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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제5장 시계(時計)

· 43화 중 4화 · 3,331자 · 약 5분 · 무료

글자3 / 5

보고서는 열두 장이었다. 결론은 세 줄이었다.

하나, 재처리는 1989년·1990년·1991년 세 차례로 판단된다. 둘, 분리된 플루토늄 총량은 10에서 14킬로그램 사이로 추정된다. 셋, 북한이 신고한 90그램은 이 셋 중 어느 것과도 맞지 않는다.

영변 4화 제5장 시계(時計) — 헤더컷

홍기택은 세 번째 장까지 넘기고 손을 멈췄다.

"미국이 십이 킬로그램이라고 했지."

"예."

"자네는 십에서 십사고."

"예."

"그럼 같은 얘기 아닌가." 그가 안경을 벗어 닦았다. "우리가 이걸 먼저 내놓으면, 미국이 제일 먼저 뭘 물어볼 것 같나."

"어디서 났느냐고 묻겠지요."

"그래. 그리고 우리는 대답을 못 해. 우리한테는 위성이 없어. 사찰단도 없고. 시료도 없어." 그가 안경을 다시 썼다. "자네가 쓴 건 남이 잰 숫자로 자네가 다시 계산한 거야. 그건 정보가 아니라 숙제야."

"숙제도 답이 맞으면 맞는 겁니다."

"맞지." 홍기택이 보고서를 덮었다. "맞는데, 우리가 답을 먼저 말하면 저쪽은 우리가 어디서 베꼈나부터 봐. 그게 이 바닥이야."

"지금 저쪽은 미국하고 만나고 있습니다. 다음 주에 제네바에서 또 만난답니다."

"만나겠지."

"만나는 동안에도 시계는 갑니다."

"자네 시계 말인가, 저쪽 시계 말인가."

"둘 다입니다."

홍기택이 처음으로 그녀를 똑바로 보았다. 그러고는 시선을 창 쪽으로 옮겼다.

"그럼 언제 냅니까."

"미국이 숫자를 바꿀 때. 그때 우리 게 이미 있었다고 하면 돼."

그는 보고서를 서랍이 아니라 결재함 아래쪽에 놓았다. 서랍에 넣으면 없어진 것이고 결재함에 두면 아직 안 본 것이었다. 그 차이를 그는 십오 년째 지키고 있었다.


복도를 걸어 내려오면서 그녀는 계산을 처음부터 다시 짚어 보았다. 반감기, 연소도, 세 묶음이 갈라지는 지점, 상한과 하한. 틀린 데가 없었다. 오늘 문제가 된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분석실로 돌아와 그녀는 원본을 폈다. 규정상 원본에 볼펜을 대면 안 되었다. 의견은 연필로만 쓴다. 지울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배웠고, 왜 지울 수 있어야 하는지는 아무도 설명해 주지 않았다.

그녀는 왼쪽 여백에 한 줄을 적었다.

미국의 12킬로그램과 이 보고서의 10~14킬로그램은 같은 수가 아니다. 구간이 다르면 다른 수다.

연필심이 눌린 자리가 손끝에 걸렸다. 그녀는 그 위를 한 번 문질러 보고 지우지는 않았다.

밖에서 비가 굵어졌다. 창을 닫자 방 안이 금세 더워졌고 선풍기가 서류를 다시 들썩이기 시작했다. 최수경은 재떨이를 원래 자리로 옮겨 놓고, 계산기를 껐다가, 다시 켜서 사백삼십이 점 육을 한 번 더 눌러 보았다. 숫자는 아까와 같았다.


1993년 8월 15일 · 평안북도 영변, 방사화학실험실 / 평양시 락랑구역 통일거리 32호동

한성철은 건물의 길이를 걸음으로 세는 버릇이 있었다.

정문에서 서쪽 끝까지 이백서른일곱 걸음. 그의 보폭으로 재면 그렇게 나오고, 도면에 적힌 수치로는 백팔십 미터다. 두 숫자는 칠 년 동안 한 번도 어긋난 적이 없다. 어긋나면 그날 그의 걸음이 이상한 것이지 건물이 이상한 것이 아니었다.

