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LLUSIONTOON

3화제4장 두 번째 이름

· 43화 중 3화 · 3,681자 · 약 5분 · 무료

글자3 / 5

1993년 6월 11일 · 단둥, 압록강변 식당 / 중조우의교가 보이는 창가

단둥에는 오후에 닿았다. 역 앞에서 택시를 타고 강변까지 오는 데 십오 분이 걸렸고 그동안 조선말 간판을 열두 개 보았다. 냉면집이 그중 셋이었다. 오세환이 창밖을 보며 여기 한국인 줄 알겠다고 했다.

영변 3화 제4장 두 번째 이름 — 헤더컷

여덟 시가 조금 넘자 건너편에 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나는 세었다. 하나, 둘, 넷, 일곱. 열한 개까지 세었을 때 하나가 꺼졌다. 열 개가 되었다.

강폭은 생각보다 좁았다. 다리가 두 개인데 하나는 중간에서 끊겨 있었고, 성한 다리 위로 화물차가 한 줄로 건너가는 중이었다. 후미등이 강물에 길게 늘어졌다.

"열 개." 뒤에서 목소리가 났다. "맞소?"

왕더셩이 의자를 빼고 앉았다. 반팔 셔츠에 손목시계를 두 개 차고 있었다. 하나는 왼손목, 하나는 오른손목이었다.

"열한 개였는데 하나 꺼졌습니다."

"그럼 열 개지." 그가 종업원에게 손가락 두 개를 들어 보였다. "강 라오반은 세는 걸 좋아하는구먼. 좋소. 이 바닥은 셈이 반이오."

뒤따라 들어온 청년이 아무 말 없이 창가 끝자리에 앉았다. 왕더셩이 턱으로 가리켰다.

"아들이오. 열아홉. 학교 방학이라 데리고 나왔소."

청년은 고개를 조금 숙였다. 그러고는 저녁 내내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젓가락을 쥐는 법이 아버지와 똑같았다.


요리가 여덟 가지 나왔는데 네 번째가 상어지느러미였다. 왕더셩이 국자를 들어 내 그릇에 먼저 떠 주었다.

"이거 값이 얼맙니까." 오세환이 물었다.

"먹으면서 값을 물으면 못 쓰오." 왕더셩이 웃었다.

나는 속으로 환산했다. 이 한 그릇이 위안으로 얼마고 달러로 얼마인지. 조절센터 환율로 계산하면 한 숫자가 나오고 공정환율로 계산하면 다른 숫자가 나왔다. 두 숫자의 차이가 오세환의 한 달 생활비쯤 되었다. 나는 국물을 다 먹었다.

"물건 얘기 합시다." 왕더셩이 냅킨을 접었다. "진공펌프 여섯 대. 밸브 마흔 개. 맞소?"

"벨로우즈 밸브 마흔 개입니다. 스테인리스."

"어디 겁니까."

"펌프는 일본 것, 밸브는 독일 것입니다."

그가 고개를 저었다. "일본 것 말고 톈진에 하나 있소. 반값이오. 도장은 똑같이 찍어 줍니다."

"일본 것으로 넣겠습니다."

"손해 보오."

"손해 봅니다."

왕더셩이 손목시계 두 개를 나란히 놓고 보는 사람처럼 나를 보았다.

"운임은."

"제가 붑니다. 항공으로 보내면 납기가 삼십 일에서 열이틀로 줄어듭니다. 차액은 제가 먹겠습니다."

"먹는다는 게 아니라 뱉는다는 소리 아니오."

"이번은요."

그가 이빨 사이로 짧게 바람을 넣었다 뺐다. 계산기를 꺼내 세 번 두드리더니 액정을 나에게 돌려 보였다. 사만 사백. 내가 아침에 계산해 온 숫자와 같았다.

"물건은 어떻게 건너갑니까."

"화차요. 저 다리로." 그가 창밖을 가리켰다. "세관에 신고서를 넣는데, 신고서에는 이름을 쉽게 씁니다. 펌프는 펌프고 밸브는 밸브지만, 어떤 건 공업용 세척유라고 쓰고 어떤 건 계측부속이라고 쓰오. 거짓말이 아니오. 세척유는 정말 세척유니까."

"검수는 누가 합니까."

"저쪽에서 사람이 나오오. 베이징에서도 나오고." 그가 젓가락으로 접시 가장자리를 툭 쳤다. "그 사람들은 상자를 안 뜯소. 서류만 보오. 서류가 맞으면 맞는 거요."

