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변 제1부 편승(便乘)
2화제2장 열일곱
3월 12일 오전에 평양방송이 정부성명을 읽었다. 사무실 텔레비전 앞에 여섯 명이 섰다. 낭독자는 조약에서 탈퇴한다는 문장을 두 번 읽었고, 두 번 다 같은 속도였다. 효력 발생은 석 달 뒤인 6월 12일이라고 했다.
방송이 끝나고도 아무도 자리로 돌아가지 않았다. 누가 텔레비전을 끄자 화면 가운데에 흰 점이 잠깐 남았다. 창 아래 장충동 쪽에서 차 소리가 올라왔다. 이튿날 조간의 일면은 이 성명일 것이고, 사회면은 여전히 재산공개일 것이었다.

"이제 시간이 얼마나 남은 겁니까." 윤성복이 물었다.
"구십이 일." 정만호는 달력을 보지 않았다.
"그건 조약 얘기고요."
"조약 얘기가 아니면 자네가 세 봐."
홍기택이 판단서를 들고 내려온 것은 점심때였다. 북한정보국장은 넥타이를 목까지 조여 매는 사람이었다.
"뉴욕에서 만날 겁니다. 저쪽은 만나려고 나가는 거예요. 우리가 할 일은 없습니다."
"국장님 말씀이 맞을 겁니다."
정만호는 늘 그렇게 대답했다. 맞을 겁니다, 라고 하면 대화가 거기서 끝났다.
홍기택이 올라간 뒤 그는 다시 도표 앞에 섰다. 조약과 회담은 종이의 세계였다. 저 화살표는 물건의 세계였다. 서명은 물건을 멈추지 못한다. 물건을 멈추는 것은 값과 납기와 사람이다.
계획서는 그날 오후에 새로 타이핑되어 올라왔다. 제목은 '대북 조달선 개입에 관한 건'이었다. 결재란은 세 칸이었다.
정만호는 자를 대고 맨 윗칸을 지웠다.
"실장님, 이건 부장 결재 사안입니다." 윤성복이 서류를 도로 짚었다.
"부장님은 취임 삼 주째야."
"그게 사유가 됩니까."
"사유는 자네가 쓰면 되지. 자네 그거 잘하잖아."
윤성복은 웃지 않고 서류를 받아 나갔다. 그가 오늘 날짜와 이 대화를 어딘가에 적어 둘 것을 정만호는 알았다. 적어 두라고 한 말이었다.
부장실에는 그날 늦게 다른 건으로 올라갔다. 김덕은 학교에서 온 사람답게 보고를 들으며 공책에 받아 적었다. 요약하지 않고 문장을 통째로 옮겼다. 계단을 내려오면서 정만호는 자기 판단이 옳았다고 생각했다. 저렇게 적어 둔 것은 언젠가 전부 누군가의 증거가 된다.
밤에 그는 인사기록 세 부를 책상에 폈다. 조건은 셋 다 맞았다. 정보 계통 십 년 이상, 어학, 그리고 장사꾼 흉내가 가능한 얼굴.
두 번째가 강도현이었다. 1958년생. 육사 38기. 정보사. 1990년 파견. 근무평정 우수. 그리고 넉 달에 걸쳐 만들어 붙인 종이 두 장 — 경고 처분 한 장과 채무 등재 통보 한 장.
정만호는 나머지 두 부를 서랍에 넣었다. 조건으로 고른 것이 아니었으므로 다시 볼 이유가 없었다.
이 일을 시키면 사람이 어떻게 되는지 그는 알고 있었다. 십오 년 동안 여섯을 썼고 그중 셋은 지금 어디에도 적혀 있지 않다. 아는 것과 하지 않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사진 속 얼굴은 서른네 살이었다. 스물다섯 살의 얼굴은 이 안에 없었다. 그는 표지를 덮고 그 위에 손바닥을 올려놓았다.
"자네 아버지 장례식에—"
그다음을 소리 내지 않았다. 방에는 아무도 없었으니 삼킬 이유도 없는 말이었는데 삼켰다.
창밖으로 케이블카 불빛이 산을 두 번 오르내렸다. 정만호는 불을 끄고 나오면서 서랍을 잠갔다. 십 년 동안 그 서랍에 들어 있던 것은 계획서만이 아니었다.
