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LLUSIONTOON

5화제7장 커브볼

· 43화 중 5화 · 3,472자 · 약 5분 · 무료

글자3 / 5

1993년 11월 12일 · 베이징 창안제 / 동아상사 사무실

베이징은 십일월 십오일부터 난방이 들어온다. 그전까지는 아무리 추워도 안 들어온다. 그것이 규정이고 규정은 날씨를 보지 않는다. 그래서 십이일 아침 우리 사무실 온도는 십 도였고, 오세환은 장갑을 낀 채로 팩스 용지를 갈았다.

영변 5화 제7장 커브볼 — 헤더컷

"사장님, 이거 보십시오." 그가 신문을 접어 내밀었다. 홍콩에서 온 것이었다. "미국 사람이 뭐라 그랬냐면요. 야구로 치면 초구에 들어온 커브볼처럼 예상하지 못한 거라고."

"뭐가."

"저쪽이 여름에 흑연로를 경수로로 바꿔 달라고 했답니다. 그래서 미국이 당황했다는데요."

"오늘 신문은."

"오늘 건 평양에서 일괄타결이라는 걸 내놨다고 합니다. 한꺼번에 다 하자는 거랍니다."

나는 신문을 받아 접어서 책상 구석에 놓았다. 커브볼이든 일괄타결이든 우리 팩스로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삼 주째 신규 조회가 없었다. 그날 오전에 내가 한 일은 톈진 강관 공장에 독촉 텔렉스를 한 통 보낸 것뿐이었다.

여섯 달 동안 우리가 넣은 것은 여섯 건이었다. 진공펌프, 밸브, 강관 두 건, 계측기 두 건. 전부 제때 들어갔고 전부 받을 만큼만 받았다.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이월에 정만호가 말한 삼 년이라는 숫자를 가끔 꺼내 보았다.

한 시 십오 분에 초인종이 울렸다.


남자는 코트를 벗지 않았다. 벗으라고 두 번 권했는데 두 번 다 괜찮다고 했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그것이 예의였는지 사무실이 추웠기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아마 둘 다였을 것이다.

"핵공업부 대외사업국에서 나왔습니다. 리광홉니다."

명함은 주지 않았다. 나는 내 것을 내밀었고 그는 두 손으로 받아 한자 쪽을 잠깐 보고 안주머니에 넣었다.

마흔 남짓으로 보였다. 머리를 짧게 깎았고 구두는 오래 신은 것을 잘 닦아 신었다. 앉을 때 무릎 위에 손을 얹었다가 다시 내렸다. 그는 그 동작을 세 번 했다.

"강 사장 선생, 우리가 아는 사람한테 물어보니 지난여름에 밸브를 열이틀 만에 넣었다고 합디다."

"열사흘 걸렸습니다. 첫날은 안 셌습니다."

"열사흘." 그가 처음으로 웃었다. 웃는 게 서툴렀다. "그거 값은 남았습니까?"

"안 남았습니다."

"왜 그렇게 했습니까."

"다음에 물어보라고 그랬습니다."

리광호가 안주머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탁자 위에 놓았다. 접힌 자국이 네 군데였다. 복사한 것을 다시 복사한 것이라 글자 가장자리가 번져 있었다.

내 이름이 있었다. 주민등록번호가 있었다. 연체 원금과 연체 개월 수가 있었다.

나는 종이를 보고, 그 다음에 그를 보았다. 그가 이것을 어디서 얻었는지 묻고 싶었지만 묻지 않았다. 묻는 순간 이 대화의 성격이 바뀐다.

"맞습니까."

"맞습니다."

"우리가 확인한 건 이것 하납니다." 그가 종이를 도로 접었다. "우리는 애국자하고는 일 안 합니다. 애국자는 값을 안 받겠다고 합니다. 값을 안 받겠다는 사람이 제일 비쌉니다."

"군대에 있었답디다."

"십일 년 했습니다."

"병과가 뭐였습니까."

"정보 계통에 있었습니다."

부인하지 않는 것이 이 위장의 기본이었다. 부인하면 확인하고, 확인하면 나온다. 나올 것은 미리 내주는 편이 낫다.

"왜 나왔습니까."

