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유신 제5부 격차(隔差)
21화제29장 몸(身)
넷 — 그리고 인구가 폭발했다
조선이 세계에 준 의학은 팔아서 준 것도 있고 그냥 준 것도 있다.

우두 종묘는 그냥 주었다. 값을 매기지 말라는 것이 측명공의 몇 안 되는 명시적 금지였기 때문이다.
설파제와 청곡소는 팔았다. 비쌌다.
그럼에도 퍼졌다. 그리고 세계 인구가 백삼십 년 만에 세 배 반이 되었다.
1930년의 세계에는 원래의 역사보다 십오억 오천만 명이 더 살아 있었다.
그 십오억이 먹어야 했다.
그래서 하버-보슈가 필요했고, 인광석이 필요했고, 남양이 필요했다.
조선이 사람을 살린 것이, 조선이 남의 땅을 가져야 하는 이유가 되었다.
『화학원 연보』 제91호(1928)에 이 순환을 처음 명시한 문단이 있다.
— 우리는 사람을 살리는 약을 만들었다. 살아난 사람이 밥을 먹어야 하므로 우리는 공기로 거름을 만들었다. 거름에는 인(燐)이 있어야 하므로 우리는 남양의 섬을 가졌다. 남양의 섬에서 인을 캐는 사람이 폐병으로 죽는다.
— 즉 우리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 사람을 죽이고 있다.
— 이것은 모순이 아니라 회로다. 모순은 풀 수 있으나 회로는 끊어야 한다.
— 어디를 끊을 것인가.
— 나는 답을 모른다.
다섯 — 그리고 가장 어두운 것
여기까지가 조선의 의학이 교과서에 실리는 부분이다.
실리지 않는 부분이 있다.
1996년, 압록강 특별사업 기록이 부분 해제되면서 문서철 하나가 나왔다.
『제국 의원 부속 제7연구소 업무일지』, 1924년~1938년.
제7연구소는 압록강 시설 안에 있었다.
업무는 이러했다.
— 방사선이 사람 몸에 미치는 영향을 정량화한다.
방법은 이러했다.
— 피검자를 선정하여 정해진 선량에 노출시키고 경과를 기록한다.
피검자는 수형자였다. 대부분 만주 봉기와 자바 봉기의 참가자였다.
기록된 인원은 사백여든셋이다.
사백여든셋 중 살아서 나온 사람은 없다.
이 일지의 기록은 정확하다.
선량, 노출 시간, 경과 일수, 증상, 혈액 소견, 사망 일시. 조선의 다른 모든 기록과 같은 양식으로, 같은 꼼꼼함으로 적혀 있다.
피검자에게는 번호가 붙어 있다. 이름은 없다.
이 자료가 해제되었을 때 조선 사회의 반응은 셋으로 갈렸다.
첫째, 부정. — 이것은 위조다.
둘째, 상대화. — 그 시대에는 다들 그랬다.
셋째, 침묵.
세 번째가 가장 많았다.
1997년, 국립의학원이 성명을 냈다. 여섯 줄이었다.
— 우리 원의 전신인 제국 의원이 1924년부터 1938년까지 사백여든세 명에게 인체 실험을 하였음을 확인한다.
— 우리는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1971년 내부 조사에서 확인되었고 공개하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 그 결정을 내린 사람들은 대부분 사망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결정을 변호할 수도 비난할 수도 없다.
— 다만 우리는 다음을 밝힌다. 이 실험에서 얻은 자료는 폐기되지 않았다. 그 자료는 1950년대 방사선 안전 기준 수립에 사용되었고, 그 기준은 지금도 쓰이고 있다.
— 즉 오늘 이 나라의 원자력 발전소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안전한 이유의 일부는 저 사백여든세 명이다.
— 우리는 이 사실을 앞으로 우리 원의 모든 신입 연구원에게 교육한다. 잊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아는 것 중에 이런 방식으로 알게 된 것이 있다는 사실 자체를 알게 하기 위해서다.
