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LLUSIONTOON

11화제16장 여덟 시 사십 분

· 43화 중 11화 · 3,386자 · 약 5분 · 무료

글자3 / 5

1994년 6월 13일~15일 · 베이징, 동아상사 사무실 / 옌징호텔 바

여덟 시 사십 분에 그 숫자가 나왔다.

영변 11화 제16장 여덟 시 사십 분 — 헤더컷

사무실 텔레비전은 벽걸이 선반에 올려놓은 열네 인치짜리였다. 화면 왼쪽 아래가 늘 초록으로 번졌다. 오세환이 저녁을 시켜 놓고 그걸 틀어 두고 있었다.

국제 소식 차례가 되자 앵커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고 길게 발음했다. 국제원자력기구 탈퇴를 선언했다는 것이었다. 화면에는 빈의 회의장 자료 화면이 나왔고, 앉아 있는 사람들의 머리 뒤통수가 보였다.

그다음에 숫자가 나왔다.

八千.

나는 젓가락을 놓았다. 여덟 시 사십 분이었다. 시계를 보고 나서 그 시각을 외운 이유를 나는 지금도 설명하지 못한다.

"사장님, 저거 뭐라는 겁니까."

"봉이 팔천 개래."

"봉이요?"

"원자로에서 뽑은 거."

오세환은 화면을 보다가 나를 보았다. "그럼 그게... 얼마쯤 됩니까."

"뭐가."

"팔천 개면 몇 톤이나 되냐고요."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나는 드럼 마흔 개가 팔천 리터라는 것을 알고, 팔천 리터가 화차 한 량이라는 것을 알고, 화차 한 량이 사흘이라는 것을 안다. 그런데 봉 팔천 개가 무엇으로 환산되는지는 모른다.

이 방에서 우리는 무게와 부피와 납기로만 세계를 셌다. 그날 저녁 처음으로 그 셈법이 닿지 않는 숫자가 텔레비전에서 나왔다.

동아상사는 방 두 칸이다. 안쪽은 내 방이고 바깥은 오세환의 책상과 팩스와 캐비닛이다. 창문에 붙여 놓은 선풍기가 여름 내내 왼쪽으로만 돌았다. 유월 중순의 베이징은 낮에 먼지가 뜨고 저녁이 되면 그 먼지가 내려앉는다. 창틀을 손가락으로 훑으면 하루치가 묻어난다.

앵커는 다음 소식으로 넘어갔다. 어디 성에서 홍수가 났다는 것이었다. 화면이 흙탕물로 바뀌었다.

오세환이 텔레비전을 껐다.

"저거 우리하고 상관있는 겁니까."

"우리는 팔고 저쪽은 사고. 그것뿐이야."

그 애는 고개를 끄덕였다. 끄덕이면서 젓가락으로 밥을 뒤적이기만 했다.


리광호가 전화를 한 것은 이튿날 오전이었다.

목소리가 빨랐다. 이 사람은 원래 말을 천천히 하는 사람이다. 첫마디부터 물건 얘기였다.

"강 사장, 오월 것은 언제 도착합니까."

"이미 넘어갔습니다. 칠일 밤에 편성됐습니다."

"검수는."

"거기서 하시는 거지 제가 하는 게 아닙니다."

"그렇지요." 그가 잠깐 숨을 골랐다. "다음 것 얘기를 좀 합시다. 원격조작기 부속하고 펌프 예비품 말입니다. 목록에 있던 거."

"작년 십이월 목록입니까."

"예. 그중에 스물몇 번부터 뒤쪽으로."

"납기를 얼마나 보십니까."

"당겨 주십시오."

"얼마나요."

"당길 수 있는 만큼."

나는 노트를 폈다. 원격조작기 부속은 독일제라 세 달이 걸린다. 홍콩에서 재고를 잡으면 여섯 주. 펌프 예비품은 일본 것이 빠른데 지금은 일본 쪽 서류가 까다롭다.

"부속은 여섯 주, 예비품은 사 주 봅니다."

"사 주도 깁니다."

"그보다 짧게 하려면 다른 나라 걸 넣어야 하는데, 규격이 안 맞을 수 있습니다."

