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변 제2부 8,000
8화제11장 인출
강태봉의 방은 3층 복도 끝이었다.
한성철은 제1공정 계통 점검표를 들고 들어갔다. 세 장짜리였고, 미완 항목이 붉은 볼펜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실장동지. 우리 계통은 아직 못 씁니다."
강태봉은 표를 받아 들었지만 넘기지는 않았다.
"어디가."
"산 회수 계통 전체입니다. 증발기 계기 검증이 안 됐고, 용매세정탑은 시운전을 백도 아래에서만 했습니다. 냉각 열교환기는 작년 십이월에 붙였는데 열질산으로는 한 번도 안 돌려 봤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봉이 너무 뜨겁습니다. 지금 뽑는 것들은 노에서 나온 지 몇 주밖에 안 됩니다. 우리 설계는 반년 이상 식힌 걸 넣게 돼 있습니다."
강태봉은 표를 책상에 내려놓고 창 쪽을 보았다. 창밖에는 구룡강이 있었고 그 너머로 산이 있었다.
"성철 동무."
"예."
"그건 동무가 걱정할 게 아니야."
"제 계통입니다."
"동무 계통이지. 그런데 언제 넣을지는 동무가 정하는 게 아니지 않나." 강태봉이 표를 서랍에 넣었다. 넣고 잠그지는 않았다. "위에서는 지금 저 봉을 몇 개 뽑았느냐만 묻는다. 언제 처리하느냐는 아직 안 물었어."
"물으면 어떻게 됩니까."
"물으면 그때 대답하지."
한성철은 나왔다. 복도 창으로 보니 원자로 건물 위 크레인이 또 한 번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그 자리에 서서 그것이 멈출 때까지 보았다.
사찰관 둘은 5월 내내 저장수조 건물에 매일 나왔다.
키가 큰 쪽이 수첩을 들고 적었고, 작은 쪽은 서서 보기만 했다. 통역은 원자력총국에서 나온 젊은 사람이 했다.
절차는 정해져 있었다. 운전자가 바스켓 번호를 부르고, 채널 식별번호를 부르고, 그 채널에서 나온 봉의 순서를 부른다. 통역이 옮기고, 사찰관이 적는다. 그리고 수조 안 어디에 그 바스켓을 놓았는지를 다시 부른다.
키 큰 사찰관이 물었다. 저 안을 직접 볼 수 있느냐고. 통역이 옮겼고, 운전자가 대답했다. 물속에 있는 것을 어떻게 직접 보느냐고.
사찰관이 다시 물었다. 그러면 지금 부른 채널 번호가 맞다는 것을 무엇으로 확인하느냐고. 통역이 옮기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 운전자가 기록부를 들어 보였다. 여기 적혀 있다고 했다.
"그 기록부는 누가 씁니까."
"제가 씁니다."
사찰관은 그 말을 적었다. 그리고 수첩을 덮었다.
한성철은 조금 떨어진 데 서 있었다. 그가 이 광경에서 본 것은 한 가지였다. 저 사람이 오늘 종이에 옮긴 것은 자기가 확인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들은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알고 있고, 저 사람도 그것을 알고 있다.
5월 19일에 사찰관들은 평소보다 일찍 갔다. 그날 저녁 조종실 라디오에서 외신 이야기가 나왔다는 말을 량현식이 전했다. 스물세 살, 삼월에 배치된 조작공이었다. 그는 그 말을 하면서 좀 웃었다. 무엇이 우스운지는 자기도 모르는 것 같았다.
"과장동지, 그럼 이제 우리 것 시작합니까?"
한성철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것이 없어서가 아니라, 자기가 대답할 자리에 있지 않다는 것을 그 순간 몸으로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점검표 사본을 다시 꺼내 붉은 표시가 몇 개인지 세었다. 열넷이었다. 그중 하나도 그의 손으로 지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1994년 5월 27일~6월 2일 · 빈 IAEA 본부 / 서울 남산, 안기부 북한정보국 분석실
빈의 그날 오후는 흐렸다.