1993년 4월 17일 · 베이징 조양구 / 옌징호텔 로비
"세 가지입니까, 다섯 가지입니까."
조양구 공상국 창구의 여자가 신청서를 되밀며 물었다. 취급 품목 칸 얘기였다.
"세 가지입니다."
"많이 써 두는 게 낫습니다. 나중에 늘리려면 또 오셔야 하니까."
"세 가지면 됩니다."
여자는 더 권하지 않고 붉은 볼펜으로 칸을 다시 그었다. 화공약품. 계측기기. 특수강. 서울에서 정해 준 세 줄이었고, 나는 그중 어느 것도 팔아 본 적이 없었다.
합자 지분은 홍콩 쪽이 사십, 내 쪽이 육십이었다. 홍콩 회사의 등기 주소는 침사추이의 어느 빌딩 십사 층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 층에는 회사가 스물여섯 개 들어 있다고 했다. 나는 그 회사 사장을 만난 적이 없고 앞으로도 만날 일이 없을 거라고 들었다.
기다리는 동안 창문이 반쯤 열려 있었다. 버들솜이 들어와 서류 뭉치 위에 앉았다가 사람이 지나가면 다시 떴다. 사월의 베이징은 눈이 오는 것처럼 보였다.
한 시간 사십 분 뒤에 도장이 찍혔다. 등기 담당이 한 번, 외자 담당이 한 번, 그리고 창구의 여자가 마지막으로 한 번. 세 번째 도장은 힘을 주지 않아서 아래쪽 획이 흐렸다.
"됐습니다."
그것으로 됐다고 했다. 나는 종이를 받아 가방에 넣었다. 십일 년 치 인사기록을 없애는 데는 넉 달이 걸렸는데, 새 인생을 만드는 데는 한 시간 사십 분과 도장 세 개가 들었다.
사무실은 아파트 일 층을 개조한 것이었다. 부엌이 있던 자리에 싱크대가 그대로 남아 있어서 오세환이 거기다 컵 두 개를 씻어 엎어 놓았다. 창밖으로 자전거 지나가는 소리가 하루 종일 났다. 벨 소리가 아니라 체인 소리였다.
방은 두 칸이었다. 안쪽에 책상 둘, 바깥에 소파와 전화기와 팩스. 전화는 두 회선을 넣고 하나를 팩스 전용으로 돌렸다. 국제전화 요금표를 벽에 붙여 두었는데 서울 칸에는 아무것도 적지 않았다. 서울로 직접 거는 것은 금지였다. 서울로 가는 것은 전부 홍콩을 한 번 돌아서 갔다.
팩스는 대만제 중고였다. 오세환이 그것을 벽에 붙여 놓고 시험지를 뽑아 보았다. 종이가 나오면서 삐이, 하고 울었다.
"사장님, 이거 잘 돌아갑니다."
오세환은 그저께 부산에서 왔다. 여름 양복 한 벌과 겨울 양복 한 벌, 그리고 무역실무 책 두 권을 들고 왔다. 책 한 권은 신용장 편이었고 한 권은 통관 편이었는데 둘 다 밑줄이 그어져 있었다.

"제가 뭐라고 부르면 됩니까."
"밖에서는 사장이라고 해."
"안에서는요."
"안에서도 사장이라고 해."
"예. 사장님."
책상 위에 상자가 하나 있었다. 어제 인쇄소에서 온 것이었다. 뚜껑을 여니 종이와 잉크 냄새가 올라왔다.
앞면은 한글이었다. 동아상사 · 대표 강도현. 뒷면은 한자와 영문이었다. 東亞商事 · 總經理 姜道鉉. 나는 뒷면 활자를 손끝으로 문질렀다. 눌러 찍은 자리가 종이 뒤로 도드라져 있었다.
내 이름이 저기 있는데, 저것은 내 이름이 아니었다.
"백 장씩 다섯 묶음입니다." 오세환이 상자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적습니까?"
"많아."
"저는 명함 처음 만들어 봅니다." 그가 웃었다. "형님이 부산서 물었어요. 무슨 회사 가느냐고. 무역회사 간다 했습니다."