전화기 저쪽이 잠깐 조용했다.

"규격은 맞춰 주십시오." 리광호가 말했다. "그건 꼭 맞춰 주십시오."

우리는 십사 분을 통화했고, 그중 십사 분이 전부 물건 얘기였다. 어제 뉴스에 대해서는 둘 다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가 꺼내지 않았고 나도 꺼내지 않았다.

이 사람과 나 사이에 안전한 언어는 그것뿐이다. 품명과 수량과 날짜. 그 밖의 말을 꺼내는 쪽이 먼저 죽는다.

끊기 전에 그가 한 마디를 덧붙였다.

"강 사장. 여름에 좀 바쁠 겁니다."

"예."

"그러니까 미리 잡아 두시라는 겁니다."

수화기를 놓고 나서 나는 그 문장을 노트에 적었다. 물건 얘기가 아닌 문장은 그것 하나였다.


옌징호텔 바는 열한 시가 넘으면 손님이 셋뿐이었다.

홍콩 중개상이 먼저 와 있었다. 그는 늘 얼음을 따로 시킨다.

"미스터 강, 이번 주에 값이 올랐어요." 그가 영어와 광둥식 표준어를 섞어 말했다. "다들 겁을 먹으면 물건값이 올라. 겁이 제일 비싼 물건이야."

"뭐가 올랐습니까."

영변 11화 제16장 여덟 시 사십 분 — 전환컷

"다요. 배 값도, 보험도. 이번 달에 조선 쪽으로 가는 화물은 보험사가 안 받아요."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보험 없이 보내지."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원래 보험 안 들고 보냈잖아요."

오세환은 그 옆에서 맥주를 다섯 병째 마시고 있었다. 그 애는 술이 약한데 그날은 아무도 말리지 않았다.

중개상이 가고 나서 오세환이 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사장님."

"어."

"우리 이거 언제까지 합니까."

바텐더가 유리잔을 닦고 있었다. 라디오에서 중국 노래가 나왔다.

"끝나면 끝나겠지."

"끝나는 게 뭡니까." 그 애가 고개를 들었다. 눈이 붉었다. "물건 다 팔면 끝납니까? 저쪽이 다 사면 끝나요? 저는 그게 뭔지를 모르겠습니다. 부산에서 올 때는 그냥 무역인 줄 알았는데."

"세환아."

"예."

"오늘은 그만 마셔라."

그 애는 잔을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주머니에서 뭘 꺼내 탁자에 놓았다. 지난주 창고에서 내가 준 담배 한 개비였다. 끝이 구부러져 있었다.

"이거 왜 주셨습니까."

"피우라고 줬지."

"저 담배 안 피웁니다."

"안다."

그 애는 그것을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이튿날 밤 나는 혼자 사무실에 있었다.

밖에서는 자전거 벨 소리가 났다. 여름이라 창을 열어 두면 창안제 쪽 소리가 다 들어온다.

라디오를 돌리다가 조선말 방송을 잡았다. 노심 인출이 끝났다는 얘기가 나왔다. 두 달이 걸릴 거라고 했는데 한 달 만에 끝났다는 것이었다. 그다음 채널에서는 사찰관들에게 짐을 싸라는 말이 전해졌다는 소문을 전했다. 소문이라고 두 번 말했다.

나는 라디오를 껐다.

바깥 방에서 팩스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 소리는 밤에 들으면 종이를 뜯는 소리 같다.

서울에서 온 것이었다. 회사 이름으로 된 무역 문건 형식이고, 본문은 두 줄이었다.

전량 정상 공급 유지. 납기 우선.

지난 십이월에 받은 답신도 두 줄이었다. 그때는 단가 얘기가 붙어 있었는데 이번에는 없었다. 값을 따지지 말라는 뜻이다.

나는 그 종이를 반으로 접었다. 팩스 용지는 시간이 지나면 글자가 사라진다. 그것이 이 물건의 좋은 점이다.