"그 종이 때문에 나왔습니다."

"그것만입니까."

"상관하고 소리를 좀 질렀습니다."

"어느 쪽이 먼저 질렀습니까."

"제가 먼저 질렀습니다."

리광호가 무릎 위의 손을 다시 내렸다. 세 번째였다.

밖에서 자전거 벨이 길게 울렸다. 창안제 쪽에서 버스가 지나가는 소리가 났고, 유리창이 얇아서 그 소리가 방 안으로 그대로 들어왔다.


그는 정치 얘기를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신문에 난 것도, 뉴욕도, 제네바도 꺼내지 않았다. 그가 꺼낸 것은 넉 줄이었다.

하나. 물건은 홍콩을 거쳐 온다. 홍콩 은행에서 신용장을 열든 열지 않든 결제는 현금으로 한다.

둘. 서류상 최종 수요처는 흥남비료연합기업소로 한다.

셋. 계약 당사자는 단둥의 그 회사로 한다. 동아상사는 명세서에만 나온다.

넷. 납기.

"넷째가 제일 중요합니다." 리광호가 처음으로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값은 서로 얘기하면 됩니다. 값이 안 맞으면 안 사면 그만이니까. 그런데 납기는 얘기가 안 됩니다. 늦으면 그건 이미 벌어진 일입니다."

"시험 삼아 하나 주시겠습니까."

그가 수첩을 펴서 세 줄을 적어 밀었다. 내산성 펌프 두 대. 유량계 여섯 개. 규격과 재질이 정확했다. 이 사람은 자기가 무엇을 사는지 아는 사람이었다.

"납기는 언제로 합니까." 내가 물었다.

"십이월 십오일."

"열이틀 남았습니다. 배로는 안 되고 항공으로 가야 합니다."

영변 5화 제7장 커브볼 — 전환컷

"압니다."

"그럼 십이월 십사일에 단둥 창고에 넣어 놓겠습니다."

리광호가 나를 삼 초쯤 보았다. 그러고는 일어서면서 코트 단추를 잠갔다. 벗지도 않은 코트의 단추를 잠그는 사람은 처음 보았다.

"사장 선생."

"예."

"십사일에 없으면 십오일에는 안 옵니다. 이유는 안 묻습니다."


문이 닫히고 나서 오세환이 안쪽 방에서 나왔다. 그는 문틈으로 다 듣고 있었을 것이다.

"사장님, 저 사람들 뭘 만드는 겁니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톈진 강관 공장 번호를 다시 눌렀다. 신호가 여섯 번 갔다.

"비료공장 얘기 하던데요." 오세환이 뒤에서 말했다. "비료공장에 내산성 펌프가 왜 필요합니까? 비료공장이면 그거 맞기는 맞나…"

"세환아."

"예."

"물어보는 게 일이 아니야. 넣는 게 일이야."

그가 알겠습니다, 하고 자기 자리로 갔다. 알아들은 얼굴은 아니었다.

그날 밤까지 우리는 전화를 열아홉 번 걸었다. 펌프는 오사카에 재고가 있었다. 유량계는 없었다. 여섯 개를 맞추는 데 사흘이 걸렸고, 그중 둘은 홍콩 창고에 다른 사람 앞으로 잡혀 있던 것을 웃돈을 얹어 빼 왔다. 웃돈이 이번 건의 이문보다 컸다.

오세환이 계산기를 두드려 보고 말했다.

"사장님, 이거 하면 손햅니다."

"알아."

"얼마나요."

"이천이백."

"이천이백 달러를요?"

"응."

그는 더 묻지 않고 수화기를 다시 들었다.

홍콩으로 넘길 문장은 그날 밤에 종이에 먼저 썼다. 세 줄이었다. 접촉 성립. 시험 발주 접수. 서류상 최종 수요처 흥남비료연합기업소. 세 번째 줄을 한 번 지웠다가 도로 썼다. 지운 자리가 종이에 남았다.

탁자 위에 조회 결과지가 그대로 있었다. 리광호는 그것을 가져가지 않았다. 나는 종이를 접어 지갑에 넣었다. 접는 자리가 내 이름 위로 왔다.