"서류가 틀리면요."

"틀리게 하는 사람이 어디 있소." 그가 웃었다. "틀리면 돈을 못 받는데."


라디오는 주방 쪽에 있었다. 아홉 시 뉴스가 나오는데 중국말이라 나는 절반만 알아들었다. 뉴욕, 조선, 조약, 그리고 뭐라고 길게.

왕더셩이 젓가락을 놓고 들었다. 다 듣고 나서 통역했다.

"조선하고 미국이 뉴욕에서 종이에 서명했소. 탈퇴를 세우기로 했다고. 세운다는 게 무른다는 소린지 미룬다는 소린지는 모르겠소만."

"임시 정지겠지요."

"조선말은 참 어렵소." 그가 컵을 들었다. "여섯 달 전에는 나간다더니 오늘은 안 나간다 하고. 라오반, 저런 게 나오면 물건 값이 오르오, 내리오?"

"모르겠습니다."

"오르오." 그가 손가락을 폈다. "싸움 붙을 것 같으면 저쪽에서 안 삽니다. 돈을 쥐고 있죠. 그런데 종이에 서명을 하면 사기 시작하오. 이제 시간이 좀 생겼다고 생각하니까. 사람이 그렇소. 나라도 사람이 하는 거고."

오세환이 수첩에 뭔가를 적었다. 왕더셩이 그걸 보고 웃었다.

"저 젊은 동무는 다 적는구먼. 적으면 안 되오. 적은 건 다 남소."

그가 잔을 채우고 창밖을 한참 보았다.

"우리 아버지가 저 다리로 건너갔소. 오십 년에. 지원군으로."

"돌아오셨습니까."

"돌아왔지. 한쪽 귀가 없이." 그가 잔을 비웠다. "작년에 갔소. 평생 저 강을 두 번 건넜소. 나는 한 달에 두 번 건너오. 세상이 좋아진 거요."


영변 3화 제4장 두 번째 이름 — 전환컷

계약서는 두 장이었다. 왕더셩의 회사 이름이 위에 있었고, 공급자 칸에도 그의 회사가 들어갔다. 동아상사는 아래쪽 부속 명세에 한 줄로만 나왔다.

"여기 서명하시오." 그가 종이를 내밀었다가 손을 멈췄다. "아, 아니지. 여긴 내가 하는 데지."

그는 만년필로 자기 이름을 쓰고, 회사 도장을 꺼내 숨을 한 번 불고 찍었다. 나는 아무 데도 쓰지 않았다.

"물건도 이름이 둘이오." 왕더셩이 도장을 헝겊에 닦으며 말했다. "하나는 만든 사람 이름, 하나는 판 사람 이름. 세관에 들어가는 건 두 번째 것뿐이오. 강 라오반은 두 번째 이름만 있으면 되오."

"편합니까, 그게."

"편하오." 그가 종이를 접었다. "그리고 나는 물건을 두 번 파오. 한 번은 물건으로, 한 번은 물건 판 얘기로."

"얘기는 누구한테 팝니까."

"사고 싶어 하는 사람한테." 그가 아들 쪽을 한 번 보고 목소리를 낮추지도 않고 말했다. "이 바닥에서 제일 비싼 게 얘기요. 물건은 값이 정해져 있는데 얘기는 부르는 게 값이오."

식당을 나올 때 그는 내 등을 두 번 두드렸다. 손바닥이 두꺼웠다. 부두 쪽에서 바람이 올라와 강 냄새가 났고, 다리 위에는 아직 화물차가 지나가고 있었다.

호텔 쪽으로 걸어가면서 오세환이 물었다.

"사장님, 저 사람 우리 편입니까?"

"편이 어디 있어."

"그럼 뭡니까."

"거래처."

나는 이 사람이 언젠가 나를 팔 것이라고 생각했다. 생각하면서 웃고 있었다. 웃는 게 연기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는 것이 그날 밤에 제일 마음에 걸렸다.

건너편 불은 여섯 개로 줄어 있었다.


1993년 7월 6일 · 서울 남산, 안기부 북한정보국 분석실

사백삼십이 점 육 년.

