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유신 제5부 격차(隔差)
19화제26장 번개의 나라
기미년(1859), 한성에 전등이 켜졌다.
종로 육의전 거리에 아크등 마흔두 개가 섰다. 백성들이 그것을 구경하러 밤마다 몰려나왔고, 도성의 야간 통행금지가 그해에 폐지되었다.

한성은 세계에서 밤에 불이 켜진 첫 번째 대도시가 되었다. 런던보다 스물세 해, 뉴욕보다 스물세 해 빨랐다.
그해 겨울, 광저우의 영국 상관 부관이 한성을 방문하고 돌아가 이렇게 적는다.
— 저는 밤 열 시에 서울의 큰 거리를 걸었습니다. 등이 켜져 있었습니다. 가스등이 아닙니다. 불꽃이 없습니다.
— 상점이 열려 있었습니다. 밤 열 시에 여자와 아이들이 거리를 다니고 있었습니다.
— 각하, 런던에서 밤 열 시에 여자가 혼자 걷습니까.
— 저는 이 도시가 우리보다 부유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도시는 우리보다 가난합니다. 집이 낮고 옷이 거칠고 마차가 적습니다.
다만 이 도시는 우리보다 뒤에 있지 않습니다. 이 도시는 우리 앞에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어젯밤 종로에서 알았고, 오늘 이 보고서를 쓰면서 손이 떨립니다.
『만물지서』 중권 제십일권 「쇠」
무쇠는 단단하나 부러진다. 시우쇠는 질기나 무르다. 그 사이에 강(鋼)이 있다. 강은 무쇠에서 숯기(炭氣)를 알맞게 덜어낸 것이다. 지금 조선은 그것을 대장장이가 손으로 두들겨 만든다. 하루에 한 근 남짓 나온다. 나는 그것을 한 시진에 만 근씩 만드는 법을 안다. 방법은 어이없이 단순하다. 쇳물에 바람을 불어넣는다. 숯기가 바람과 만나 스스로 타면서 쇳물을 도리어 끓게 한다. 밖에서 불을 때지 않아도 된다. 나는 이것이 참인 줄은 아나 어느 정도로 불어야 하는지는 모른다. 그것은 여러분이 재라.
한주혁이 죽고 열네 해가 지나서야 조선은 그 문장을 실행에 옮겼다.
늦었던 이유는 셋이었다.
첫째, 아무도 믿지 않았다. 쇳물에 찬바람을 불어넣으면 식는다는 것이 대장장이 오백 년의 상식이었다.
둘째, 불어넣을 바람이 없었다. 초당 수십 세제곱미터의 공기를 쇳물 밑으로 밀어 넣으려면 강력한 송풍기가 필요했고, 송풍기에는 증기기관이 필요했고, 그런 출력의 증기기관을 조선은 임인년(1842)에야 만들었다.
셋째, 그릇이 없었다. 쇳물이 스스로 끓어오르는 이십 분을 견딜 내화재가 없었다.
무신년(1848) 삼월, 삼척 야철소에서 첫 번째 취강로(吹鋼爐)가 돌았다.
기록에는 이렇게 남아 있다.
— 사시에 무쇠 삼천 근을 붓고 바람을 넣었다. 처음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 반 각쯤 지나서 아가리에서 노란 불꽃이 솟았다. 다시 반 각 뒤에 불꽃이 흰빛으로 바뀌면서 소리가 났다. 국원들이 물러섰다. 소리가 사람 목소리 같았다.
— 십칠 분 만에 불꽃이 스러졌다. 쏟아 보니 강(鋼)이었다.
— 삼천 근이었다. 대장장이 하나가 팔 년을 두들겨야 나오는 양이다.
문제는 그다음에 왔다.
그렇게 뽑은 강철이 부러졌다.
차갑게 식으면 유리처럼 깨졌다. 무엇을 만들어도 못 썼다.