이 성명은 세계 의학사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기관 성명이 된다.
그리고 이 성명이 나온 것은, 그해에 국립사료원 제3고에서 나온 문서 한 장 때문이었다.
측명공이 백육십삼 년 전에 쓴 것이다.
— 재라. 내가 재지 않은 것들을 재라.
『조선중앙은행 창립 취지서』 병진년(1856) 정월
나라의 힘은 세 곳에 있다. 땅과 사람과 셈이다. 앞의 둘은 하늘이 주고, 셈은 사람이 만든다. 조선은 땅이 좁고 사람이 적다. 그러므로 조선이 만들 수 있는 것은 셈뿐이다. 이 은행은 조선의 셈을 세계의 셈으로 만들기 위하여 세운다.
조선이 세계를 손에 넣은 것은 대포가 아니라 장부로였다.
그리고 그 장부의 첫 장은, 한주혁이 죄책감으로 시작한 사망자 명부였다.

하나 — 죽음을 세면 값이 나온다
병진년(1796)부터 조선은 사람이 죽으면 적었다.
처음에는 삼척 과학혁신국 안에서만이었다. 무오년(1798) 종두청이 서면서 전국의 아이가 태어나고 죽는 것을 적기 시작했다. 을축년(1805)에 호적이 개편되어 나이·성별·사인이 함께 적혔다. 병자년(1816)에는 병으로 죽은 것과 다쳐서 죽은 것과 굶어 죽은 것을 나누어 적게 했다.
그렇게 오십 년이 쌓였다.
경술년(1850)에 통계원(統計院)이 그것을 정리했다. 나온 것이 『조선생사표(朝鮮生死表)』다.
나이 한 살 단위로, 남녀를 나누어, 이 나이의 사람이 앞으로 한 해 안에 죽을 확률이 몇인지를 적은 표였다.
세계 어디에도 그런 것이 없었다.
영국에도 없었다. 영국의 사망 통계는 1837년에야 시작되었고 지역과 사인이 뒤죽박죽이었다. 프랑스도, 프로이센도, 미국도 마찬가지였다.
조선에는 오십사 년치가 있었다.
『조선생사표』로 처음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보험이다.
사람이 언제 죽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만 명이 모이면 그중 몇이 올해 죽을지는 매우 정확하게 안다. 그것을 알면 값을 매길 수 있다.
경술년 시월, 조선에 최초의 생명보험이 나왔다.
처음 고객은 광부였다.
광무국이 광군 전원에게 강제 가입시켰다. 보험료는 임금에서 떼고 국이 절반을 보탰다. 죽으면 유족이 십 년치 임금을 받았다.
『공장 보호 조목』이 삼십삼 년 만에 값을 매기게 된 것이다. 최연이 죽으면서 부탁한 것이 마침내 숫자가 되었다.
그리고 그 순간, 조선에서 사람 목숨에 처음으로 가격이 생겼다.
『통계원 내부 각서』 경술년 십일월. 원장 남정후의 글이다. 남상철의 손자다.
— 오늘 우리는 광군 하나의 목숨값을 이백사십 냥으로 정했다.
— 나는 이 숫자를 정하면서 사흘 밤을 못 잤다. 사람 목숨에 값을 매기는 것이 옳은가.
— 그러나 나는 이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값을 매기지 않으면 그것은 값이 없는 것이 된다. 지금까지 조선에서 광군이 죽으면 유족에게 쌀 두 섬이 갔다. 그것도 값이었다. 다만 아무도 그것을 값이라 부르지 않았을 뿐이다.
— 값을 매기면 흥정할 수 있다. 흥정할 수 있으면 올릴 수 있다.
— 다만 나는 두려운 것이 하나 있다. 값이 매겨지면 그것은 비교할 수 있게 된다. 광군의 목숨이 이백사십 냥이고 안전 장치를 다는 데 삼백 냥이 든다면, 셈에 밝은 누군가는 장치를 달지 않는 쪽을 고를 것이다.
