두철이 그 얼굴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그 뒤로 그는 그 얘기를 다시 꺼내지 않았고, 나는 그가 사과했다는 사실이 나한테 아무 자리도 만들어 주지 않는다는 것을 그날 알았다.
집에 오니 유진이 서류를 두고 갔다. 제출하기 전에 한 번 봐 달라는 쪽지가 붙어 있었다.
부모 직업란에 자영업이라고 적혀 있었다. 나는 그 위에 두 줄을 긋고 무직이라고 썼다. 칸이 넓어서 글자 두 개가 가운데에 남았다.
2009년 12월 ~ 2010년 3월 · 서울 내곡동 · 그의 집
전화는 재작년 겨울에 한 번, 작년 십이월에 한 번 왔다. 두 번 다 만나자는 말은 없었다. 만나자는 말은 삼월에 왔다.
차은희는 창가 자리에 먼저 와 있었다.
산 아래라 카페 안이 어두웠고 손님은 우리뿐이었다. 그 여자는 1968년생이니 마흔둘일 텐데, 머리를 짧게 자른 것 말고는 1994년에 처음 봤을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때 그 여자는 이어폰을 한쪽만 끼고 내 전문을 치고 있었다.
십육 년 동안 세 번째로 마주 앉는 것이었다.
"오래 걸리지 않습니다." 그녀가 서류봉투를 밀어 놓았다. "복사본입니다. 반출 승인은 났습니다. 승인 사유는 자료 대조 자문입니다."
"자문한 적 없는데요."
"그렇게 적혀 있습니다."
봉투는 두꺼웠다. 그녀는 그것을 밀어 놓고 손을 도로 무릎에 놓았다.
"그분은 이달에 나가십니다." 그녀가 말했다. "정년은 아직 남았는데 앞당기셨습니다."
"그렇습니까."
"뭐 전해 드릴 말씀 있으시면."
있었다. 열 개쯤 있었다. 1994년 칠월 초에 크립톤 얘기를 왜 아무도 안 들었느냐고 묻고 싶었고, 1996년 감사 결과를 왜 나한테 안 알려줬느냐고 묻고 싶었고, 그 두 개는 이 사람한테 물을 것이 아니었다.
나는 커피 잔을 돌렸다. 없다고 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일어섰다. 잔에 커피가 삼분의 일쯤 남아 있었다. 식은 커피를 남기고 가는 사람은 흔한데, 그 여자는 잔을 밀어 놓을 때 받침까지 가지런히 놓고 갔다. 그 여자는 오 년 동안 내 문장을 타자로 쳐서 그 사람한테 넘겼고, 그 뒤로는 그 사람이 쓴 문장을 나한테 날라다 주었다. 우리 셋 중에 서로를 실제로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문에서 그녀가 돌아섰다.
"연필 자국은 없을 겁니다."
'연필 자국은 없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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