이 문제로 조선은 다섯 해를 잃었다.
원인은 인(燐)이었다. 조선과 만주의 철광석에는 인이 많았고, 인이 든 강철은 저온에서 취성이 생긴다. 유럽은 이 문제를 삼십 년 뒤에야 알아내고 다시 이십 년을 헤맨다. 영국의 베세머 강철이 오래도록 특정 광산의 광석에만 의존한 이유가 그것이다.
조선은 다섯 해 만에 풀었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 조선에는 분석화학이 있었다. 취강로에서 나온 좋은 강철과 나쁜 강철을 각각 백 번씩 분석해 성분 차이를 표로 만들었고, 인의 함량이 다르다는 것을 스물세 번째 표에서 발견했다.
둘째, 조선에는 실패 기록이 있었다. 다섯 해 동안 실패한 취강 이천사백 회의 조건이 전부 남아 있었다. 어느 광산의 광석을 썼는지, 노의 내벽을 무엇으로 쳤는지가 다 적혀 있었다.
그 기록을 뒤지던 젊은 국원 하나가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실패율이 유독 낮은 스물두 회가 있었는데, 전부 같은 시기였고, 그때만 내화 벽돌 재료가 달랐다. 규석이 떨어져서 도계 석회 광산의 백운석(白雲石)을 대신 썼던 것이다.
염기성 내화재였다.
염기성 내벽은 쇳물 속의 인을 빨아들여 찌꺼기로 뜨게 한다.
계축년(1853), 조선은 인이 든 철광석으로 강철을 만드는 법을 확립했다.
유럽이 같은 결론에 도달한 것은 1878년이다. 스물다섯 해.
그리고 이 스물다섯 해가 세계를 바꿨다. 조선이 만주와 한반도의 흔한 철광석을 전부 쓸 수 있게 된 반면, 유럽은 그 사이 인이 적은 특정 광산을 두고 서로 싸웠다.
강철이 나오자 조선은 궤도를 깔았다.
정사년(1857), 관동선(關東線) 개통. 한성에서 원주를 거쳐 강릉, 강릉에서 삼척까지. 육백 리.
대관령 구간은 굴 열한 개와 다리 서른두 개였다. 육 년이 걸렸고 삼천이백 명이 죽었다.
『공장 보호 조목』이 이 공사에는 적용되지 않았다. 적용하면 공기(工期)가 두 배가 된다는 이유로 의정원이 한시적 면제를 의결했다.
찬성 육십칠, 반대 이십구.
『삼척일지』의 사망 장부는 이때 성격이 바뀐다. 이름을 적던 것이 숫자만 적는 것으로 바뀌었다. 공사 규모가 커져 이름을 다 적을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백 년 뒤 국립사료원의 정리관은 이 대목에 이렇게 주석을 단다.
— 측명공의 장부가 죽은 해다. 그가 죽은 것은 갑오년이고, 그의 장부가 죽은 것은 정사년이다. 나는 후자가 더 중요한 죽음이라고 생각한다.

관동선이 개통되고 여섯 달 뒤, 의정원은 조선사에서 가장 사소해 보이면서 가장 멀리 간 결정을 내린다.
궤간(軌間) 표준안.
레일 사이의 폭을 얼마로 할 것인가. 논쟁은 사흘로 끝났고, 조선 표준궤는 넉 자 여덟 치 반으로 정해졌다.
문제는 그다음 조항이었다.
— 조선이 부설하거나 자금을 대는 모든 철도는 이 궤간을 쓴다. 조선이 만든 기관차와 차량은 이 궤간에만 맞게 만든다. 다른 궤간을 쓰는 나라에는 차량을 팔지 아니한다.
이것은 기술 규격이 아니었다.
이것은 무기였다.