새벽 안개가 구룡강 쪽에서 올라와 건물 아래쪽 두 층을 지우고 있었다. 그럴 때 이 건물은 여섯 층이 아니라 네 층으로 보였다. 한성철은 그 모양을 좋아했다. 이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아는 사람에게만 이 건물은 크게 보인다.

그는 김책공업종합대학에서 화학공학을 했고 졸업 배치를 받아 스물다섯에 여기 왔다. 올해로 칠 년째다. 배치받던 첫날 선배 기사가 해 준 말을 아직 기억한다. 이 나라에서 남한테 원료를 안 사 오고도 끝까지 만들 수 있는 것이 딱 하나 있는데 그게 이거라고 했다. 우라늄은 평산에 있고, 흑연은 만들 줄 알고, 사람은 여기 있다. 그러면 남는 것은 이 건물 하나였다.

명절이라 오전 근무만 했다. 그래도 계통은 돌려야 했다. 냉시운전 삼 회차였다. 물만 흘리는 것이다. 조종실 계기판 앞에서 그는 지시값을 열 분마다 손으로 옮겨 적었다. 자동으로 찍히는 기록지가 있는데도 그렇게 했다. 기록지는 잉크가 마르면 흐려지지만 손으로 쓴 것은 흐려지지 않는다.

"백사 도." 조작공 하나가 불렀다.

"백사 도." 그가 받아 적었다.

이 계통에서 온도는 백이십 도를 넘기지 않는다. 넘길 일이 없다. 넘길 일이 있는 운전을 그들은 아직 해 본 적이 없었다.


강태봉이 조종실에 들어온 것은 열한 시쯤이었다. 실장은 손에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았다. 손에 아무것도 없이 오는 날은 좋은 소식이 없는 날이다.

"한 과장, 설비가 오면 선을 둘로 늘린다."

"예."

"둘로 늘리면 처리량이 두 배 아니야?"

"두 배는 안 됩니다. 배기 계통이 하납니다. 두 선이 같은 굴뚝을 씁니다."

"그럼 몇 배야."

"한 배 반쯤입니다."

영변 4화 제5장 시계(時計) — 전환컷

강태봉은 그 대답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고쳐 말하라고 하지도 않았다. 위에서 내려온 말을 아래로 옮기는 것이 그의 일이었고, 옮길 때 숫자를 손보지는 않는 사람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이 건물에서는 드문 축에 들었다.

자재과장 오정민이 뒤따라 들어와 서류철을 폈다.

"설비는 못 옵니다."

"왜."

"만들던 데가 없어졌으니까요." 오정민이 목록을 손가락으로 훑었다. "온도전송기, 관다발, 원격조작기 부속. 다 그쪽에서 오던 겁니다. 지금은 계약할 상대가 없습니다. 나라가 없어졌는데 공장이 있겠습니까."

"그럼 어디서 삽니까." 한성철이 물었다.

"중국에서 삽니다. 홍콩을 거쳐서요." 오정민이 서류철을 덮었다. "값은 세 배고, 물건은 반이고, 서류는 열 배로 씁니다."

"검수는 누가 합니까."

"베이징에서 봅니다."

"우리 계통에 들어갈 물건인데 우리는 안 봅니까."

"과장 동무." 오정민이 처음으로 목소리를 낮췄다. "도장 다 찍혀서 오는 물건을 무슨 자격으로 뜯소."

한성철은 계기판을 다시 보았다. 백사 도에서 백오 도로 올라갔다가 도로 내려왔다. 정상이었다.

"동무들, 팔 년 지었소." 강태봉이 창밖을 보며 말했다. "팔 년 지어서 선이 하나요."