도나우 강 건너 국제기구 단지 28층에서, 한 남자가 두 장짜리 서한의 세 번째 문단을 두 번 고쳤다. 처음 초안에는 "몇 주 안에"라고 되어 있었다. 그가 그것을 지우고 "며칠 안에"로 바꾸었다. 옆에 서 있던 사무국 직원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한은 다섯 시 십 분에 뉴욕으로 발송되었다. 발신자란에 한스 블릭스라는 이름이 인쇄되어 있었다.
서울에 그 문장이 도착한 것은 이튿날 새벽이었다.
빈 주재 대사관에서 외무부를 거쳐 들어온 텔렉스였다. 인쇄가 흐려서 대문자 몇 개는 앞뒤로 짐작해야 했다.
최수경은 그것을 세 번 읽었다.
한 번은 눈으로, 한 번은 소리 내지 않고 입으로, 세 번째는 연필을 들고.
If the discharge continues at the same rate, the opportunity to select, segregate and secure fuel rods for later measurements in accordance with Agency standards will be lost within days.
그녀는 백지를 한 장 꺼내 그 문장만 옮겨 적었다. 영문으로 한 번, 우리말로 한 번.
인출이 같은 속도로 계속된다면, IAEA 기준에 따라 연료봉을 선별·격리·확보해 후일 계측할 기회는 며칠 내로 상실된다.
"며칠 내로." 그녀는 그 부분을 두 번 밑줄 쳤다. 밑줄을 두 번 치는 것은 그녀의 습관이 아니었다. 그날은 그렇게 했다.
옆자리에서 차은희가 고개를 들었다. 통신·암호과에서 파견 나와 있는 스물여섯 살짜리였다. 남의 문장을 하루 종일 손으로 옮겨 적는 것이 그 애의 일이었다.
"과장님, 그게 무슨 뜻인데요."
"봉을 한 개씩 셀 수 있는 기간이 끝난다는 뜻이야." 최수경이 말했다. "저쪽이 어느 채널에서 무엇을 몇 개 뽑았는지, 지금은 물어보면 알 수 있어. 그게 물속에 다 섞이고 나면 못 물어봐."
"섞이면 없어지는 겁니까?"
"없어지지 않아. 못 세는 거지."
차은희는 그 대답을 받아 적지 않았다. 적을 서식이 없는 말이었다.

홍기택이 부른 것은 그날 오후였다.
"미국은 뭐래."
"아직 안 물었습니다."
"물을 거야." 국장이 서류철을 손등으로 두 번 쳤다. "물으면 우리가 뭐라고 대답하지."
"저쪽이 언제 재처리를 시작하느냐를 물을 겁니다."
"그럼 자네 대답이 뭔가."
"아직 없습니다."
"언제 생기나."
"모르겠습니다."
홍기택은 안경을 벗어 닦았다. 그가 안경을 닦을 때는 다음 문장이 이미 정해져 있다는 뜻이었다.
"최 과장. 나는 자네가 작년에 한 계산을 기억해. 나쁘지 않았어. 그런데 그거 결국 어디에 썼나."
"안 썼습니다."
"안 쓴 게 아니라 못 쓴 거지. 우리가 먼저 말하면 저쪽이 출처를 물으니까." 그가 안경을 다시 썼다. "이번엔 물어볼 때까지 기다려."
마이클 코널리는 6월 1일 오전에 왔다.
CIA 서울지부 부지부장, 마흔 살, 넥타이가 좋았다. 그는 자리에 앉기 전에 창문 쪽을 한 번 보았다. 남산 청사의 창문은 열리지 않는다.
"우리 판단은 이렇습니다." 그가 사진 두 장을 탁자에 놓았다. 판독선이 그어진 영변 저장수조 건물이었다. 옆 사진에는 방사화학실험실 지붕과 배기굴뚝이 있었다.
"굴뚝에서 아무것도 안 나오고 있습니다." 최수경이 말했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아직 시작 안 했다고 봅니다."
"그건 저희도 그렇게 봅니다."
"그럼 언제 시작합니까."
최수경은 사진을 들지 않았다. 이 방에서 저 사진을 찍을 수 있는 나라는 하나뿐이고, 그 나라는 지금 저쪽 사람들이 무슨 물건을 사고 있는지를 모른다. 그리고 그것은 이쪽이 안다.