나는 그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그는 정말로 무역회사에 온 것이다. 앞으로도 한동안은 그럴 것이다.
오후에는 둘이 앉아 카탈로그를 뜯었다. 일본 계측기 회사 것, 독일 밸브 회사 것, 톈진 강관 공장 것. 오세환이 품목마다 값을 옮겨 적었고 나는 납기 칸만 보았다. 삼십 일, 육십 일, 구십 일. 값은 어디나 비슷했고 납기는 제각각이었다.
"사장님, 우리 뭐부터 팝니까."
"제일 빨리 올 수 있는 거."
"그게 제일 안 남는 겁니다." 그가 밑줄 친 데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알아."
옌징호텔 로비의 커피 값은 외화태환권으로 붙어 있었다. 위안화로 내겠다고 하면 계산기를 두드려 다른 숫자를 불렀다. 두 개의 값이 한 잔의 커피에 붙어 있는 나라였다.
홍콩에서 온 중개상은 회색 재킷을 입고 있었고 서류가방을 무릎 위에 올려놓은 채 열지 않았다. 광둥 말투가 섞인 영어를 썼고, 내 명함을 받자 두 손으로 뒤집어 한자 쪽을 오래 보았다.
"신설이군요."
"이번 주에 났습니다."
"자본금은."
내가 액수를 말하자 그는 고개를 두 번 끄덕였다. 많다는 뜻도 적다는 뜻도 아닌 끄덕임이었다.
"강 선생. 이 바닥에 규칙이 하나 있습니다." 그가 커피를 젓지 않고 그대로 마셨다. "북조선 사람들은 현금으로 냅니다."
"신용장은 안 씁니까."
"홍콩 은행에서 열어 주면 씁니다. 안 열어 주면 현금입니다. 그래서 다들 그 사람들하고 합니다. 떼일 걱정이 없으니까."
"대신 뭐가 어렵습니까."
"납기." 그가 처음으로 웃었다. "그 사람들은 값을 안 깎습니다. 대신 한 번 늦으면 다시는 안 옵니다. 이유도 안 물어봐요. 그냥 안 옵니다."
"지금 이 물건 파는 데가 몇 군데입니까."
"베이징에 네 군데, 선양에 두 군데. 다들 홍콩에서 삽니다." 그가 손가락을 폈다 접었다. "작년에 한 군데 없어졌습니다. 밸브를 삼 주 늦게 넣었어요. 그것뿐입니다."
"물건이 나빠서가 아니고요."
"물건은 좋았습니다."
"현금은 어디서 받습니까."
"만나서 받습니다. 가방으로." 그가 어깨를 조금 들었다. "세는 데 시간이 걸립니다. 그 시간이 제일 지루하죠."
로비 저쪽에서 일본 사람들이 단체로 들어와 열쇠를 받아 갔다. 유리문이 열릴 때마다 버들솜이 두어 개씩 따라 들어왔다.
"뭘 파실 생각입니까."
"카탈로그에 있는 건 다 팝니다."
"그건 답이 아닙니다."
"그럼 이렇게 답하죠." 나는 잔을 내려놓았다. "남들보다 사흘 빨리 넣겠습니다."
그가 잠깐 나를 보았다. 그러고는 서류가방을 열고 자기 명함을 꺼냈다. 그때까지 열지 않았던 가방이었다.
"단둥에 사람이 하나 있습니다." 그가 일어서면서 말했다. "통관을 봐 주는데 조선말을 합니다. 값은 비쌉니다."
"소개해 주시겠습니까."
"소개는 안 합니다. 이름만 압니다." 그가 냅킨에 한자 세 자를 적어 밀어 놓았다. "나머지는 알아서 하십시오."
"장 다오쉬안." 그가 내 명함의 한자를 읽었다.
"예."
그러고 나서 나는 놀랐다. 대답하는 데 한 박자도 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호텔 앞에서 노란 미니버스 택시를 잡았다. 기사가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을 때 나는 회사 주소를 댔다. 그것도 한 박자도 걸리지 않았다.
호텔 앞에서 노란 미니버스 택시를 잡았다. 기사가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을 때 나는 회사 주소를 댔다. 그것도 한 박자도 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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