최수경은 그 숫자를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번에도 자료집을 펴서 확인했다. 아메리슘 이백사십일의 반감기. 표를 손가락으로 짚고, 소수점 아래 한 자리까지 눈으로 읽고, 책을 덮었다. 대학 실험실에서 배운 버릇이었다. 아는 숫자를 확인하는 데 드는 십 초가 아까웠던 적은 한 번도 없다.

창문은 열려 있었고 밖은 장마였다. 선풍기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돌 때마다 서류가 들썩여서 그녀는 재떨이를 문진 대신 올려놓았다. 담배를 피우지 않으니 재떨이는 깨끗했다.

계산기는 카시오 사천짜리였다. 프로그램을 열두 개 넣어 두었는데 그중 아홉 개가 붕괴 계산이었다. 386 단말기는 켜 두었지만 그녀는 마지막 자리는 늘 손으로 맞췄다.

원리는 간단하다. 플루토늄에서 아메리슘을 화학적으로 뽑아내면 시계가 영으로 돌아간다. 그 뒤로 플루토늄 이백사십일이 붕괴하면서 아메리슘 이백사십일이 다시 쌓인다. 쌓인 양을 재면 언제 뽑았는지가 나온다. 사람이 거짓말을 해도 붕괴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구십 그램.

작년 오월에 북조선이 낸 최초보고서에 그렇게 적혀 있었다. 1990년에 손상된 연료봉 몇 개를 시험 삼아 처리해서 플루토늄 구십 그램을 얻었다고. 구십 그램이면 손바닥에 올려놓을 수 있다. 그녀는 처음 그 문장을 읽었을 때 옮겨 적는 과정에서 단위가 틀린 줄 알았다.

그러나 폐기물 저장조에서 역산되는 양은 그램이 아니었다. 킬로그램이었다. 그것은 단위가 틀린 것이 아니라 문장이 틀린 것이었다.

문제는 답이 하나로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폐기물 용액의 동위원소비를 세 묶음으로 갈라 놓았다. 세 묶음의 연소도가 서로 달랐다. 한 번에 뽑은 것이라면 이렇게 갈라지지 않는다. 서로 다른 시기의, 서로 다르게 태운 연료였다.

1989년. 1990년. 1991년.

세 번이었다. 신고서에는 한 번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녀는 화학과를 나왔고, 졸업하고 삼 년 동안 시약회사에서 분석을 했고, 1988년에 특채로 들어왔다. 면접에서 물은 것은 결혼 계획이었다. 없다고 대답했고 그것이 사실이었으므로 그녀는 거짓말을 하지 않은 셈이 되었다. 오 년 동안 그녀가 낸 보고서는 서른일곱 편이고, 그중 서른다섯 편은 반려된 적이 없다. 반려되지 않는다는 것이 읽힌다는 뜻은 아니라는 것을 그녀는 아직 몰랐다.


오전에 차은희가 봉투를 들고 왔다. 통신과에서 올라온 것이었다. 스물세 살 먹은 것처럼 걷는데 실제로는 스물다섯이었다.

"과장님, 이번 것도 품목만 뽑았습니다."

발췌본은 한 장이었다. 출처 칸이 검게 지워져 있었고 날짜와 품목만 남아 있었다. 진공펌프 여섯 대. 벨로우즈 밸브 마흔 개. 스테인리스. 목적지는 적혀 있지 않았다.

"이건 어디서 온 겁니까."

"저도 모릅니다." 차은희가 손을 앞으로 모았다. "제가 치는 건 다 이렇게 옵니다."

"치는 사람은 압니까."

"치는 사람은 문장만 압니다."

최수경은 카드를 한 장 꺼내 품목을 옮겨 적었다. 상자에는 이미 사백 장쯤이 들어 있었다. 북한이 사는 물건을 그녀는 이 년째 카드로 모으고 있었다. 카드끼리는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거 쓸 데가 있습니까." 차은희가 상자를 들여다보며 물었다.

"지금은 없습니다."

"그럼 왜 하십니까."

"나중에 있을 때 없으면 곤란하니까요."

차은희가 웃었다. 최수경은 웃지 않고 카드를 알파벳순 뒤에 꽂았다.

"과장님." 차은희가 문 앞에서 돌아섰다. "이런 건 왜 사는 겁니까, 저 사람들."

"공장을 돌리려고 사겠지요."

"무슨 공장이요."

"그건 제 카드에 안 적혀 있습니다."

'그건 제 카드에 안 적혀 있습니다.'

남은 40화 · 약 143,962자 · 약 3시간 2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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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변전 43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