"판단 중입니다."
코널리가 웃었다. "판단 중이라는 말은 워싱턴에서는 안 쓰는데요."
"여기서는 씁니다."
그는 사진을 두고 갔다. 문이 닫히고 나서 최수경은 그 두 장을 유리판 밑으로 밀어 넣지 않고 캐비닛에 넣었다. 유리판 밑은 다른 것을 위한 자리였다.
그녀는 그날부터 사흘을 집에 가지 않았다.
분석실 형광등은 밤 열한 시에 절반이 꺼진다. 남은 절반 아래에서 그녀는 계산기와 386 단말기를 번갈아 썼다. 계산기 자판의 7이 이미 닳아서 반들거렸다.
밤에는 손목이 먼저 아프고, 새벽 세 시쯤에는 눈이 종이 위에서 두 줄씩 건너뛴다. 그럴 때는 자리에서 일어나 복도 끝까지 걸어갔다 온다. 캐비닛에는 갈아입을 블라우스가 두 벌 걸려 있었다. 그것은 재작년부터 있었다.
문제는 계산이 아니었다. 저쪽 건물이 언제부터 돌아갈 수 있느냐였고, 그것은 저쪽 건물에 무엇이 아직 없느냐로만 알 수 있었다.
없는 것을 아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사는 것을 보는 것.
그래서 그녀가 사흘 동안 넘긴 것은 사진이 아니라 서류 뭉치였다. 1992년부터의 대북 조달 보고, 홍콩 중개상 목록, 세관 신고 품목, 그리고 지난겨울 베이징에서 손으로 베껴 온 마흔한 줄짜리 목록의 사본. 그 목록은 다른 것들 사이에 끼워져 있었고, 필사자의 이름은 어디에도 없었다.
두 번째 밤에 그녀는 그 마흔한 줄을 표로 옮겼다. 들어간 것과 아직 안 들어간 것으로 나누는 표였다. 세 번째 밤에 그 표의 오른쪽 칸이 왼쪽 칸보다 짧아졌다.
6월 1일 밤 열 시, 차은희가 배포본 한 장을 들고 왔다.
베이징에서 들어온 것이었다. 출처 표시는 영문 두 자와 숫자 하나. 다롄, 5월 30일 자, 계약 성립. 품목은 세 줄이었다. 희석제 사십 드럼, TBP 열두 드럼, 서류상 최종 수요처 흥남비료연합기업소.
"이거 누가 보낸 거야."
"모릅니다." 차은희가 말했다. "저는 타이핑만 합니다. 글씨가 좀 급하게 쓴 글씨예요."
최수경은 그 세 줄을 오래 보았다.
용매를 지금 산다는 것은 아직 안 부었다는 뜻이다. 다롄에서 계약한 물건이 배에 실려 압록강을 건너 영변까지 가는 데 걸리는 시간이 있고, 받아서 검수하고 계통에 채우는 데 걸리는 시간이 또 있다.
그녀는 보고서 첫 장에 한 줄을 썼다.
"재처리 개시 시점은 6월 중순 이후로 판단됨."
그리고 여백에 연필로 한 줄을 더 달았다. 규정상 원본 여백에는 연필로만 쓴다.
단, 저쪽이 서두를 이유가 생기면 순서는 바뀔 수 있음.
이튿날인 6월 2일, 블릭스가 안보리에 보고했고 워싱턴에서 제재 추진 방침이 나왔다. 라디오에서 그 두 소식이 연달아 흘러나오는 동안, 최수경은 책상 유리판을 들어 올려 어제 옮겨 적은 종잇조각을 밀어 넣었다. 유리 밑에는 이미 다섯 장이 깔려 있었다. 가장 오래된 것은 재작년 것이고, 거기 적힌 숫자는 90그램이었다.
그녀는 유리를 내려놓고, 새 종이가 다른 종이들과 겹치지 않게 손끝으로 밀어 자리를 잡아 주었다.
그녀는 유리를 내려놓고, 새 종이가 다른 종이들과 겹치지 않게 손끝으로 밀어 자리를 잡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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