책상 두 번째 서랍을 열었다. 작년 십이월에 손으로 베낀 종이가 그 안에 있었다. 팩스로 보내지 않고 베낀 것이다. 잉크가 조금 번진 데가 세 군데 있다.

나는 줄을 세었다.

마흔하나.

다시 세었다. 마흔하나.

그리고 이번에는 다른 것을 셌다. 지금까지 넘어간 줄에 연필로 점을 찍었다. 스물아홉 개였다. 남은 것이 열둘이다.

열둘 중에 리광호가 오늘 말한 것이 대여섯이었다.

창밖에서 누가 크게 웃었다. 자전거 두 대가 지나갔다. 이 도시는 어제도 오늘도 아무 일이 없다. 여기서 서쪽으로 가면 사막이 있고 동쪽으로 가면 바다가 있고, 그 사이 어디쯤에 팔천 개가 물에 잠겨 있다.

나는 종이를 접어 서랍에 넣고 자물쇠를 채웠다.

그러고는 다시 열어서, 열둘이 맞는지 한 번 더 세었다.


1994년 6월 16일 · 워싱턴 D.C., 백악관 캐비닛룸

에어컨이 지나치게 세게 돌았다. 클린턴은 재킷을 벗지 않았고, 벗지 않은 이유를 스스로도 설명하지 못했다. 긴 탁자 위에 서류철이 두 개 올라와 있었다. 왼쪽 것은 얇고 오른쪽 것은 두꺼웠다. 얇은 쪽이 폭격이었다.

"세 가지입니다." 애슈턴 카터가 손가락을 폈다. "하나, 재처리시설만. 방사화학실험실 한 채입니다. 둘, 재처리시설과 5메가와트 원자로. 셋, 영변 단지 전체에 주요 군사시설을 더한 것."

"하나만 때린다는 게 무슨 뜻인가." 클린턴이 물었다.

"플루토늄을 꺼내는 건물만 없앤다는 뜻입니다. 원자로는 플루토늄을 만들지만, 그걸 금속으로 뽑아내는 건 그 건물입니다. 재래식 정밀유도무기로 가능합니다. 전술기로도, 폭격기로도, 순항미사일로도."

"원자로를 치면."

"체르노빌처럼 흑연감속로입니다. 규모는 훨씬 작지만 가연성 흑연이 들어 있습니다." 애슈턴 카터는 잠시 멈췄다가 덧붙였다. "그래도 체르노빌 같은 사태는 피할 수 있다고 봅니다. 원자로를 부수고 플루토늄을 그 자리에 봉인할 수 있습니다. 저는 그 점에 대해서는 상당히 확신합니다."

크리스토퍼가 안경을 밀어 올렸다. "봉인이라는 단어를 안보리에서 쓸 수는 없을 겁니다. 제재 결의안 협의가 아직 진행 중입니다. 평양은 제재를 선전포고로 규정해 놓았고요."

"바람은." 클린턴이 지도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6월에 그 지역 바람이 어느 쪽으로 붑니까."

"여름철에는 대체로 남서에서 북동입니다." 애슈턴 카터가 대답했다. "그 계절에는 서울 쪽으로 밀려 내려올 확률이 낮습니다. 다만 확률입니다."

"확률." 대통령이 그 말을 한 번 되뇌었다. "그 말을 서울시장에게 해 본 사람이 이 방에 있습니까."

없었다. 클린턴은 지도 위에서 영변을 짚었다가 손가락을 조금 아래로 내렸다. 평양. 다시 아래로. 개성. 그리고 서울. 손톱 끝이 종이를 스치는 소리가 났다.

"저 도시에 천만 명이 삽니다." 그가 말했다. "그리고 이 반도에 우리 병력이 삼만 칠천 있고, 그 가족과 민간인은 그보다 많고요."

"훨씬 많습니다." 누군가 조용히 정정했다.

아무도 그 숫자를 다시 세지 않았다. 방 안에서 가장 큰 소리는 여전히 에어컨이었다.

아무도 그 숫자를 다시 세지 않았다. 방 안에서 가장 큰 소리는 여전히 에어컨이었다.

남은 32화 · 약 115,131자 · 약 2시간 4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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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변전 43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