조선이 청에, 뒤에 시암에, 페르시아에, 오스만에 철도를 놓아 주면서 조선 궤간을 쓰게 하는 순간, 그 나라의 철도는 영원히 조선의 차량과 부품과 정비 기술에 묶인다. 궤간을 바꾸려면 나라 전체의 철길을 다시 깔아야 한다.
장세환은 뒤에 이것을 이렇게 요약한다.
— 성을 쌓는 자는 성 안만 다스린다. 자를 정하는 자는 자를 쓰는 모든 땅을 다스린다.
경신년(1860) 무렵, 조선의 진짜 병목이 드러났다.
점결탄(粘結炭)이었다.
강철을 만들려면 코크스가 필요하고, 코크스를 만들려면 구우면 눌어붙는 역청탄이 필요하다. 조선의 석탄은 전부 무연탄이었다. 무연탄은 불을 잘 지피고 오래 타지만 코크스가 되지 않는다.
조선은 목탄과 무연탄과 수입 역청탄을 섞어 쓰는 편법으로 이십 년을 버텼다. 그러나 강철 생산이 연 오십만 톤을 넘어서자 편법이 무너졌다.
역청탄이 있는 곳은 세 군데였다.
영국. 미리견. 그리고 만주.
앞의 둘은 살 수는 있으나 언제든 끊을 수 있었다.
『의정원 회의록』 신유년(1861) 삼월.
의원 정대림이 물었다. — 만주 무순(撫順)의 탄전이 우리에게 얼마나 필요하오.
병기국 부제조가 답했다. — 그것 없이는 십 년 안에 우리 강철이 반으로 줍니다.
의원 정대림이 다시 물었다. — 반으로 줄면 나라가 망하오?
부제조가 답했다. — 망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우리는 다시 작은 나라가 됩니다.
의원 정대림이 오래 말이 없다가 말했다. — 나는 그 대답이 무섭소. 망한다고 하면 나는 찬성했을 것이오. 그런데 작아진다는 이유로 남의 땅을 갖는 것을, 나는 무어라 불러야 할지 모르겠소.
회의록에는 이 뒤로 아무 발언도 적혀 있지 아니하다.
정대림은 정약용의 손자다.
이 집안은 삼 대에 걸쳐 같은 질문을 하고 삼 대 다 진다.
『화학원 연보』 제1호, 신축년(1841) — 창립 취지
우리는 만물이 몇 가지 흙으로 되어 있다고 배웠다. 그것은 틀렸다. 만물은 예순 남짓한 홑것(元素)으로 되어 있고, 그 홑것들이 정해진 수로 붙어 덩어리(分子)를 이룬다. 그 붙는 방식을 알면 세상에 없던 물건을 만들 수 있다. 캐는 것이 아니라 짓는 것이다. 이 원(院)은 그 일을 하기 위해 세운다.
가스등을 만들려던 것이 시작이었다.
경자년(1840), 한성에 가로등을 놓는다는 계획이 섰다. 석탄을 밀폐된 가마에서 구우면 나오는 가스를 관으로 보내 태우는 방식이었다. 그러려면 역청탄이 필요했고, 조선은 그것을 왜와 청에서 사다 썼다.
가스를 뽑고 나면 가마 바닥에 검고 끈적한 것이 남았다.
콜타르였다.
쓸모가 없었다. 냄새가 지독하고 만지면 손이 검어지고 태우면 그을음이 났다. 처음 삼 년 동안 조선은 그것을 바다에 버렸다.
버리지 말자고 한 사람은 이경묵이었다.
당시 예순셋. 사십오 년 전 열아홉의 나이로 "쌀알을 다 세지 말고 헤아리는 법"을 써서 뽑힌 낙방 유생이었다.
그가 남긴 말이 있다.
— 측명공께서는 늘 이렇게 말씀하셨다. 쓸모없어 보이는 찌꺼기가 나오면 그것을 나누어 보라고. 세상에서 가장 값진 것들은 전부 누군가가 버리던 것에서 나왔다고.
그가 남긴 말이 있다.