평양행 렬차는 오후 두 시에 있었다. 명절이라 사람이 많아 그는 서서 갔다. 렬차는 두 번 섰다. 한 번은 신호 때문이었고 한 번은 이유를 알려 주지 않았다. 두 번째로 섰을 때 창밖에 논이 있고 사람들이 허리를 굽히고 있었다. 명절인데 일하는 사람들이었다. 락랑구역 통일거리 32호동 4층까지 계단을 올라가는데 삼 층 복도에서 강냉이 삶는 냄새가 났다.

향미는 밥상 옆에 앉아 배급표를 세고 있었다.

표를 손가락으로 짚어 가며 넉 장씩 묶어 봉투에 나누는 것이 그녀의 방식이었다. 봉투는 넷이었다. 상순, 중순, 하순, 그리고 아무것도 쓰이지 않은 봉투 하나.

"저건 뭐요."

"모자랄 때 여는 거요." 그녀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모자라오?"

"이번 달은 안 모자라오." 향미가 표를 마저 접었다. "쌀 넉에 강냉이 여섯이오. 작년에는 다섯에 다섯이었소."

명일이 문지방에 앉아서 그것을 보고 있었다. 세 살이었고 말이 늦었다. 한성철이 손을 내밀자 아이가 와서 아버지 손가락 하나를 잡았다. 두 개는 잡지 않았다.

어머니 김순덕은 단천에서 그저께 올라왔다. 려행증을 받는 데 여드레가 걸렸다고 했다. 노인은 아들의 손을 뒤집어 보고 손톱 밑을 들여다보았다.

"기름이 안 지는구나."

"기름 쓰는 일이 아닙니다, 어머니."

"그럼 뭘 만드는 일인데."

"만드는 게 아니고 뽑는 겁니다."

노인은 알아듣지 못했고 더 묻지 않았다. 대신 이웃집 여자한테 아들이 영변에서 일한다고 말해 두었다고 했다. 영변이라는 말만으로 그 집 여자의 태도가 달라지더라고, 노인은 그 이야기를 두 번 했다.


여덟 시가 조금 지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인민반장 최옥분이었다.

"숙박등록 하셨습니까."

"어제 했습니다." 향미가 대답했다.

"어제 했으면 됐고." 최옥분은 그러면서도 방 안을 한 번 훑어보았다. 노인이 앉아 있는 자리, 이불 개어 놓은 자리, 밥상 위 그릇 수. "명절인데 뭐 좀 하셨소?"

"강냉이국수 삶았습니다."

"우리는 그것도 못 했소." 최옥분이 문지방을 넘지 않은 채로 웃었다. "한 기사 동지, 이번 달 총화 때 사업 소개 좀 하시오. 우리 반에서 영변 다니는 사람은 동지뿐이오."

문이 닫히고 나서 향미가 낮게 말했다. "저 여자는 우리 집 그릇 수를 안다우."

"세는 게 저 사람 일이오."

전기는 아홉 시에 나갔다. 명절이라 그때까지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한성철은 초를 켜고 수첩을 폈다. 오정민이 읽던 목록을 낮에 옮겨 적어 둔 것이었다. 온도전송기 십이 대. 조절기 넉 대. 냉각 관다발 두 조. 희석제. 원격조작기 손목 부속. 그는 아래로 내려가며 세었다.

"스물아홉이오."

"뭐가요." 향미가 등을 돌린 채 물었다.

"우리 직장에 없는 것."

"그거 다 있으면 어떻게 되오?"

한성철은 잠깐 생각했다. 그는 자기가 믿는 것을 말로 옮겨 본 적이 별로 없었다.

"그러면 우리가 남한테 아무것도 안 물어봐도 되오."

향미는 대답하지 않았다. 초가 짧아 심지가 기울었다.

그는 수첩을 덮었다. 창밖 통일거리에는 가로등이 세 개 걸러 하나씩 켜져 있었고, 켜진 것들도 밝지는 않았다.

그는 수첩을 덮었다. 창밖 통일거리에는 가로등이 세 개 걸러 하나씩 켜져 있었고, 켜진 것들도 밝지는 않았다.

남은 39화 · 약 140,631자 · 약 3시간 2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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