넉 달을 들여 만든 종이였다. 그때는 그게 다 끝난 사람의 서류라고 생각했다.


1993년 12월 20일 · 베이징 동아상사 사무실 / 밤

리광호가 내민 것은 봉투가 아니었다. 넉 장짜리 종이를 세로로 접은 것이었고, 등사한 것이 아니라 사람이 손으로 쓴 것이었다.

"이건 두고 갈 수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합니까."

"한 시간 드리겠습니다."

그는 바깥 방 소파에 앉아 코트를 벗었다. 십일월에는 벗지 않던 코트였다. 난방이 들어온 뒤로 사무실은 더웠고, 오세환이 끓여 놓고 간 보리차가 아직 미지근했다.

오세환은 여섯 시에 나갔다. 부산 형님한테 소포를 부친다고 우체국에 들렀다 간다고 했다. 사무실에는 나와 리광호뿐이었다.

시계를 봤다. 여덟 시 이십 분이었다. 한 시간이면 아홉 시 이십 분이다.

나는 안쪽 방으로 들어가 문을 반쯤 열어 두었다. 닫으면 이상해진다.


팩스로 보낼 수는 없었다. 팩스는 두 군데에 기록이 남는다. 보낸 데와 받은 데. 게다가 그 감열지는 몇 달만 지나면 글자가 흐려진다. 흐려질 것을 남기려고 남는 것을 만들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옮겨 적었다.

첫 줄은 쉬웠다. 온도전송기 십이 대, 측정범위 영에서 이백 도, 정밀도 플러스마이너스 영 점 오. 그 아래 조절기 넉 대.

일곱째 줄부터 어려워졌다. 25Cr-20Ni 초저탄소. 탄소 함량 뒤에 붙은 숫자를 나는 두 번 확인했다. 뒤에 괄호를 치고 질산급이라고 적혀 있었다. 질산급이 무슨 뜻인지 나는 몰랐다. 모르는 채로 획을 하나씩 옮겼다.

열두째 줄. 인산트리부틸. 순도. 수분 함량.

열여덟째 줄. 수소화 케로신. 방향족 일 퍼센트 이하. 올레핀 영 점 오 퍼센트 이하. 인화점 칠십칠 도 이상.

나는 원래 화학을 못했다. 고등학교 때 화학 점수가 제일 나빴다. 그런 사람이 지금 남의 글씨를 보고 화학식을 베끼고 있었다. 획이 하나 틀리면 다른 물건이 온다는 것만은 알았으므로 획은 정확하게 옮겼다.

스물세째 줄부터 스물아홉째 줄까지는 밸브였다. 그건 내 물건이었다. 구경과 재질과 개수만 봐도 어디에 몇 개가 붙는지 그림이 그려졌다. 그 일곱 줄을 제일 빨리 옮겼다.

서른째 줄은 유리솜이었고 서른한째 줄은 납판이었다. 납판은 두께가 밀리미터로 적혀 있었다.

바깥 방에서 종이 넘기는 소리가 났다. 리광호가 신문을 보고 있었다. 사십 분쯤 지났을 때 그가 화장실이 어디냐고 물었고, 나는 복도 끝이라고 대답하면서 손은 멈추지 않았다. 볼펜이 두 번 끊겨서 두 번 다 종이 귀퉁이에 대고 돌렸다.

서른여덟째 줄에서 손이 멈췄다.

원격조작기 손목 부속 여덟 조. 관통부 밀봉재. 차폐창 유리 두 장.

원격조작기가 뭔지는 안다. 사람 손이 못 들어가는 데에 손 대신 들어가는 기계다. 벽 이쪽에서 손잡이를 잡으면 벽 저쪽에서 집게가 움직인다. 그런 것이 필요한 방은 사람이 들어가면 안 되는 방이다.

비료공장에는 그런 방이 없다.

나는 볼펜을 놓았다가 다시 들었다. 그리고 그 줄을 마저 옮겨 적었다. 획 하나 빼먹지 않고 옮겼다.

나는 볼펜을 놓았다가 다시 들었다. 그리고 그 줄을 마저 옮겨 적었다. 획 하나 빼먹지 않고 옮겼다.

남은 38화 · 약 137,159자 · 약 3시간 1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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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변전 43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