— 나는 그런 자가 나올 것을 안다.
— 그러므로 나는 이 각서를 남긴다. 언젠가 그런 자가 나오거든, 그가 쓰는 표를 만든 자가 나였다는 것을 기억해 주기 바란다.
그런 자는 십칠 년 뒤에 나온다.
둘 — 은행
『조선생사표』는 보험에서 멈추지 않았다.
같은 방법으로 조선은 다른 것들의 확률도 재기 시작했다.
배가 항해에서 침몰할 확률. 창고에 불이 날 확률. 흉년이 들 확률. 광산에서 갱이 무너질 확률. 빌려준 돈을 못 받을 확률.
마지막 것이 은행이었다.
병진년(1856), 조선중앙은행이 섰다.
당시 세계에는 잉글랜드은행이 있었고 프랑스은행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정부에 돈을 빌려주는 기관이었지, 현대적 의미의 중앙은행이 아니었다. 은행이 무너지려 할 때 최후에 돈을 대주는 역할, 지급준비를 정하고 감독하는 역할은 아직 아무도 하지 않았다.
조선은 그것을 처음부터 넣었다. 넣을 수 있었던 이유는 단순하다. 한주혁이 『만물지서』 하권 제사권 「돈」에 세 쪽으로 적어 두었기 때문이다.
— 은행이 무너지는 것은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한꺼번에 찾으러 오기 때문이다. 한꺼번에 오는 것은 무섭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무섭지 않게 하면 오지 않는다.
— 무섭지 않게 하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위에 아주 큰 은행을 하나 두고, 그 은행이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대준다"고 말하고, 그 말을 한 번 지키는 것이다.
— 한 번만 지키면 그다음부터는 지킬 일이 잘 생기지 않는다. 그것이 이 장치의 이상한 점이다.
기미년(1859), 조선의 상업은행 열한 곳이 한꺼번에 무너질 뻔했다. 만주 철도 채권에 몰렸다가 공사가 지연되면서 벌어진 일이었다.
조선중앙은행은 사흘 만에 백사십만 냥을 풀었다. 담보를 헐값에 잡고, 이자를 높게 매기되, 무제한으로 빌려주었다.
열한 곳 중 여덟이 살았다. 셋은 망하게 두었다.
이 사흘이 조선 금융의 성인식이다. 영국이 같은 원칙을 배우는 것은 1866년 오버렌드-거니 위기 때이고, 글로 정리하는 것은 1873년 배젓의 책에서다. 열네 해.
셋 — 원(圜)
돈이 세계의 돈이 되려면 세 가지가 있어야 한다.
첫째, 값이 흔들리지 않을 것.
둘째, 어디서나 바꿀 수 있을 것.
셋째, 그 돈으로만 살 수 있는 물건이 있을 것.
조선은 셋 다 가졌다.
첫째는 조선중앙은행이 만들었다. 둘째는 조선 상관망이 만들었다. 조선은 갑자년(1864)까지 세계 삼십일 개 항구에 상관을 열었고, 각 상관이 원(圜)과 현지 통화를 정해진 값에 바꿔 주었다.
셋째가 결정적이었다.
조선 물건은 원으로만 팔았다.
광학 유리, 정밀 저울, 우두 종묘, 표백분, 염료, 설파제, 강선총, 전신 장비, 시멘트. 세계 어디에도 대체품이 없는 것들이었다. 그것을 사려면 원이 있어야 했고, 원을 얻으려면 조선에 무언가를 팔아야 했다.
을축년(1865)이 되자 인도양의 상인들이 파운드나 은화가 아니라 원으로 값을 매기기 시작했다. 청의 남부 상인들이 그다음이었다. 오스만이 갑술년(1874)에 국채를 원으로 발행했다.
무인년(1878), 세계 무역 결제의 삼십일 퍼센트가 원으로 이루어진다.
무인년(1878), 세계 무역 결제의 삼십일 퍼센트가 원으로 이루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